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32화 (33/158)

Chapter 32 - 32. 에버노드 (6)

퀘노어는 숲에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퀘노어의 시야 속 세계가 흑백으로 물들며 느려지기 시작했다. 크롤러는 세 방향에서 동시에 달려들고 있었다. 당장 마나를 끌어올려 전방위로 오러를 난사하면 막을 수는 있겠지만, 그 여파에 순찰대원들이 휩쓸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둘 중 하나. 용사 파티를 향해 몸을 날리든가, 정면에서 덮쳐오는 크롤러들을 막아내든가.

‘뒤로 몸을 날리면, 나와 함께하는, 북부 기사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앞으로 몸을 날린다면, 뒤에 있는 용사 파티를 내버려 두는 꼴이 된다.’

찰나의 순간, 퀘노어의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경우의 수가 교차했다. 그리고 다시 찰나의 간격이 흘렀을 때, 퀘노어는 용사의 팔이 성검을 길게 늘어뜨리는 것을 포착한다. 퀘노어는 놀랄 시간도 없이, 그대로 검을 그러쥐고 앞에서부터 닥쳐오는 크롤러를 향해 휘둘렀다.

케에에에엑-!!

퀘노어의 검이 크롤러 한 마리의 몸통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리스가 간신히 닥쳐오는 크롤러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 충격으로 말에서 튕겨 나와 땅을 굴렀다. 퀘노어는 그대로 리스의 머리로 떨어져 내리는 크롤러를 날려버렸다.

“-주공-!”

“자세 잡아라, 리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퀘노어는 리스를 뒤로하고는 남은 크롤러들을 향해 말을 몰았다. 남은 건 세 마리. 퀘노어는 오러를 끌어올렸다. 달려오는 크롤러들은 오러와 그들 간의 간격을 재는 듯하며 쉽사리 달려들려 하지 않았다.

“네놈들이 오지 않겠다면, 내가 가는 수밖에.”

퀘노어의 검이 위에서부터 출발했다. 크롤러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며 퀘노어의 공격을 분산시키려 했다. 한 놈은 크게 옆으로, 한 놈은 크게 위로, 그리고 한놈은 바로 정면으로. 크롤러들은 순식간에 완벽한 호흡으로 산개한다. 그들이 홀로 사냥에 나설 때보다 함께 있을 때 훨씬 위험한 마물이 되는 이유였지만-

“미물(微物) 따위가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퀘노어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서걱.

퀘노어의 검은 단 한 번의 참격으로 세 번의 궤도를 만들어내었다. 하나는 크게 옆으로 뛰어가는 크롤러의 목으로, 하나는 옆에서 끌어당겨지며 위에 있는 크롤러의 몸통을 가르는 아치를 만들어냈고, 공중에서 틀어진 검로는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크롤러의 정수리를 쪼개버리는 검격이 되었다.

검격이 완성되자, 두 놈은 그 자리에서 베어지며 절명했지만, 한 놈은 팔 한쪽을 내주고는 간신히 살아남았다. 크롤러는 팔에서 피를 쏟아내며 물러나려는 듯 다리 근육을 수축하다가-

콰직.

그대로 퀘노어가 내지른 찌르기에 머리통을 꿰뚫렸다. 정면에서 달려들던 크롤러들은 바로 처치했다. 이놈들을 죽이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니, 용사 파티도 아직은 버텨낼 수 있을 거다. 그리 생각하며 퀘노어는 뒤로 말머리를 돌렸다.

“용사 파티는 잘 버티고 있느냐.”

퀘노어의 물음에, 리스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투의 소란이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손을 뻗었다. 퀘노어는 리스가 가리키는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놀라움에 그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도와줄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잘 버티는 정도가 아니었다. 용사 파티는 크롤러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중전사, 게오르그가 방패를 전면에 세우고 크롤러들의 시선을 끌며 공격을 막아냈다. 그 사이에, 마리안느라는 창전사는 유려한 기술로 빈틈을 노렸고, 마법사, 다프네는 다채로운 마법으로 피해가 축적된 크롤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그렇게 다섯 마리의 크롤러가 빠르게 하나씩 죽어갔다.

“…그것보다는.”

퀘노어는 고개를 들어, 용사 파티의 가장 앞선에 버티고 선 용사를 바라보았다. 용사는 퀘노어와 마찬가지로 크롤러 셋을 한꺼번에 상대하고 있었다.

키이이잉-!!

금속을 찢는 것만 같이 날카로운 파찰음. 용사가 자랑하는 성검은 퀘노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을 흩뿌리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용사는 성검을 우뚝 치켜들고, 달려드는 크롤러들을 향해 휘둘렀다. 크롤러들은 성검의 빛에 특히나 민감하게 반응하며 울부짖었다.

퀘노어는 멍하니 그 빛에 시선을 빼앗겼다. 환한 대낮이었지만, 성검의 빛은 주위의 그 무엇보다도 빛난다. 기사들의 오러와도 결을 달리하는 저 빛은 여름의 태양조차도 무색하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숭고하고 무결했다. 그리고, 그를 휘두르는 용사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올곧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저 빛이다.

어둠을 몰아내듯, 밤의 끝자락에 찾아오는 여명이 땅거미의 장막을 걷어내듯, 대열의 가장 앞에 가장 빛나는 저 모습을 바라보는 이들의 머릿속에서 ‘한계선’이 드리우던 두려움이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퀘노어는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깨달았다.

어쩌면, 저 빛을 거머쥔 용사라면, 한계선을 넘어 ‘거인’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을 수 있겠다고.

==

“[더욱 기감을 날카롭게 가다듬어라.]”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 마나를 한층 더 세차게 돌리고는 이를 악물었다. 1단계가 개방된 성검이 쏟아붓는 마나와 터질 듯 두방망이질을 하는 심장이 퍼내는 마나가 혈관을 혹사하다시피 하며 몸을 움직인다.

“[나의 빛이 저 마물들을 두렵게 해 정신을 흐트러뜨릴 거다. 일로이, 네 몸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그대로 동화되어 움직여라.]”

크롤러는 사마귀와 메뚜기를 합쳐놓은 듯한 생김새의 마물이었다. 저 뒷다리로 뛰어다니는 것도 거슬리는데, 휘두르는 낫 같은 앞발은 빠르고 날카롭다.

“[자, 어서.]”

시야가 흔들린다. 주위에 흐르는 시간이 느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심장에서부터 시작해 내 손가락의 끝까지 찌릿하게 퍼지는 마나의 기운을 따라 성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콰지직.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크롤러의 몸뚱아리가 터져 나갔다. 일검의 동작이 지나치게 컸다. 내 옆에서 남은 한 마리가, 그리고 다시 뒤에서 한 마리가 달려온다. 차라리 저 한 놈을 미끼로 내주고 나머지 둘이서 나를 잡으려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돌아보면 늦다.

나는 앞으로 검을 휘두르는 반탄력을 살려 그대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검로는 멈추지 말아야 한다. 성검이 북부의 흙을 잘라내며 일검을 이어갔다. 빙글, 공중에서 한 바퀴를 그대로 회전한 나는 크롤러들이 내 검격을 피해내며 다시 돌진하는 것을 보았다.

“[받아쳐라.]”

성검의 조언은 간단했고, 나는 충실히 그 조언에 따랐다. 등을 나무에 붙이니, 크롤러들이 달려들 각도가 제한되었다. 한 놈이 앞발을 크게 휘둘렀다. 나는 고개를 슬쩍 틀어 공격을 흘려보낸 후 나머지 한 마리를 향해 내게 달려든 놈을 걷어찼다.

키에엑-!!

크롤러는 날아드는 제 동료의 몸통을 피한 뒤 다시금 내게 앞발을 휘둘렀다. 교묘하게, 내가 아직 검격을 날릴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를 노린 일격. 나는 검면을 들어 크롤러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리고, 성검의 빛이 크롤러의 앞발을 말 그대로 태워버렸다.

키이이이익-!

뜻밖의 고통에 크롤러가 몸부림쳤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놈을 떨쳐낸 후에 성검을 고쳐 쥐었다.

텅-!

두 마물이 부딪히며 흐트러진 순간, 나는 본능에 따라 높이 치켜든 성검의 검날을 떨어트렸다. 개방된 성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기(瑞氣)가 벼락처럼 두 마리 크롤러들을 노렸다.

쾅-!!!

개방된 성검의 검격은 크롤러들을 조각내다 못해 반쯤 소멸시켜버렸고,

쩍-!!

그 여파는 그들 위의 거대한 전나무까지 세로로 쪼개버렸다. 후드득거리며 쏟아지는 전나무의 잔가지와 잎들이 크롤러들의 사체를 덮어버렸다.

“됐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성검을 본모습으로 되돌렸다. 이제 1단계를 발동하고 치르는 전투 정도는 그리 힘겹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퀘노어 대공을 포함한 순찰대원들과 우리 파티가 나를 마치 영화라도 관람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괜시리 부담되는 눈빛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파티도 내가 성검을 개방하고 싸우는 걸 보는 게 처음이던가.

“…늦게 정리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괜히 널브러진 크롤러들의 사체를 발로 툭툭 걷어차며 내 말에게로 돌아갔다. 녀석은 내가 돌아오자, 투레질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나는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다시 말 위로 올랐다. 하지만 순찰대는 출발할 생각도 없이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출발하시죠. 여기 계속 머무르다가는 또 언제 습격당할지 모르니까요.”

보다 못한 나는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며 채근했다. 내가 먼저 말머리를 돌리자, 갑작스레 내가 이들을 모두 이끄는 형세가 되어버렸다. 나는 다시 퀘노어 대공이 선두에 설 수 있도록 말의 속도를 늦추었다. 내 옆으로 퀘노어 대공이 다가왔다. 그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안에서 말을 골라내고 있는 듯했다.

“그게 자네와 성검의 힘인가.”

어렵사리 던져진 질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퀘노어 대공은 너털웃음을 뱉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용사가 괜히 용사는 아니겠지. 내가 그간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 계속 북부에 틀어박혀 있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좁아진 걸지도 모르겠군.”

“대공만큼 훌륭하게 마물을 쓰러트리지도 못했습니다만.”

“단순히 힘을 지니는 것과 특별함을 지니는 건 다르네, 용사. 오산이지만, 기쁜 오산이로군.”

대공은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앞으로 용사 파티를 정기 순찰 조에 포함할 수 있도록 하지. 자네가 오늘 한 대로만 한다면, 에버노드의 병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자네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될 테니.”

머쓱한 기분이었다. 뭐, 적대적이지만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열렬한 지지자가 될 것까지야 없는데.

“앞으로 바빠지겠군요.”

“도우러 온 자원들은 확실하게 써먹어야 하지 않겠나.”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왕궁에 제 파견을 재고해달라 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퀘노어 대공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어디까지나 그대들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그리하겠다고 했지. 내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면 사과하도록 하겠다. 실언이었군.”

대공이 놀리듯 말하자, 나는 표정을 찡그렸다.

“…저도 그리 옹졸한 사람은 아닙니다. 병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함인 것은 물론 알고 있으니까요. 악역을 자처하신 거 아닙니까.”

“악역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위악(僞惡)도 아니었어. 병사들을 빌미로 그대들에게 심술을 부린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유치하다고 보아야겠지.”

자조하며 말을 내뱉는 대공. 나는 그를 바라보며 짐짓 비장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에버노드에 함께 싸우러 온 이상, 그 자격을 증명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 말에, 퀘노어 대공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다가, 이내 그 파란 눈과 어울리는 사나운 미소로 표정을 바꿔 보이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자네는 방금 그 자격을 충분히 우리에게 보인 것 같군.”

나는 퀘노어 대공이 내민 손을 잡았다. 아주 억세고, 강한. 오래된 나무의 뿌리와 같은 강건함이 대공의 손아귀에서 느껴졌다. 나는 그게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에 뿌리 내린 자들의 굳건함이라 생각했다.

“에버노드에 온 걸 환영한다, 용사 일로이.”

뭐, 북부에 머무르기 위한 첫 번째 과제는 통과한 셈인가. 나는 마주 미소를 지으며 대공과 악수했다. 등 뒤에서 뭔가 부럽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게오르그는 애써 무시했다.

==

그렇게 첫 번째 순찰이 끝난 날의 밤.

밤이라고 하기도 뭣한 오후의 햇살이 암막 사이로 조금씩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퀘노어 대공에게 수련을 위한 조용한 장소를 요청했고, 대공은 기꺼이 별채 바깥의 창고를 깨끗이 정돈한 후, 빌려주었다.

그리고 그 정돈된 창고 안에 선 내 표정은, 아마 빙의한 이래 가장 구겨진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내게 성검이 엄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일로이.]”

저 말, 어디서 많이 들었는데.

“나도 알고 있어.”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에는, 엄숙한 분위기의 목함이 하나 덜렁 들려 있었다. 나는 목함을 내려다보며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이내 짧게 숨을 내뱉으며 뚜껑을 열었다.

“…좋아.”

목함 속에는, 융단 위에 다소곳이 놓인 가시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