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 - 28. 에버노드 (2)
“수련 중이셨습니까.”
마리안느는 내게로 걸어오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종속(終速)을 줄여보기도 하고, 휘두르는 움직임 자체를 더 둔하게 가져가 보기도 했다. 아예 모든 동작을 아주 천천히 재연해보기도 했는데, 아직 감은 잡히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검날을 떨어트렸다. 움직이는 동안 흘린 땀이 차가운 밤공기에 금세 식었다.
내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마리안느. 나는 그녀를 향해 다시금 고개를 돌리며 이마를 옷자락으로 훔쳤다.
“…너도 오늘 말직이야?”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한 손으로 잡은 창이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마리안느의 창을 흘긋 바라보았다. 창간(槍杆)에서부터 창준(槍撙)까지가 전부 금속으로 된 창이었는데, 빛이 바랜 창두(槍頭)가 유독 오래되어 보였다. 아마 제법 강한 유물인 것 같은데.
“[성창(聖槍)이 맞는 것 같군. 꽤 강해 보이는구나.]”
아무래도 청교회에서 정말 작정하고 나를 도와주려는 것 같았다. 성창은 원작에서 아르옌이 성검을 얻을 때까지 사용하던 성유물이다. 제법 강력한 위용을 뽐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가치로 따지자면 내가 받아온 면류관과 엇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럼, 마리안느도 성창이 내린 모종의 시련을 통과했다는 뜻이 될까.
마리안느는 성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는, 그 시선은 성검의 검자루를 붙들고 있는 내 오른팔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체- 내가 펼치던 검의 흔적을 쫓고 있는 듯했다.
“어떤 수련을 하고 계셨는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의외였다. 마리안느가 질문을 하다니. 그것도 먼저 내게 다가와서 말을 걸며 물어본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정직하게 대답을 해줘도 괜찮으려나.
“[답을 구하는 건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다, 일로이. 내가 모든 걸 알려줄 수는 없으니, 다른 이들에게도 물어가며 너만의 답을 찾아봐라.]”
성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음. 설명하자면 조금 복잡한데.”
“찾으시는 게 있던 것 같습니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아니면 그만큼 내 몸짓이 뻔하고 단순했거나.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성검을 검집에 꽂았다. 아무래도 오늘 불침번 시간은 마리안느와 이야기하며 보내야 할 것 같다. 나는 손짓하며 마리안느를 모닥불가로 불렀다.
“무(武)에 있어 부드러움이란 뭘까.”
마리안느는 내 질문을 듣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그런 움직임을 계속하고 있었던 거군요.”
“그다지 의미 없는 행동이었나?”
마리안느는 내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고 성창을 슬쩍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바람에 흩날려 날아오는 나뭇잎 하나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날아가는 창두는 빨랐지만, 아주 느린 것 같기도 했다. 마리안느가 다시 회수해온 성창의 끝자락에는 얇은 나뭇잎 하나가 얹어져 있었다. 나뭇잎 중앙의 잎맥을 정확히 짚어내 그 점만을 창끝으로 꿰뚫은 거다. 나는 그 기예에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마리안느의 창끝을 바라보았다.
“굉장한데. 어떻게 한 거야?”
“…이 과정을 말로 무어라 설명해드리기는 힘듭니다.”
마리안느는 손을 뻗어 창끝의 나뭇잎을 떼어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다시 날려 날아갔다. 내가 지금 당장 저걸 검 끝에 꿰라 하면 할 수 있을까? 아니. 완전히 베어버리거나 스치지도 못하고 바람에 날려 보내겠지.
“그래도, 원하신다면 불침번을 설 동안 몇 번이고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마리안느가 그리 말하며 다시 창을 부드럽고 간결하게 휘둘러 보였다. 전과 같은 동작이었지만, 두 번째로 보니 그 움직임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한 번만 더 보여줄 수 있을까?”
마리안느는 지체하지 않고 다시 창을 휘둘렀다. 두 번째로 볼 때와 그렇게 달라 보이지는 않았다. 세 번째로 보아도 마찬가지.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내가 저리 검을 움직이는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괜히 ‘심득’이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니다, 일로이.]”
성검이 말을 걸어왔다.
“[움직임의 아주 사소한 차이. 호흡과의 간격. 그 순간 순환하는 마나와 뛰는 심박까지. 그 모든 조건을 네가 생각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행하게끔 해주는 것. 그게 깨닫는다는 거다.]”
휙.
다시 내 눈앞을 마리안느의 창이 스치고 지나갔다. 성창의 창끝은 이번에도 한 치의 오차 없이 나뭇잎의 잎맥을 꿰뚫었다. 나는 집중하여 마리안느의 동작을 하나하나 지켜보았고, 마리안느는 불평 없이 계속 동작을 재연해 보였다.
“응. 보여줘서 고마워.”
나는 마리안느의 손을 지그시 누르며 저지했다. 저대로 놔두면 해가 뜰 때까지 계속 창을 휘두르고 있을 거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무들이 삐죽삐죽 밤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는 와중에, 촘촘히 하늘에 박힌 별들이 쏟아져 내리려 하는 것 같았다.
“검을 한 번 휘둘러보시겠습니까.”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던 마리안느가 물었다. 나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리안느가 보여준 것에 비하면 그냥 허우적거리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하나라도 더 배우는 거니까.
“…어떻게 휘두르면 될까?”
“제가 하던 대로.”
나뭇잎을 꿰뚫어 보라는 건가. 나는 검을 쥐고 기수식을 취했다. 아니, 그러려다 왼손을 놓고 몸에 힘을 빼었다. 두 손으로 휘둘렀다가는 나뭇잎을 꿰뚫기는커녕 헛손질만 남발할 듯했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나뭇잎이 날아들기를 기다렸다.
펄럭-.
그러다가 넓적한 잎 하나가 팔랑거리며 하늘로 치솟았다. 나는 쓸어올리듯 성검을 밀어 올려 나뭇잎을 꿰뚫으려 했다. 하지만….
픽.
성검의 검끝은 잎을 꿰뚫지 못하고 조금 베어버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나는 바람을 따라 흘러가는 나뭇잎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다시. 겨우 한 번 보려고 마리안느가 내게 동작을 시켜보지는 않았을 거다. 나는 마리안느가 보여주었던 동작을 떠올리며 몇 번인가 날아드는 나뭇잎을 향해 검을 휘둘러 보았다.
“…생각보다도 훨씬 힘드네.”
나는 실수로 완전히 반토막을 만들어버린 나뭇잎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은 수련법이구나. 나름 네가 끈기가 있으니, 이런 것도 좋을지 모르겠다.]”
뭔가 그럼 내가 여태 했던 게 무의미해지는 기분인데.
“[무의미하지만은 않다. 결국 무(武)의 깨달음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답을 구하려는 행동은 의미를 지닐 거다.]”
성검이 나를 위로하듯 말했다. 다시 나뭇잎이 날아든다. 이번에는 검을 휘두르지 않고 가만히 나뭇잎이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잠시.”
“[저, 저…!]”
언제 간격에 들어온 건지, 어느덧 마리안느가 내 눈앞까지 와있었다. 나는 뻣뻣하게 서서 마리안느가 내 팔목과 옆구리 언저리를 만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리안느는 한동안 그렇게 반걸음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내 몸을 이리저리 만져보더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모닥불의 빛에 은은히 빛나는 레몬색이 섞인 무감정한 금빛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몸에 힘을 조금 빼셔도 됩니다.”
마리안느는 그리 말하며 내 팔꿈치를 받치고는 팔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나는 뻣뻣하게 마리안느의 손길에 따라 몸짓을 바꾸다가, 이내 힘을 조금씩 빼었다. 마리안느는 그러다가 이내 뒤쪽으로 돌아 내 등에 붙어 발과 손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런 느낌으로 창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이 한 장 날아왔다. 마리안느는 아주 가볍게 내 팔과 다리를 밀어주며 나뭇잎을 향해 성검의 검끝을 인도했다.
툭.
마리안느의 손이 내 팔꿈치를 떠났고, 나는 그 힘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팔을 뻗어 보았다.
틱.
물론, 그렇다고 기적같이 성공하는 일은 없었지만. 나뭇잎은 나풀나풀, 바닥으로 떨어지다 이내 다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내게서 물러난 마리안느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냐고 물어보는 것 같기도 했다.
“어렵네. 몸이 안다고 해서 전부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
성검의 예리함이 아니었다면 나뭇잎을 찢어버리는 일도 하지 못하지 않았을 거다. 나는 복잡한 머리를 긁적거리며 마리안느에게 대답했다. 확실히, 마리안느가 움직이는 과정에 생각이 전혀 개입하지는 않는 듯했다. 어떤 깨달음을 얻어야 저런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말씀을.”
“…그래.”
나는 성검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가 든 성창의 끝에서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부엉이 우는 소리 속에서 나는 성검을 끌어안고 모닥불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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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었던 수림을 빠져나오자, 황당할 정도로 넓은 평야가 펼쳐졌다. 돌과 야생화가 군데군데 핀 와중에 좁은 개울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졸졸 흘러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병사들의 말에 따르면 이 개울을 따라 걸어가 강의 본류를 만나면 에버노드가 보일 거라고 한다.
일행은 말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잠시 멈춰 섰다. 냇물에 자르르 비치는 햇살이 아름다웠다. 한 열두 시간쯤 아름답게 비치고 있다는 것만 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 몇 시쯤 됐더라.”
해가 길어지는 게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나는 아직도 이른 오후쯤에 머무르는 해의 위치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쨍한 햇살이 들판에 드리우는데, 체내 시간은 이미 저녁이었다. 나는 그 괴리를 이기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7시가 됐다. 조금만 더 가면 에버노드가 나오니, 길게 휴식하지 않고 계속 가는 게 좋겠어.”
게오르그는 다시 말 위로 올라서며 말했다.
“아침 7시는 아니겠지?”
“여태 말 위에서 자고 있었나?”
그리 말하는 게오르그였지만, 그 역시 태양을 보며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눈만 안 내리면 좋을 줄 알았는데, 이런 문제가 있다니.
“겨울의 북부에는 태양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냐.”
게오르그가 그리 말했다. 이 녀석, 어째 여기 오면서 점점 꼰대 말투가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저 우직한 기사가 그런 경험담을 습관적으로 들려준다는 건, 그만큼 여기서 고생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 나는 북부 파병 시절의 이야기를 또 늘어놓기 시작하는 게오르그를 뒤로하고 말 위에 올랐다.
“조금만 더 가면 에버노드의 성에 도착한다. 가면 스트로프 대공을 만나 뵙고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겠지.”
게오르그의 목소리에는 모종의 흥분감이 깃들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랜만에 친구, 아니, 군대 동기를 만나는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너털웃음으로 게오르그의 말을 받고는 개울을 따라 말을 몰고 올라갔다.
개울은 완만한 언덕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햇살이 이른 오후에서 느지막하고 게으른 금빛으로 바뀌었을 때, 내 뒤로 한 기사가 말을 몰아오며 앞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저기, 에버노드가 보입니다.”
나는 말을 멈춰 세우며 드높이 솟아오른 성탑 위에 꽂힌 두 개의 깃발을 보았다. 두 깃발은 나란히 서 있었다. 하나는 당연히 카이로스 왕국의 국장(國章)이었고, 왕국의 국장과 나란히 선, 오만하기까지 한 기세의 깃발은 에버노드의 지배자, 스트로프 가문의 문양이었다.
“…마중이라도 나와 있는 건가?”
에버노드의 성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 옆으로, 바이저를 푹 눌러 쓴 수십 명의 병사가 도열해 있었다. 기사로 보이는 이들은 하나같이 근엄한 표정으로 검을 뽑아 가슴 앞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그 끝에 한 남성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 걸음 한 번 한 번에 싸늘한 북풍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남자는 대열의 끝에 당당히 자리 잡고 섰다. 온통 새카만 복장. 회색 모피가 달린 커다란 망토가 바람에 펄럭거리며 흩날렸다. 보이는 건 그것이 전부. 그 외의 모든 건 저 남자가 내뿜고 있는 기세였다. 마치 거대한 태산이 짓누르는 것 같은 존재감. 그 위압감은 지독하리만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남자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오며 내 눈과 마주쳤다. 얼음처럼 새파랗게 얼어붙은 시선. 남자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준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작에서는 저 강직한 모습으로 꽤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에버노드에 온 걸 환영한다.”
북부대공, 퀘노어 스트로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