Chapter 27 - 27. 에버노드 (1)
북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하고 어언 닷새가 흘렀다.
마물에게 중간중간에 습격당하고, 비와 진창에 발이 묶이기도 하며 시간이 좀 지체되긴 했지만, 우리는 어제부로 드디어 북부라고 불리는 영역에 진입할 수 있었다.
승마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쉬웠다. 내가 고삐를 당기거나, 옆구리를 차며 강하게 요구하지 않아도 말은 내 생각대로 잘 움직여주었다. 어째 사람보다도 이 녀석과 소통이 더 잘 되는 거 같은 기분이다. 아니면 애초에 원작의 일로이가 승마에 일가견이 있었거나.
“날이 지날수록 해가 점점 길어지고 있군.”
게오르그가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날짜는 점점 하지를 향해 가고 있는 데다가 고위도로 올라가고 있으니까. 에버노드에 도착한다면 그 말로만 듣던 백야 현상을 확인할 수도 있겠다.
“지금 시간이 몇 시쯤 됐어?”
“이제 오후 여섯 시다. 말들이 지칠 때도 됐으니, 슬슬 근처에 야영장을 잡고 휴식하면서 다음 날을 대비하는 게 좋을 듯하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를 돌아보자, 다프네와 마리안느를 비롯해 이번 북부행의 호위를 맡은 기사와 병사들이 보였다. 단순히 호위일 뿐만이 아니라, 항상 에버노드를 지키는 북부대공의 노고를 치하하고, 부족한 병력을 증원하는 의미도 지닌다고 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가고, 야영을 할 만한 장소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말을 멈춰 세우며 말하자, 병사들은 얼굴에 화색을 띠며 재빠르게 말에서 내렸다. 딱히 불평불만을 하지 않는 좋은 병사들이었지만, 퇴근할 때는 신나서 야영장을 설치하고, 출근할 때는 조금 느릿하게 야영장을 철거하는 모습이 공감돼서 웃음이 나왔다.
“우리도 슬슬 설치해야지.”
나는 말에서 내리며 굳은 몸을 풀어주었다. 달리는 건 말이 한다지만, 몇 시간 동안이나 말을 타고 있는 것도 상당한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몸을 돌릴 때마다 뼈마디가 우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말을 매어놓고는 야영지에서 막사를 설치하는 일을 도왔다. 처음에는 이런 일은 하지 말라며 말리던 기사와 병사들이 이제는 아예 내게 일을 먼저 맡기기 시작했다.
“아, 용사님. 이제 잘하시네요.”
“그렇지? 손에 익으면 뭐든지 잘 할 수 있다니까.”
내가 은근히 우쭐해져 말하자, 병사들이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리며 자기들 천막을 가리켰다.
“그런 김에 우리 막사 설치하는 것도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꺼져, 자식들아.”
병사들은 낄낄거리며 도망갔고, 나는 순식간에 완성된 천막 앞에 주저앉았다. 방금 막 피운 모닥불이 잔가지를 먹어 치우며 새빨갛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초여름. 불 앞에 앉아있기에는 좋은 날씨가 아니었지만 바뀐 기후는 모닥불의 적당한 온기를 요구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날이 시원해져서 좋긴 하네.”
에버노드에 가까워질수록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바람은 어제부터 다른 냄새를 풍겼다. 이끼가 껴 젖은 흙과 돌의 냄새에 찬바람 맞은 나무껍질의 냄새. 강 상류가 풍기는 깨끗한 물의 냄새. 그런 것들이 섞여 북부의 복잡한 공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북부의 마물들은 사납다.”
게오르그가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게오르그를 바라보았다.
“북부에 가본 적이 있어?”
“있지.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기사처럼, 나도 정기적 파병에 참여한 적이 있다.”
게오르그는 모닥불 위로 올려진 반합을 바라보며 나뭇가지로 불을 쑤셨다.
“겨울에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마물이 훨씬 사나워지지. 눈이 무릎까지 쌓인 채로, 마음 놓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며 마물과 싸운 건 고역이었다. 나는 이번 원정 시기를 여름으로 잡은 것을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때보다 흉포해진 잿빛곰이라. 그다지 상상하고 싶은 상대는 아니었다.
“우리도 설치 다 끝냈어요.”
야영지 설치를 끝낸 다프네와 마리안느가 다가와 앉았다. 어색한 둘 사이로 ‘친해지길 바라’ 프로젝트를 시행하는 중이었다. 억지로 시킨 감이 없잖아 있지만, 다프네는 천천히 마리안느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리안느의 무미건조한 모습에 나만큼이나 장단을 잘 맞추는 듯했다.
“오늘은 일로이가 요리하는 날인가요?”
다프네는 반합을 슬쩍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지난번 마리안느에게 혹평받았던 요리는 나름 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먹어줄 만은 하다.’라는 게 지난번 게오르그의 평가였다. 뭐, 마리안느가 일단 넘을 수 없는 벽이었기에 일행은 내가 요리할 때마다 만류하곤 했지만.
“응. 이번에는 그래도 저번보다는 덜 모험적일 거야.”
다프네가 불안하다는 듯 반합을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험적인 시도를 할 때마다 반응이 좋은 것이 있었고, 좋지 않은 것이 있었다. 내 머릿속의 컴퓨터는 그 빅데이터를 정리하며 최적의 스튜를 만들어 내는 법을 서서히 도출하기 시작했다.
“얼추 완성된 것 같군.”
“…이번에는 진짜 이상한 거 안 넣었죠?”
게오르그는 내 야매요리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는지, 기대된다는 듯 반합을 훔쳐보았고, 다프네는 불안한 듯 반합 쪽으로는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솔솔 올라오는 냄새는 그리 불길한 냄새가 아닌데, 내 입맛이랑 좀 다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합 세 개를 불에서 꺼냈다.
슬쩍 숟가락으로 떠서 맛을 봤다. 음. 내가 여태 만든 것 중에 제일 낫다.
“괜찮군.”
“…나쁘지 않네요.”
미묘한 평가였다. 표정들이 굳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한동안 잡담을 나누며 밥을 먹었다. 지난 내기 때 5서클에 진입한 다프네의 발전 속도와, ‘나 때는’이라며 북부에 있을 적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주는 게오르그의 경험담이 오늘의 주된 주제였다.
“이제부터 정말 네 번째 재앙이랑 싸우러 가는 거네요.”
다프네가 멍하게 불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텅 빈 반합이 차곡차곡 쌓인 채 물기를 말리기 위해 불가에 놓여있었다.
“일곱 재앙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나?”
게오르그가 다프네와 마리안느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프네는 확신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고, 마리안느가 그녀로서는 드물게도 입을 열었다.
“신의 적이자, 인류의 적.”
“…그렇지. 신화시대의 잔재인, 세계를 멸망시킬 일곱 개의 재앙.”
게오르그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뱀’, ‘메뚜기’, ‘크라켄’, ‘거인’, ‘안개’, ‘유성’, 그리고 ‘근원’.”
재앙은 그 이름만으로 스산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게오르그가 하나씩 언급할 때마다 모닥불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재앙이라 알려진 ‘뱀’과 ‘메뚜기’는 우리 이전 세대에 공략되어 사라졌지. 그리고 세 번째 재앙인 크라켄은, 알다시피 지난번 원정에서 공략되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재앙까지를 설명하는 건 게오르그가 더 잘 할 수 있을 거다.
“세 번째 재앙과 싸울 때는…, 그것들이 정말로 왜 세계를 멸망시킬 재앙이라는 지 알 수 있겠더군.”
게오르그는 크라켄 공략전 당시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그놈이 발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함선이 몇 척씩 사라졌어. 결국 해상에서 전투를 끝내지 못하고 부두까지 놈을 끌어들인 후에 싸워야만 했지. 그렇게 항구도시가 완파되다시피 했지만, 어떻게 모든 병력을 동원하니 힘겹게 잡을 수 있었다.”
게오르그는 그리 말하며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처참한 승리였어. 그렇지 않았나?”
“…그래.”
나는 모닥불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수긍했다. 여기서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최선이겠지만, 게오르그는 내 그런 침묵을 자책이라 생각한 듯하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그것이 인간 사이의 전쟁이 아닌, 인류 전체를 지키고자 하는 숭고한 싸움이라면 그들의 죽음 또한 무의미하지는 않을 테지.”
내가 모르는 죽음. 내가 모르는 전쟁. 나는 함부로 말로써 게오르그에게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다프네가 우물쭈물하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알 것 같다.
“뭐, 우울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다른 질문이나 해봐라.”
게오르그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나는 괜히 가만히 있으면서 분위기를 죽이기 싫어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겨울에 야영장은 어떻게 설치했냐? 다 눈으로 쌓여있었으면 뭘 하기도 쉽지 않았을 건데.”
“이끼를 뜯어와서 깔고 잤다. 체온이 빼앗기는 걸 어떻게든 막아야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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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이.”
나는 눈을 껌벅거리며 일어났다. 주변이 완전히 어둠으로 잠겨 있었다. 오늘은 내가 말직. 해가 뜰 때까지 보초를 설 차례다. 나는 내 어깨를 툭툭 치는 게오르그의 손을 짜증스럽게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날씨는 쌀쌀했고, 침낭은 축축했다.
“나갈게. 그만 좀 쳐라.”
다시 게오르그를 내보낸 나는 궁싯거리며 외투를 입고 성검을 챙겨 들었다. 천막을 헤치고 나가니 게오르그가 피곤한 붕어눈이 되어 랜턴을 들고 서 있었다.
“교대다. 특이사항은?”
“없어. 여름인지라 마물들이 제 영역에서 잘 놀고 있는 것 같군. 그래도 앉아서 졸지 말고 잘 깨어 있어라.”
게오르그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하며 내게 랜턴을 넘겼다. 그 사이 마나를 순환시켜 잠기운을 완전히 몰아낸 나는 똘망똘망해진 눈으로 랜턴을 넘겨받고 게오르그를 들여보냈다. 북부의 침묵 속에서는 부엉이와 까마귀가 우는 소리만이 이따금 들려왔다.
나는 랜턴을 내려놓으며 모닥불가에 가 앉았다. 보초를 서는 병사와 기사들은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그들을 한 번 바라보고는 성검을 뽑아 들었다.
“[준비는 되었느냐?]”
“물론이지.”
에버노드로 출발할 때, 성검은 내게 두 가지 과제를 내렸다.
‘[두 가지 과제를 주마.]’
‘과제라고?’
‘[내가 지금부터 내리는 과제 두 가지를 모두 완수하는 것이 제2 단계의 개방 조건이니라.]’
‘2단계의…개방.’
나는 성검을 뽑아 들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뱉었다. 마나가 몸을 타고 흐르며, 주변의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내가 일전에 심, 기, 체에 관해 이야기를 들려줬던 걸 기억하겠지.]’
‘그래. 그 '체'를 단련시키려고 오질나게 고생했었지.’
‘[내가 보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하다만, 뭐, 이번에는 '체'가 아니라 '심'의 이야기다.]’
휭.
성검의 검날이 허공을 가볍게 갈랐다.
‘[첫 번째 과제로, 이번에 그 주교라는 녀석에게서 받은 면류관을 길들여라. 그 시련을 통과하라는 소리다.]’
‘끔찍하군.’
‘[면류관의 시련은 매번 달라질 거다. 네 정신력 그 자체를 시험하는 셈이니, 잘 견딜 수 있도록 해봐라. 그렇다면 내가 2단계를 개방했을 때도 그 여파를 견딜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뭔데?’
휭.
‘심이라는 건 네 정신력뿐만이 아니라, 흔히들 말하는 '심득'을 말하는 경우가 많지.’
휭.
‘이번에 네게 요구하는 건, 그 힘을 다룰 기술을 익히라는 거다. 무릇 강(强)을 제압하는 건 더 강한 힘이 아니라, 유(柔)이니,’
휭.
‘두 번째 과제. 일검을 휘둘러 내 검끝에 이슬을 올려보아라.’
촤악!
결국 내 검풍을 견디다 못한 나뭇가지가 베어졌다. 나는 불만족스럽게 성검을 바라보고는 이내 팔을 내렸다. 매일 밤마다, 혹은 시간이 날 때마다 검을 휘두르며 연습하고는 있지만 아직 성검의 말과 이 수련의 진의를 1할도 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
“[그걸 닷새 만에 깨우쳤다면 넌 그랜드 소드마스터 따위는 뛰어넘는 재능을 가졌다는 소리겠지. 애초에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여태 나를 다뤘던 사람 중에서 가장 오성이 뛰어났던 놈도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으니까.]”
나는 이슬을 맺기는커녕 베어버릴 기세의 예기를 지닌 성검의 검날을 쓸어보았다. 모닥불에 비쳐 새하얀 검신이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그 날카로움마저 네가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어렵구만.”
나는 다시 검을 쥐고 기수식을 취했다. 밤은 기니, 이것저것 시도해볼 시간은 많이 남았다.
부스럭.
한창 다시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였다. 풀잎을 밟는 소리와 함께 나를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검을 내리며 고개를 돌리니, 의외의 인물이 야영장의 건너편에서 내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마리안느.”
창에 기대어 서서, 보름달과 닮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마리안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