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 - 29. 에버노드 (3)
우리는 말에서 내려 북부대공을 맞이했다. 퀘노어 대공은 천천히 대열 앞으로 걸어 나와 일행을 바라보았다. 정말인지, 딱 판타지 소설의 북부대공을 빼다 박아놓은 듯한 외모였다. 30대 후반, 높게 잡으면 40대 중반 정도 되었을 얼굴에는 새파란 눈동자와 길게 뺨을 덮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돋보였다.
“예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용사.”
퀘노어 대공은 키가 컸다. 일로이의 키가 185센티미터 정도 될 테니, 일로이를 살짝 내려다볼 정도의 퀘노어 대공은 적어도 190센티미터는 되겠지. 게다가 딱 벌어진 어깨와 그 위로 얹힌 모피 망토가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함께 발산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건 물론 그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동굴에서 울려 퍼지는 것처럼 웅혼하고 굵은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혀 숨기지 않고 가감 없이 드러내는 무인 특유의 투기. 그건 용사가 되었든, 여왕이 직접 파견한 기사들이 되었든, 모조리 찍어누르고자 하며 공기 중에 감돌고 있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으며 올바른 대답을 들려주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겨울에 북부와 왕도를 오가는 것 보다는 훨씬 수월한 길이었겠지요. 언제나 북부를 수호하느라 노고가 많으십니다.”
“재앙을 잡으러 원정을 다니는 그대만 할까. 일단 성안으로 들지.”
퀘노어 대공이 성문 안쪽으로 손짓하며 말했다. 높으신 분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무감정을 표방한 목소리였다. 병사들이 우리가 타고 온 말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 마구간으로 가는 길이겠지. 내 손에 들린 말의 고삐를 잡아채는 손길이 꽤 거칠었다.
“[환대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군.]”
성검의 말대로, 여기 도열한 병사들의 반응은 빈말로도 친절하다고 해줄 수 없었다. 자존심 드높은 북부의 병사들은 제 주인을 이렇게까지 나서게 하는 용사의 존재를 썩 달가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딱히 나와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말이지.
“병사들의 분위기가 날카로워도 이해해 주게. 북부는 원래 이런 곳이니.”
그 병사들을 자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퀘노어 대공이 말했다. 구태여 이 환대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며 불필요한 마찰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입을 다물고 대공을 따라 걸어갔다.
“[네 성격에 따지고 들 줄 알았다.]”
성검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개길 사람을 봐 가면서 개겨야지. 현재 시점에서 북부대공보다 강한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단순히 강함뿐이더냐?]”
당연히 그건 아니지. 어차피 이건 일종의 통과 의례, 기강 잡기 내지는 신고식에 불과하다. 소설에서 흔히 나오는 북부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고. 여기서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저들이 나를 기꺼이 맞이하리라는 예상은 하지 않았다.
“우선, 피곤할 테니 먼저 그대들의 숙소로 먼저 안내해주도록 하지. 여름이라 아주 편하게 쉴 수만은 없을 거야. 하지에 가까워지면 아예 밤이 없는 날이 몇 주는 지속되니.”
퀘노어 대공은 경고하듯 말했다. 게오르그의 눈치를 슬쩍 보니, 주위 사람들과 어떻게든 대화를 나누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조금만 참아, 꼰대.
우리는 마차에 나누어 탑승했다. 파견을 위해 찾아온 기사와 병사들은 따로 인솔되어 팔려 갔고, 나와 게오르그, 다프네와 마리안느만이 남았다. 게오르그는 아예 마부석, 한 병사의 옆자리에 탑승했고, 나는 4인승 마차에 다프네, 마리안느와 함께 앉았다.
“북부는 뭔가 거치네요. 세간 사람들의 인식에 맞아 떨어지는 거 같아요.”
다프네가 창밖을 슬쩍 내다보며 말했다.
“혹시 모르지. 우리 기대를 배신하기 싫어서 일부러 연기하고 있는 거일 수도 있고.”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요.”
다프네가 눈살을 찌푸리자, 나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덜컹.
그때, 마차의 문이 열리며 웬 거한이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마차를 타는 데 거추장스러운 망토는 어딘가에 벗어두고 온 퀘노어 대공이었다. 마부석의 게오르그에, 객실의 북부대공에 나까지 있는 마차를 고작 말 두 마리가 끌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대공이 마부석의 미닫이창을 두드리자, 마차는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시간이 아까우니 마차 내에서 기본적인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고압적인 태도. 퀘노어 대공은 나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대공의 얼굴에는 꽤 인상적인 흉터들이 나 있었다. 왼쪽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 하나, 머리가 찢어진 듯 균열처럼 난 흉터 하나. 그렇지 않아도 험악한 인상이, 어린애들이 보면 바로 울음을 터뜨릴 만한 것이 되었다.
“그간 자네에 관한 이야기는 잘 전해 듣고 있었네, 용사. 그대가 유적에서 검을 뽑아 올렸다는 소식을 듣고서, 북부 또한 그대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지.”
“그건 영광이군요.”
내 동향을 주목하고 있다는 말이 왜 전혀 긍정적으로 들리지 않을까. 하긴, 내부에서 계속 삐걱거리던 용사 파티의 용사가 소문이 좋게 났다고 할 수는 없겠지. 미덥지 못하다는 듯한 표정의 대공을 바라보며 나는 질문을 던졌다.
“‘한계선’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내가 한계선이라는 말을 언급하자, 대공은 꽤 놀란 듯하며 눈썹을 구부렸다.
“먼발치에서 하루에 한 걸음 정도로,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네. 일주일에 한 번은 한계선 너머에서 마물의 군세가 쳐들어오고 있지.”
한계선 너머는 1년 내내 얼음이 얼고 눈보라가 치는 땅이다. 그리고 네 번째 재앙, ‘거인’이 머무르는 곳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거인은 그 자체로 강력할 뿐만이 아니라, 북풍과 겨울을 몰고 다니는 존재. 괜히 세계 멸망을 부르고 지성이 있는 마물들 위에 신적인 존재로 군림하는 게 아니다. 대공이 말하는 마물의 군세 또한 그 지성이 있는 마물들이 통솔하고 있겠지.
“먼저 마물 토벌에 나서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하루에 한 번. 토벌이라기보다는 적의 동태를 알아보는 정찰에 가깝네. 마물 토벌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일이지.”
“아직은 특이사항이 없습니까?”
“평소대로지. 너무 평소대로라 오히려 불온할 정도로. 자네도 함께 정찰을 나가 보면 알게 될 걸세.”
퀘노어 대공은 이제 자신이 질문할 차례라는 듯 앞으로 몸을 숙였다.
“용사, 자네는 거인을 죽일 수 있겠나?”
나는 대공의 질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거인’은 계책을 써서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바다가 크라켄의 영토였듯, 얼어붙은 땅은 거인의 영토였다. 크라켄과 차이점이 있다면, 거인은 부두로 유인한다고 해서 죽이기 수월해지지는 않다는 것.
뭐, 나는 할 수 있다, 없다 따위로 대답하지 않을 거다. 어느 쪽으로 대답해도 흠잡을 만한 구석은 있을 테니까. 홀대야 그냥 내가 무시하면 되는 거지만, 내가 얕보이는 건 나뿐만이 아닌, 파티 전체의 위신이 달린 일이다. 여기서는 지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공께서는 싸움하기도 전에 미리 승패를 재단하고 가십니까?”
“못한다는 말인가?”
이건 시험을 겸한 도발이다. 괜히 화를 내면 안 된다.
“싸우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는 뜻이지요. 재앙과 싸워 어찌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하며 싸우겠습니까. 그건 오만이라고도 할 수 없이, 차라리 백치의 생각에 가깝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약간 낮추었다. 퀘노어 대공의 눈이 빛났지만, 나는 피하지 않았다.
“싸워 이긴다. 그런 확신 따위, 세 번째 재앙과 싸울 때도 갖지 못했습니다.”
게오르그가 없는 자리라 마음대로 떠들 수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퀘노어 대공은 내 말에 더 반박하려 하지 않고 깔끔하게 입을 다물었다. 나를 향해서 날 세우던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았다. 덕분에 다프네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래. 그건 자네가 더 잘 알겠군.”
그래도 왕도의 정치인들처럼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고 깔끔하게 끊는 모습은 좋았다. 내가 꼰대 취급하면서 대충 흘려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기는 살기 힘든 곳이다. 왕도의 편한 환경에서 살다 온 외부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예민하게 굴어도 이해해줘야지.
짧은 문답이 끝나자, 한동안 마차 안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우리가 머물 별채에 도달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퀘노어 대공은 마차에서 내리는 나를 불렀다.
“밤이 짧아, 잠을 오래 자지는 못할 거다.”
“괜찮습니다.”
“창문의 암막을 치고 잘 수 있도록 해라.”
그리고서 마차는 멀어져 갔다. 게오르그는 한참 하고 싶던 이야기를 다 풀어놨는지, 속이 시원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놈이 저래 들뜬 건 처음 봤다. 군인 체질이 확실하다.
“실컷 잘 떠들었냐?”
게오르그는 그때야 조금 부끄러운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다프네는 우리를 노려보다시피 하는 주변 병사들을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어요.”
“북부에서 동료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시간이 꽤 걸리지. 뭐, 머지않아 저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거다.”
게오르그는 그렇게 어깨를 으쓱이며 숙소로 들어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에버노드의 병사와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통과 의례라고는 하지만, 적당히 하고 넘겼으면 좋겠는데.
“[네 불길한 예감은 보통 맞아떨어지더군.]”
불길한 예감이 잘 맞아떨어진다는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마. 네가 그런 말을 하면 거의 확정이란 말이야.
“[모르고 맞는 것보다는 알고 맞는 게 낫지 않나?]”
난 안 맞는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우리의 뒤통수를 향해 꽂히는 기사와 병사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게오르그의 뒤를 따라 숙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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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는 어떠셨습니까?”
에버노드의 성채.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퀘노어 대공의 옆으로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퀘노어 대공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은 잘하더군. 실전에서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문만큼 태도가 나쁘지는 않았네. 함께하는 동료들과의 사이도 썩 괜찮아 보였고. 자신이 새로 뽑은 동료들이라고 하니, 그 사이에서 불화가 있다면 정말 이상한 일이겠지만.”
북부에 미친 용사의 소문은 영 미덥지 못하고 불온한 말뿐이었다. 동료들과 불화가 잦다.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 그런 태도를 지닌 것 치고는 썩 강하지도 않다고 한다. 강하다는 소문이 있으면 호승심이 들었지만, 약하다는 소문은 혐오스러워했다.
결정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동료를 내치고는 멋대로 제 입맛에 맞는 동료만을 들였다는 소문. 특히 여기서 함께한 동료를 내쳤다는 말은 유대를 누구보다 중시하는 북부인들에게 비호감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참모진이야 함부로 속단하지는 않겠지만, 다른 기사나 병사들이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하지는 않을지 우려되는군요. 미리 일러두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퀘노어 대공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도록 만들겠다.”
그리고는, 덧붙이며 중얼거렸다.
“정말 용사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었는지, 사소한 잘못이 부풀려져 떠돌아다니는 것이었는지 내일 내가 직접 시험할 테니 말이야. 그리고서 어느 형태로든 불만을 종식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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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솔직히 날이 바뀌었는지조차 모르겠지만, 돌아가는 시계의 시침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기에, 다음 날이라 칭하겠다. 퀘노어 대공은 우리에게 장비를 갖춘 후 성채 앞에서 회동하자는 말을 남겼다. 나는 인솔 기사의 뒤를 따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별일이네. 마물이 한계선을 넘어오고 있다는 소식이라도 들려온 걸까.”
내 말에, 게오르그가 중갑을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에버노드의 방비를 돕기 위해 파견된 입장이다. 일을 맡긴다면 해내면 될 뿐이지 않겠나.”
나는 괜히 어제 성검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퀘노어 대공은 성채 앞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간단한 인사만을 나눈 후, 대공은 우리를 연병장으로 데려갔다. 이미 병사들은 기사들의 지휘에 따라 도열한 채 끓어오르는 군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퀘노어 대공은 나를 흘끔 바라보고는 도열한 병사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 1번 순찰 구역은 내가 직접 돌겠다.”
소란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제법 놀란 눈치였다.
“…홀로 가시는 겁니까?”
“아니. 이들과 함께다.”
퀘노어 대공이 나를 가리켰다. 역시 어제 잠시 그런 대화를 나눈 것으로는 대공의 마음을 중립으로 돌려놓기에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나에게 아직도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거나.
“용사 파티와 함께 순찰 구역을 돌면서 그들의 기량과 마음가짐을 점검하도록 하지. 만일 그것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되었을 경우….”
대공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여왕 폐하께 서신을 보내, 이들의 파견 자체를 재고해달라고 하겠다.”
뭐, 나로서는 아무래도 좋았지만.
“받아들이겠나, 용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참으며 말이다.
북부 에피소드는, 내가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에피소드. 아르옌이 북부의 마물을 어떻게 사냥했는지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외울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빙의자 혜택을 볼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