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 - 33. 스트로프 가문 (1)
나는 창고의 구석에 정리되어 있던 밧줄을 가져와 스스로 몸을 묶었다. 줄을 다루는 손이 서툴러 단단하게 묶이지는 않았지만, 어찌어찌 바닥에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는 묶을 수 있었다. 나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보며 줄이 풀리지 않을지 시험을 해보았다. 내가 그런 이상한 짓을 끝마치자, 성검이 머뭇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너, 꼴이 지금 굉장히….]”
“그래, 좀 웃기지? 나도 알아.”
나는 그리 말하며 매듭을 더 조였다. 됐다. 이러면 갑자기 픽 쓰러지더라도 바닥에 머리를 박아버리지는 않을 거다. 만약, 면류관의 시험을 받는 동안 또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잃게 된다면, 지난번처럼 운 좋게 면류관이 머리에서 벗겨지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만에 하나 가시 면류관을 쓴 채로 바닥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머리 가죽이 갈기갈기 찢어져 버릴 거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됐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뭐야, 말을 할 거면 제대로 말해줘.”
“[아무것도 아니다! 빨리 머리에 면류관이나 쓰거라.]”
성검은 다시 머뭇거리며 말을 하다가, 이내 포기했다는 듯 머릿속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목함을 끌어왔다. 그 속에서 조용히 도사리는 가시 면류관은 언제 보아도 끔찍한 비주얼을 가지고 있었다.
“강력하다는 건 잘 알겠는데 말이지.”
나를 대번에 기절시킬 정도의 성유물이다. 그렇게 강력한 마나를 지닌 아티팩트는 이 세상에 몇 없으리라 생각한다. 문제는, 도대체 이 면류관의 용도는 무엇이며 그 시련을 통과했을 때 어떤 힘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네 마음에 달려있다, 일로이. 하지만 내가 이 면류관이 뭘 하는 물건인지는 가르쳐줄 수는 없겠구나.]”
뭐, 그렇게 쉽사리 알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가진 힘이라고는 이 세상에 떨어지기 전 읽은 몇 줄짜리 줄글이 주는 정보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가시가 나지 않는 부분을 짚으며 목함에서 면류관을 집어 올렸다. 미세한 마력이 면류관에서 내 손끝을 타고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의식을 잃을 거 같거든 나를 불러줘. 어떻게든 버텨볼게.”
“[알았다. 건투를 비마.]”
나는 괜히 더 주저하지 않고 면류관을 머리로 가져갔다. 내 머리카락 위로 가시 면류관이 얹혔다. 이번에는 대체 어떤 시련을 주려는 건지. 나는 괜히 긴장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까지는….”
역시 입이 화근이다. 내가 말한 순간 다시 면류관의 마력이 내 머릿속을 타고 들어왔다. 자, 그래. 이번에는 도대체 내게 무슨 시련을 주려는 거냐. 일단 몸이 아프지는 않은 것을 보아하니, 딱히 육체적 고통을 주려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때, 시야가 갑자기 새카맣게 물들었다. 눈은 분명히 뜨고 있는데? 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좌우로 휘저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간 해가 늘상 떠있는 모습에 눈이 적응이 된 것일까, 어둠이 익숙하지 않았다.
“[일로이? 일단 의식을 잃은 건 아닌 것 같군.]”
성검의 목소리가 아직 들렸다. 뭐라 입을 벌려서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아주 멀리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아직 괜찮은 거….]”
성검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내 의식이 흐려지는 건가 싶어 머리를 휙휙 내저었다. 의식이 흐려지는 건 아니었다. 아직 공간을 느끼는 기감이 깨어있어 알 수 있었다. 다시 바람이 강하게 불어오는 가운데, 나는 어느 순간 벌판에 홀로 서 있었다.
“…이게 뭐냐.”
발목이 축축하고 싸늘하게 잠긴 감각. 벌판은 눈밭이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위로 올렸다. 감각 속 세상은 하늘과 땅을 둘로 갈라 검고 하얗게 물들인 듯했다. 면류관이 지금 내게 이런 풍경을 보여주는 건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머릿속으로 성검을 찾고는, 습관처럼 허리춤을 더듬었다. 하지만 늘 들려오던 대답은 지금 들려오지 않았다.
“혼자 극복하라. 뭐 그런 거겠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성검은 매달려 있지 않았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눈 내린 벌판을 둘러보았다. 완전히 새하얗게 덮여 있어 눈치채지 못했는데, 지금 여기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지형을 하고 있었다.
“가만, 이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불과 며칠 전에 이곳을 지나가지 않았던가. 에버노드로 향하는 길에 떡하니 펼쳐져 있던 드넓은 들판. 짧은 풀로 푸르게 도배되어 있던 땅이 새하얗게 물드니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데.”
나는 미간을 좁히며 양손의 주먹을 쥐었다가 펴 보았다. 내 몸은 그대로,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평소라면 심장 속에서 심장과 함께 두근거리고 있어야 할 마나의 맥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쉽게 입맛을 다신 후, 다리를 움직이려 해보았다.
“좋아.”
발이 쌓인 눈을 파고드는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한 게 거슬리긴 했지만, 뒤를 돌아보니, 눈으로 뒤덮여 새카만 전나무 숲이 있었다. 흐르던 개울은 완전히 얼어붙어 버린 듯하다. 에버노드로 가야만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에버노드로 향하는 길을 머릿속에서 다시 그려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눈길 위에 내 발자국만이 남았다.
…거기로 가는 길이 이렇게나 멀었나.
나를 태우고 갈 말도, 내 몸을 가볍게 해줄 마나도 없으니 눈을 헤치는 걸음걸음이 번거로웠다. 하늘에서도 서서히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보아도 하늘이라 부를 만한 건 없고 새카만 어둠뿐이었지만.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에버노드가 나오지 않아, 나올 때까지 걸어야 하는 게 이번 시련인가 싶었을 때, 언덕 쪽으로 희멀겋게 에버노드의 성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
하지만, 나는 곧장 기쁜 발걸음으로 성채로 향할 수 없었다. 불길함. 모종의 확신과도 같은 불길함이 내 신경을 쿡쿡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뭔가 있다. 당장 발걸음을 돌려 무시하고 걸어가라. 본능이 그리 속삭였다. 에버노드의 성문을 넘어서면 분명 면류관이 준비해놓은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좆까.”
본능대로만 행동하면 그게 짐승 새끼지, 사람이냐.
나는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성채에 가까워지는 만큼 한기도 강해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성채의 문은 열려있었다.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에버노드의 곳곳을 기웃거리며 무언가가 있을지 찾아보았지만, 텅 빈 건물과 눈 쌓인 거리만이 있을 뿐, 시련이라 부를 만한 무언가는 없었다.
그럼, 도대체 이 거슬리는 감각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나는 북쪽 외성의 밖, 순찰대가 순찰을 나가는 에버노드 북방의 숲이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시련을 끝내기 위해서는 저기로 가야 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동시에, 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해 놓았는지….”
나는 휑하니 열려있는 외성의 출입구를 바라보며 긴장된 숨을 내쉬었다. 입에서 입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리는 눈은 함박눈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폭력적인 기세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콧잔등에 눈송이가 얹혀 쌓인다. 나는 몸에 쌓이는 눈을 내버려 두고는 홀린 듯 외성의 출입구로 걸어갔다.
“….”
조용하다. 귀에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쏟아지는 눈은 눈보라가 되어 땅을 휩쓸고, 나무는 몸을 떨어 잔가지를 떨어트리는데 내가 들을 수 있는 건 나의 숨소리뿐이었다. 나는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점점 거칠어지는 내 숨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뭔가 오고 있다.
시야가 떨렸다. 숲의 너머,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허리춤을 뒤지고 마나를 끌어올리려고 했으나, 지금의 나는 한없이 무력한 인간 하나에 불과했다. 다리는 나아가는 것을 멈추었다. 나는 땅이 거대한 북처럼 울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쿵. 쿵.
그것의 몸짓에 거대한 나무는 성냥개비처럼 부러졌고, 산은 모래 언덕처럼 뭉개졌다.
쿵. 쿵.
발치? 내가 무엇을 보았지? 뭐가 움직이고 있는 거지?
세상이 무너진다. 하지만 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새하얀 소멸의 장막은 지평선마저 먹어 치우고서는 에버노드로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성채와 그것 사이에 서서 기다렸다. 너무나 압도적인 공포가 나를 마비시켜버렸다.
쿵.
북소리가 멈추었다. 눈앞의 숲이 뭉그러졌다. 나는 저 숲을 모조리 뭉개버린 게 누군가의 발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무를 뿌리 뽑을 법한 바람이 내 살을 깎아내린다. 나는 온몸이 바람에 찢어발겨지는 고통 속에서 고개를 들었고, ‘그것’ 역시 나를 내려다보고는, 천천히 발을 들어 올렸다.
쿵.
.
.
.
“[…일로이.]”
몸이 바르르 떨렸다. 머리가 푹 꺾인 채로 시계추처럼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껌벅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면류관의 마력이 네게 꿈과 같은 무언가를 보여주더구나. 아마 그게 이번에 면류관이 네게 내린 시련이겠지. 내가 관여하려면 할 수 있었겠지만, 그랬더라면 저 성유물이 내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져 버렸을 거다.]”
머리에 쓰고 있던 가시 면류관은 내 고개가 꺾인 사이 바닥에 떨어진 듯했다. 나는 면류관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는 목함을 열어 얹어두었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구나.]”
“아냐. 어차피 내 힘으로 극복했어야 하는 건데.”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목함의 뚜껑을 닫았다.
“면류관이 내게 무엇을 보여주는지, 봤어?”
“[아니. 내가 너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시련의 의미가 무색해질 수 있으니,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너는 이번에 무엇을 보았느냐?]”
나는 성검의 질문을 듣고는 목함을 문질렀다.
“거인.”
“[…그렇군.]”
“마력도, 성검도 없으니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냥 그게 나를 짓밟기만을 기다릴 뿐이었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 몸통을 묶고 있는 밧줄을 끊었다.
“[어땠느냐.]”
“…아무것도 없이 일곱 재앙을 마주하는 이들의 기분은 그렇겠구나, 싶더라.”
나는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을 꿇은 채로 얼마나 오래 기둥에 묶여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리가 미친 듯이 저려 왔다.
“면류관은 내 의지를 시험하는 건가?”
“[모든 성유물이 그렇지. 그들은 결코 누군가의 물리적 강함으로 주인을 정하지 않아.]”
“…너는,”
아니. 나는 성검에게 질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성검 역시 내가 하다 만 말에 대해 묻지 않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암막을 걷고는 창 바깥을 바라보았다. 쨍하니 비쳐 들어오는 햇살 사이로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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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에 한 번 나서는 순찰 업무도 슬슬 몸에 익고 있었다. 아무리 퀘노어 대공이 당부했다고는 했지만, 북부의 기사와 병사들은 나와 함께 순찰을 나서기 전까지는 의심의 눈초리로 일관했다. 뭐, 그 말인즉 나와 순찰을 다녀오고 나서는 모두 그 태도를 바꾸었다는 말이 되기도 했지만.
“지난 순찰 때는 알지 못했는데, 다프네 양은 굉장한 마법사더군요.”
이번 순찰에서는 다프네의 활약이 주효했다. 이 세계 유일의 8서클이 될 마법사답게, 그녀의 마법은 매 순찰에 나설 때마다 달라지고, 진일보했다. 이번에 그녀는 순찰대원 전원에게 나에게 걸었던 것과 같은 방호마법을 걸어주었다. 덕분에 순찰대원들은 마물과의 전투에서 작은 부상조차 입지 않을 수 있었다.
“5서클의 마법사지. 충분히 굉장하다니까.”
게오르그가 자랑스럽게 말했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다프네의 방호마법은 당연히 전면에 나서는 중전사인 게오르그에게 굉장한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뭐,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다프네는 순찰대원들의 칭찬 세례에 부끄러워하며 습관적으로 내게로 슬쩍 다가왔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순찰대원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마구간에 말을 보관한 나는, 성채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소란스러운 것을 알아차렸다. 그게 부정적인 의미의 소란이라기보다는 손님을 맞이하기 전의 소란과 비슷한 분주함이라는 게 조금 의문이었다. 순찰대원들을 돌아보니, 그들은 ‘아, 오늘이 그날이었지.’라고 기억을 떠올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오늘?”
내 말에, 병사 하나가 씨익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은 ‘철혈공주’께서 에버노드로 돌아오시는 날이니까요.”
‘철혈공주’? 나는 처음 들어보는 별칭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설에서도 그런 인물은 등장한 적이 없는데, 북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내 의문스럽다는 듯한 표정에, 기사 하나가 병사의 그것과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철혈공주라. 별칭만 들었을 때는 고강한 여기사의 별칭 같은데, 그런 특징적인 인물이 에버노드에 있었더라면 원작에 등장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텐데.
“아, 저기 대공께서 계시는군요. 어서 가봅시다.”
뭔가 재촉하는 듯한 말투. 나는 미간을 좁히며 북부에 대해 잘 아는 게오르그를 보았지만, 게오르그 또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뭐야, 너도 들어본 적 없어?”
“모르겠다. 적어도 10년 전에는 들어본 적 없어.”
뭐, 직접 보면 알겠지.
퀘노어 대공의 앞에 마차 하나가 섰다. 대공은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를 끌고 마차의 앞에 함께 섰다. 우리 영문도 모른 채 퀘노어 대공의 손에 줄줄이 이끌려 정렬했다. 퀘노어 대공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을 새도 없이, 마차의 문이 열리며, 한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 내렸다.
“여보.”
퀘노어 대공은 눈에서 꿀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제 아내와 포옹했다. 대공 부인의 뒤를 따라, 또 두 사람이 마차에서 내렸다.
“아버지.”
퀘노어 대공을 빼다 박아놓은, 키가 큰 청년 하나. 원작에서 들어본 적 있는 퀘노어 대공의 장남이다.
“저기, 철혈공주께서 내리십니다.”
기사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속삭였다. 그리고 청년을 따라 웬 근엄한 표정의, 아홉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하나 내렸다.
“…철혈공주?”
그리고 내가 의문스러운 표정과 함께 고개를 돌리자, 기사와 병사들은 합창이라도 하듯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