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31화 (32/158)

Chapter 31 - 31. 에버노드 (5)

트롤의 몸체는 금이 간 바위가 허물어지듯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트롤의 머리통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얼굴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내었다. 겨울이었으면 눈이라도 퍼다 문지르는 건데. 주변에는 온통 이끼밖에는 없었다.

“후우.”

“[전투에서 어떻게든 부드러움의 원리를 찾으려 하는 건 좋았다. 칭찬해주마.]”

노력했지만 말이지, 실질적인 진전이 있긴 했나?

“[당연히 아직은 부족하다. 그리고 네 발전 여부는 스스로 조금씩 알아가게 될 거다.]”

그래. 하루 이틀 만에 갑자기 기적적으로 기교가 발전할 수는 없겠지. 큰 깨달음이라도 얻지 않는 이상. 성검의 말대로 꾸준히 검을 붙잡고 연구하다 보면 성과가 나올 거다. 다만,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거인과의 전쟁 이전에 완성이 되어야 할 텐데…, 조금씩 마음이 초조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인 듯하다.

“[할 수 있을 거다, 일로이.]”

가끔 들려오는 성검의 위로는 희한할 정도로 마음에 안정을 찾아주었다. 고작 말 한마디일 뿐인데 말이지. 나는 그 사실에 신기해하며 성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쓰러트렸군.”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퀘노어 대공이 어느새 내 뒤에 서 있었다. 대공은 여태 본 적 없는 표정으로 트롤의 사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늘하고 새파란 퀘노어 대공의 눈을 보니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 실제로 그렇게 보였지. 그래도 조금은 고전할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이 무색하게 되어버렸군. 아주 능숙한 움직임이었어.”

대공은 그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서 흘긋, 그 시선을 내 왼쪽 허리춤에 달린 성검에게로 향했다.

“오러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성검 때문인가?”

“예. 하지만 불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공은 미간을 좁히며 한참을 나를 바라보았다. 재평가는 좋지만, 뻘쭘하게 서 있으면서 저 시선을 받아내려니 좀 부담스러운데.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트롤을 쓰러트리는 건 어지간한 기사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특히나 트롤을 상대해본 경험이 없거나 적은 이들이라면 말이지. 훌륭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원작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성검의 가르침까지 받았는데, 겨우 능숙하게 트롤을 쓰러트린 거로 칭찬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뇨. 아직 부족합니다.”

“너무 겸양을 떠는 것도 좋지는 않습니다, 용사님.”

은근슬쩍, 나와 퀘노어 대공의 대화에 에버노드의 기사가 끼어들었다. 겸양 같은 게 아니라 진심인데. 그나저나 이 사람들이 원래 이렇게 먼저 말을 붙이는 사람들이었나.

“대공께서는 칭찬에 인색하지 않지만, 빈말을 하시는 분은 절대 아닙니다.”

이거야 원, 기뻐하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하는 수준이었다. 뭐, 이 기사가 딱히 시비조로 말을 걸어온 것도 아니고 은근히 나를 인정하는 듯한 태도였기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됐다, 리스 경. 순찰 중에 잡담은 최대한 삼가라고 했을 터인데.”

“방금 전까지 대공께서도 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순찰대장으로서 순찰대원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을 뿐, 그걸 잡담이라고 하지는 않지.”

그리고, 사뭇 엄숙했던 두 사람의 태도 또한 바뀌었다. 아마 이 모습이 평소의 그들에 가까운 것이리라. 나는 격의 없이 부하의 농담을 받아주는 퀘노어 대공을 보며 쓰게 웃었다.

“일로이, 다친 곳은 없나요?”

다프네가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양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트롤과 싸우면서 애초에 스치지조차 않았다. 잿빛곰이랑 싸우던 시절의 나랑은 다르다고.

“전혀. 완전 멀쩡해.”

“방금은 용사께서 잘 상대하셨습니다. 다친 곳이 있었다면 오히려 놀랐을 겁니다.”

다프네는 기사, 리스가 말을 걸어오자, 흠칫 놀라며 내 쪽으로 조금 더 발걸음을 붙였다. 당장 잡아먹을 것처럼 굴던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하니, 심약한 다프네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싶다. 나는 놀란 토끼 눈이 되어버린 다프네의 보랏빛 눈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놀랐어?”

다프네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속삭였다.

“…조금은요.”

그래도 삭막했던 분위기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을 거다. 나는 다시 저들끼리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퀘노어 대공과 리스를 바라보았다.

“수고했다, 일로이.”

게오르그는 이제 정말 달라진 눈으로 날 보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의외성을 넘어서, 대견함과 약간의 신뢰가 깃든 듯한 눈빛. 빙의 첫날과 비교하면 정말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나는 피식 헛웃음을 내뱉고는 앞장서던 퀘노어 대공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트롤을 소탕한 우리는 다시 말을 타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트롤을 쓰러트릴 때까지만 해도 잘 느낄 수 없었는데, 계속 나아가다 보니 기온이 실시간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찰대가 ‘한계선’의 영향권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날씨가 갑자기 확 추워진 거 같아요.”

다프네가 옷을 더욱 여미며 말했다. 여미는 옷깃에 동그랗게 밀리는 다프네의 뺨이 찬바람에 데여 상기되어 있었다.

“슬슬 한계선의 근처에 다다르고 있다는 뜻이겠지. 이제부터는 마물도 많이 달려들 테니, 긴장하고 있어야 할 거야.”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숲속 깊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여럿 느껴졌다. 아니, 마물의 그것이니 살의라고 하는 게 맞으려나. 그때, 대형 옆에서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타고 있던 퀘노어 대공이 검을 뽑아 들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우리를 따라오던 두 기사도 검을 빼 들었다.

“용사, 자네의 말대로 우리는 지금 한계선의 영향권에 들었다. 또한 마물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사납게 우리를 배제하려 들 거다. 몇몇은 지성이 있는 마물의 수하일 수도 있지.”

퀘노어 대공의 검은 검집에서 뽑혔을 때 사납게 울음을 토해냈다. 마치 북풍을 그러모아 모루 위에 올려놓고 두드려 검의 형상으로 깎아낸 듯했다. 거기에 일반적인 검보다 반절은 더 컸다. 검신의 폭도 손바닥만 했으며, 서슬이 말 그대로 시퍼렇게 빛이 나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우리도 우리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

대공은 그리 말하며 내가 바라보던 깊은 숲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우웅.

불온하게 울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퀘노어 대공의 푸른 눈에 일렁이는 안광이 깃들고 있었다. 떨어진 거리에서도 대공의 심장이 고동치며 방대한 마나를 끌어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기사들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전의를 내비쳤다. 내 기척이 확연히 다가오는 마물들을 포착했을 때, 그들이 일제히 기수식을 취했다.

컹컹-!!

큰 개가 짖는 소리,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턱 아래로 침을 질질 흘리는 흰늑대 무리가 나타났다. 수는 열댓 마리 정도. 가장 빨리 다가오는 놈부터 처리하기 위해 성검을 겨눈 순간, 누군가의 검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퍽.

달려오던 흰늑대 여섯 마리가 분쇄기에 들어간 종이 마냥 갈기갈기 찢겨 허공에 피분수를 흩뿌렸다. 단 일검이었다. 나는 그 압도적인 검을 떨친 퀘노어 대공을 보며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어느새 대열의 가장 앞에 선 대공의 옆으로, 에버노드의 기사들이 따라붙는다.

“흩어지려 하는 놈들만 맡아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마.”

“명을 받들겠습니다.”

기사들은 새가 날개를 펼치듯, 마치 한 몸처럼 좌우로 흩어졌다. 그 일련의 과정을 줄곧 감탄하며 바라보던 내게 성검이 말을 걸어왔다.

“[눈에 잘 새겨두어라. 저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구나. 특히 저 대공이라는 사람.]”

대공은 쉬이 검을 휘둘러 쉬이 마물을 죽이고 있었다. 비장감도, 치열함도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지만 퀘노어 대공의 검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흰늑대들의 틈을 파고들며 베어냈다. 분명히 순찰 초입 구역의 흰늑대보다 훨씬 사납고 강할 텐데도, 대공이 일검을 휘두를 때마다 두엇씩 죽어 나가니 그 변화를 실감할 수조차 없었다.

“[이미 경지에 이르렀군. 온전한 실력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는 기세 자체는 가히 신화시대의 영웅들과 비견될 만하다.]”

성검이 이렇게까지 격찬하는 건 처음 본다. 뭐, 원작에서도 말도 안 되는 활약을 보이긴 했지. 성검의 보조 없이 대공의 반 정도만 할 수 있어도 좋겠는데.

“[네가 따라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일로이.]”

캥-!!

마지막 흰늑대가 단말마를 지르며 쓰러졌다. 저 늑대 떼를 정리하는 데 3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대공이 홀로 열 마리가 넘는 흰늑대를 쓰러트렸고, 기사들이 새어 나가려는 늑대를 두 마리씩 맡았다. 대공만큼은 아니지만, 기사들 또한 이런 싸움에 이골이 난 듯 어렵지 않게 늑대들을 쓰러트렸다.

“계속 나아가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군.”

퀘노어 대공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대공이 만들어 놓은 참상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마물 처리는 우리에게 다 맡기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에버노드의 자존심이 있지, 외부인들에게 일을 전부 맡길 수야 있겠나. 다른 이들이 본다면 북부도 다 죽었다면서 비웃을 테지.”

대공은 널브러진 늑대들의 사체를 보며 말했다. 대공의 옆으로 기사들이 다가왔다. 기사 리스는 작은 웃음을 띠고는 퀘노어 대공을 보았다.

“저는 또 용사님의 활약에 대공께서 자극받으신 줄 알았습니다. 저희는 용사님께서 이번 원정의 토벌을 전부 담당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요.”

“내가 쓸데없는 잡담은 나누지 말라 말했거늘.”

리스는 대공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대공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호숫가에 다다르면 한 번 자세히 둘러보도록 하지. 아마 슬슬 그곳에서도 제대로 보이는 위치에 있을지도 모르겠군.”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씩 다른 느낌을 띠기 시작했다. 숲에서 체계없이 사방에서 불어오던 듯한 바람이 확연한 방향성을 띠고 정면에서부터 불어온다. 침엽수들 또한 중구난방으로 선 미로에서 하나의 길로 인도하는 가로수가 되었다.

“여기가, 모든 순찰대의 종착점이 되는 ‘북부의 눈’이다.”

마지막 나무를 지나 보내자, 시야가 확 트였다. 그리고, 새파랗다는 말로는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푸른 거울이 그 트인 시야를 가득 채웠다. 호숫가는 해안과 같은 지형을 만들며 아득히 먼 곳까지 손을 뻗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냥 호수의 정광만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 너머. 호수가 손을 뻗은 곳 너머로 살과 뼈를 파고드는, 피를 얼려버릴 듯한 한기가, 스멀스멀 넘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기가 도사리는 곳의 하늘은 회색 눈구름에 가리었다.

“원래는 호수를 돌아 나아가거나, 배를 타고 호수의 반대편까지 둘러보러 갔는데, 한계선이 점점 가까워지는 지금은 그것도 불가하다.”

대공이 호수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얼음장만큼 차가웠다.

“저번에 왔을 때보다 뚜렷해졌군.”

“속도가 빨라지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다가오고 있다는 게 문제겠지요. 겨울이 오면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될 듯합니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 아르옌이 북부에 도달했을 때는 겨울, 이미 방어전이 한창이었을 때였다. 어느 시점에서 일로이가 재앙과의 전쟁을 시작했고, 어떻게 패퇴하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망할. 정말 필요할 때 내가 가진 정보가 쓸모없다니.

“한계선이 호수에 다다르면 이 호수가 얼어붙게 될 거다. 그때가 정말 우리가 전쟁에 대비해야 할 때라는 뜻이지.”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아마 모두가 머릿속에 다가오는 거인의 발걸음을 떠올리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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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은 모든 이들이 말을 삼갔다. 나는 구태여 입을 열지 않았다. 되려 애써 가벼운 기분을 내려 하는 것보다, 다가오는 재앙의 존재를 곱씹도록 내버려 두는 게 나을 거다. 나라고 또한 무거운 분위기가 마냥 반가운 건 않았지만, 누구도 현실에서 눈을 돌리려 하지 않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게 단순히 재앙의 흔적인가요.”

다프네가 입을 열었다. 추위에 상기되었던 뺨은 어느덧 하얗게 본래 색을 되찾았다.

“너무나 두려운 마력이 느껴졌어요. 모든 존재를 무색하게 만들어버릴 것 같이, 거대한 마력이. 아직 직접 대면하지도 못했는데, 저런 분위기를 띠다니….”

앞서가던 게오르그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오르그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크라켄과 싸우던 때가 생각나는군. 그때는 그만큼 바다가 두려운 존재가 될지 몰랐다.”

게오르그가 슬쩍 내게 시선을 돌렸다.

“일로이, 너는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기는, 자식아. 몸이 발바닥에서부터 얼어붙는 줄 알았는데. 지금이야 성검이 정신 차리라고 말해줘서 괜찮은 거지만. 나는 차마 그리 말로 내뱉어주지는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경계하는 데 신경을 쏟는 것일 뿐이야. 괜히 돌아가는 길에 집중 흐트러뜨렸다가는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리 말을 내뱉은 순간, 뒷머리가 쭈뼛 솟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놓치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크롤러’를 경계하는 겁니다. 그들은 잿빛곰만큼이나 강력하지만, 까마귀들보다 교활하고 달아나는 산토끼보다 빠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사냥감의 뒤를 소리 없이 따라오다가 기습합니다.’

스스로 내뱉었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산토끼보다 빠르고, 까마귀보다 교활한 놈들. 그들이 가장 기습하기 좋아할 때는 언제일까.

퀘노어 대공이 나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늦다.

아무리 퀘노어 대공이라도, 동시에 세 방향에서 덮쳐오는 ‘크롤러’들을 모두 상대할 수 없다. 그리고 크롤러들이 노리는 대상은, 우리 파티에서 가장 취약한 다프네.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낫처럼 생긴 놈들의 앞발이 튀어나온다. 그에 맞서 나는 성검을 아래에서부터 끌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성검의 1단계가 개방되며 유성의 광망과 같은 빛이 검신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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