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30화 (31/158)

Chapter 30 - 30. 에버노드 (4)

“성안을 제대로 둘러보기도 전에 성 밖 풍경부터 보게 생겼네.”

내 혼잣말에 말은 대답하듯 푸르륵, 투레질했다. 나는 말의 어깨를 쓸어주다가, 안장을 얹고서는 훌쩍 말 위로 올랐다. 나를 마지막으로 1번 순찰 구역의 순찰조는 준비를 마쳤다. 나, 게오르그, 다프네, 마리안느, 에버노드의 병사 둘과 퀘노어 대공. 용사 파티 멤버들이 장비를 점검하는 동안 북부 사람들은 마구간 밖에서 우리가 준비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성 밖으로는 우리가 여태 온 길과는 또 다른 세상일 거다. 그 위로부터가 북부의 본모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게오르그가 말했다. 그의 무장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나 거대한 라운드 쉴드였다. 희귀한 금속을 때려박은 작은 성벽과 같은 무장이다. 오른손으로는 그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모닝스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아마 네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마물들이 제법 많이 튀어나올 거다.”

“그렇겠지. 왕도 쪽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놈들이라 하면 흰늑대 무리, 트롤, 레이븐, 그리고 광록(狂鹿) 정도? 그 사슴 녀석은 보기 힘들 테니까, 제외한다 치더라도.”

내가 술술 이야기를 풀어내자, 게오르그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왠지 다프네가 마법을 각성했을 때나, 내가 성검을 잡고 1단계를 개방해 보였을 때보다도 훨씬 더 놀란 거 같은데. 나는 그 벙찐 표정을 보며 큭큭 웃음을 지었다.

“제일 위험한 ‘크롤러’는 그래도 경계해야겠지. 퀘노어 대공께서 함께하니 뭐가 온들 위험하겠냐 만은, 우리가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그런 숨겨진 위험 요소도 꼼꼼히 경계하는 게 맞겠지?”

게오르그의 입이 더욱 벌어졌다. 이제는 정말 할 말을 잃은 것 같다.

“아니… 일로이. 너 언제부터 그렇게 자세하게…. 내가 네게 그런 자세한 이야기까지 들려준 적은 없던 거로 기억하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가볍게 말의 옆구리를 찼다. 어찌나 놀랐는지, 게오르그의 시선이 움직이는 내 말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준비 정신이지.”

“…무슨.”

게오르그는 이제 황당한 웃음마저 지어 보이고 있었다.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으로 다프네가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복슬복슬한 털모자가 달린 겨울용 외투를 한 겹 껴입은 모습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마물들이 있네요.”

“독특한 놈들이 많아. 그만큼 상대할 때도 주의해야 할 놈들이 있어. 마리안느, 너에게도 잠시 알려줄 게 있으니 이리로 와 볼래?”

나는 두 사람에게 북부 마물들의 특성과 북부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사냥하는지, 우리가 이번 순찰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간단하게 설명했다. 두 사람 모두 질문이 적은 편이라, 내가 어떻게 이 정보를 얻었는지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다프네와 마리안느에게 정보를 알려준 후, 나는 홀로 마구간에 멍한 표정으로 있는 게오르그를 불렀다. 저 녀석은 북부 파견 경험이 있다고 했으니, 말 몇 마디면 잘 보조를 맞춰줄 거다. 게오르그는 투구를 벗겨버릴 기세로 고개를 세차게 내젓더니, 말을 몰고는 내 뒤로 따라붙었다. 퀘노어 대공은 게오르그가 나오자마자 지체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외성에서 검문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었다. 병사들은 대공이 오는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분주하게 이리저리 뛰어가며 성문을 열어줄 준비를 마쳤다. 대공과 함께 이번 1구역의 순찰을 맡은 기사가 메아리치는 목소리로 명했다.

“성문을 개방하라!”

한 시의 지체도 없이, 삐걱거리며 창살이 서서히 들어 올려지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리던 창살 너머로 쭉 이어지는 외길이 보였다. 우리는 앞장서는 대공을 따라 말을 몰아갔다.

외길은 광활하고 평평한 고원이 이어졌던 오는 길과 이어지듯 완만한 오르막과 연결되었다. 오르막은 오랜 세월 동안 눈보라와 비바람에 깎여 파이고 완만해진 산의 아래턱인 듯했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니, 산줄기가 높고 낮은 능선을 그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앞에 펼쳐진 이 모든 것은, 새카만 지붕을 드리우는 광활한 침엽수림에 덮여있었다. 다시 뒤를 돌아보니, 에버노드의 성채가 마치 이 풍경과 이 전의 풍경을 구분 짓는 경계처럼 느껴졌다.

“이건 장관이네.”

나는 여과 없는 감탄을 내뱉었다. 북부라고 하니 겨울에 온통 눈에 뒤덮인 모습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이 녹은 여름의 풍경을 보니 신선한 충격으로 와닿았다. 원작에서 아르옌이 북부에 왔을 때는 겨울이었으니까. 북부는 생각보다 푸르른 곳이구나. 나는 숨을 한껏 들이쉬며 더욱 진해진 북부 공기의 내음을 들이켰다.

“[이 풍경은 또 오랜만이군.]”

성검의 감상도 들려왔다. 성검도 이전에 북부에서 활약하던 때가 있었던 걸까.

“[내가 세상에 가보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느냐. 여름의 북부 또한 예외는 아니다.]”

여름의 북부라는 표현에 힘을 주어 말하는 것이, 성검도 이 풍경을 굉장히 인상 깊다고 여기는 듯했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북부의 전경을 감상하고 있자, 옆으로 퀘노어 대공이 다가왔다.

“사람들은 에버노드가 눈과 얼음으로만 이루어진 줄 알지.”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말에는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들 중 북부에서 온전히 1년을 보낸 이들이 몇이나 될까.”

자부심을 느낄 만했다. 나는 인정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동료들을 보니, 그들은 하나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거울을 본다면 지금 나도 비슷한 표정이 아닐까. 대공은 내가 잠시 풍광을 구경하도록 기다려주었다가 다시 출발했다.

“1번 순찰 구역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침엽수림이 시작되는 곳. 퀘노어 대공은 안쪽으로 이어지는 숲을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구역은 여기서부터 한계선이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곳까지. 한계선이 느껴지는 곳까지 가면 순찰 구역을 표시하고 그들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확인한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긴 했지만, 나는 얌전히 퀘노어 대공의 말을 들었다.

“그 외 이상 현상이 있는지 확인하고 지나가는 길의 마물은 철저하게 소탕한다.”

대공은 짧게 공지하고는 곧바로 숲을 향해 나아가려다, 우리의 대형을 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못마땅하다고 하기보다는 의아하다는 듯한, 그리고 ‘설마…’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이유 맞습니다.

“왜 방패를 든 중(重)전사가 대열의 가장 앞에 서고 용사, 자네와 창전사가 가장 뒤에 서는 거지? 마법사의 뒤쪽, 대열의 가장 후위에 서서 습격당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게 합리적이지 않나?”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른 지역을 순찰하는 것이었다면 그리했겠지만, 여기는 북부의 숲. 가장 기민한 이들을 뒤로 배치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나는 깊은 숲을 노려보았다. 하늘은 쨍하니 태양이 내리쬐고 있는데, 날은 쌀쌀하고 앞의 숲은 깊고 어두웠다. 숲을 멀리서 지켜볼 때는 그저 아름답기만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등을 서서히 타고 올라오는 섬뜩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크롤러’를 경계하는 겁니다. 그들은 잿빛곰만큼이나 강력하지만, 까마귀들보다 교활하고 달아나는 산토끼보다 빠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사냥감의 뒤를 소리 없이 따라오다가 기습합니다.”

나는 다프네를 향해 눈짓했다.

“기습에 취약한 편인 마법사를 지키려면, 기습에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이들을 둘 이상 후위에 배치하는 게 옳습니다. 구역 정찰은 구태여 전열에서 할 필요는 없고, 중전사라도 전방 주시 정도는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요.”

설마, 하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니 퀘노어 대공의 눈은 의심에서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금방 무표정으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상당히 잘 아는군.”

“용사가 되기 전의 모험가 생활을 결코 허투루 하지는 않았습니다.”

소설을 허투루 읽지는 않았다, 이 말이지.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는 대공의 반응을 즐겼다.

“순찰을 시작하지. 항상 주변을 경계할 수 있도록 하라.”

그리고, 우리는 빛과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숲속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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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퀘노어가 용사와 대화를 시작했을 때, 퀘노어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간 퀘노어가 정보를 수집하며 들어보았던 소문과는 상반되는 침착한 태도와 이지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계선을 언급했을 때는 꽤 놀랐다. 북방의 한계선은 제법 유명했지만, 그것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래도 용사니 이 정도 정보를 알고 있는 건 당연한가.’

하지만 놀라움은 잠시였다. 애초에 소문만을 듣고서 용사를 내심 과소평가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화 중에 일부러 심기를 조금씩 건드리는 말을 해보아도, 날카롭게 곤두선 병사들을 제지하지 않아도 용사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흘려보냈다.

퀘노어는 머릿속에서 용사에 관한 소문을 몇 개 지워냈다.

“기습에 취약한 편인 마법사를 지키려면, 기습에 재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이들을 둘 이상 후위에 배치하는 게 옳습니다. 구역 정찰은 구태여 전열에서 할 필요는 없고, 중전사라도 전방 주시 정도는 믿고 맡길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튿날, 이번에는 전장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시험하기 위해 순찰에 대동한 용사는, 마치 순찰을 몇 번이나 나와 본 사람처럼 준비했다. 평범하게 안정적인 대형으로 나아가려 했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텐데, 순찰의 유형과 위험 요소를 계산하며 철저히 배치한다. 그 와중에 드러나는 마물에 관한 풍부한 지식의 편린.

‘…그 정도로 얕잡아 볼 인물은 아닌 듯하군.’

퀘노어의 머릿속에서 용사에 관한 소문이 다시 몇 개 지워졌다. 더해, 용사의 평가가 상향 조정되었다.

하지만, 용사의 진면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용사, 저 마물을 알아보겠나?”

“흰늑대 무리군요. 게오르그도 몇 번인가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끌리면 점점 무리가 모여들 테니, 빠르게 나서 해치우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용사의 명령에 무표정에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던 은발의 여인이 창으로 흰늑대 무리를 쓸어버렸다. 그 창술은 퀘노어도 놀라게 할 만큼 빠르고 강력한 것이었다.

물론, 창술도 놀랍기는 했지만, 용사와 동료와의 연계, 유대가 제법 깊어 보였다는 게 가장 의외인 점이었다. 게오르그라는 중전사와 전략을 의논하는 모습, 마법사가 용사를 바라보는 방식, 창술사가 용사를 따르는 모습은 전 동료와의 갈등이 순전히 용사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었을까, 의심하게끔 했다.

말에서 잠시 내려, 주위를 살피던 중이었다. 용사는 부자연스럽게 쓰러진 나무를 바라보았다.

“근처에 트롤이 나타났나 봅니다. 땅이 난폭하게 파여있고, 멀쩡한 나무가 몇 그루 부러진 채 쓰러졌으니. 경계하면서 나아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확했다. 용사의 날카로운 눈빛은 그 자취를 쫓는 듯했다. 그리고, 용사가 경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트롤이 나타나 포효했다. 이것도 저 게오르그라는 기사에게서 전해 들은 정보일까?

“…트롤이 나타났군. 쓰러트릴 수 있겠나, 용사?”

“이전에 드린 말씀이 있어서 대답을 들려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다녀오도록 하지요.”

용사는 망설임 없이 성검을 뽑아 들고 신형을 날렸다. 창술사의 움직임과 창술만큼 유려하고 능숙하지는 않은 듯했으나, 충분히 효율적인 방법으로 쉽사리 트롤과 싸웠다.

팔을 크게 휘두르는 트롤의 사거리 속으로 파고들고, 상대적으로 빈약한 뒷다리의 관절부를 일검에 꿰뚫는다. 트롤이 휘청거리는 동안 반대쪽 다리로 도약한 용사가 트롤의 발목을 반쯤 잘라냈다. 상처 부위를 달리해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모습이었다.

용사는 그리고서 울부짖으며 발악하는 트롤의 등을 밟고 도약했다. 트롤의 껍질 사이로 성검의 검신이 깊게 박혔다.

“생각보다 훨씬….”

저게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단신으로 트롤을 저렇게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저건 기사의 강함이라기보다는, 직감과 경험을 기반으로 한 모험가의 강함에 가까웠다. 재앙을 쓰러트리고 세상을 구하기에 충분할지는 모르겠으나, 에버노드의 병사들의 마음을 동하게 하기는 충분했다.

“…도대체 그 많은 소문은 어디서, 왜 온 것일까요.”

퀘노어의 옆으로 다가온 기사가 중얼거렸다.

“…그러게나 말이다.”

서걱-!

검날이 피륙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트롤의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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