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5 - 35. 스트로프 가문 (3)
오러를 발동해놓고 내가 다 놀라 철검의 검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와 루크의 경합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그리 놀란 거 같지는 않았다. 조금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이들은 있었어도, 내 속마음처럼 깜짝 놀란 사람은 없었다. 용사가 성검이 아닌 검을 잡으면 오러를 사용하는 게 당연하다고들 생각하는 걸까.
“….”
정작 오러를 뽑아낸 나는 어떤 요령으로 이놈을 다뤄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성검을 쥐고 마물을 도륙내던 때처럼 싸우자니, 주변이 초토화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아예 힘을 빼고 싸우자니 오러를 통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용사님의 오러는 그런 색이었군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맞은편에서 루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솔직히, 이쯤 싸웠으면 저놈도 뭔가 깨닫는 바가 있지 않을까?
“용사님의 오러를 경험해본다면, 조금 더 용사님의 진의를 잘 알 수 있겠지요.”
아니, 깨닫는 바가 없었다. 고지식한 새끼. 나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다잡았다. 그냥 이번 기회에, 나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검을 어떻게 다루는지나 경험해봐야겠다.
“가겠습니다.”
눈을 빛내던 루크가 땅을 박차고 내게 달려들었다. 루크의 푸른 오러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피하지 않고, 흘려보내지도 않는다. 나는 루크가 휘두르는 궤적의 정반대로 검을 휘둘렀다. 우선은, 정면으로 부딪쳐보는 거다.
쾅-!!!
도저히 검과 검이 충돌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폭음이 울려 퍼지고, 충격파가 연병장 전체에 퍼져나갔다. 행여 아무것도 모르는 카린이 다칠까 봐 그쪽을 흘긋 돌아보았지만, 그녀의 옆에는 퀘노어 대공이 든든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강하군요, 용사님.”
그리고 한편, 나와 루크의 오러는 거의 비등한 힘을 지닌 듯했다. 충돌의 중심지 옆으로 짐승이 긁고 지나간 듯한 검흔이 마구 새겨져 있었다.
“이번 결투가 끝나면, 제가 이기든 지든 용사님을 결국 인정할 것 같습니다.”
나는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너만 인정하면 이제 에버노드에서 나를 괜히 괴롭힐 사람은 더 없겠지.
“…하지만 어찌 되었든 시작한 결투. 끝은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크는 그리 말하며 검을 치켜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신에 도사리는 힘의 격류. 머릿속에 문득 유(柔)에 대해 말하던 성검의 말이 떠올랐다.
‘[결국, 강(强)을 제압하는 건 유(柔)다.]’
뭔가, 미묘하게 잡힐 것 같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느낌이었다. 특히나 손아귀에 오러 블레이드를 들고 있는 지금이 그랬다. 이 힘을 다룰 방법이 아른거리고 있다. 하지만 또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안개처럼 흐릿한 추상에 그치고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그 작은 실마리면 충분했다.
일렁이던 은빛 오러는 내 의지와 함께 검신에 정착했다. 나는 거대한 물길을 끌어오듯 검을 옮겨 공세에 돌입했다. 루크는 굴하지 않고 그 검에 정면으로 자신의 오러를 던져왔다. 검신과 검신이 격돌한다. 정석적으로 내 검에 대응하는 루크의 공격은 굉장히 정돈되고 안정적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나, 그러니까, 일로이의 검은 그런 정석적인 검이 상대하기에는 상성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한동안 치열한 공방이 오갔지만, 전세는 점점 내게로 기울고 있었다.
콰광-!!
나는 본능적으로 다음 일격이 승부의 향방을 가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검과 루크의 검이 교차되어 서로 지나치며 위치를 바꾸었고-
파사삭.
내 철검에 금이 가며 검날의 일부가 바스러져 버렸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그 결과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어, 그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크 공자님께서 이긴 건가?”
“용사님을, 이겼다고?”
음. 그건 딱히 아닌 거 같은데.
나는 반쯤 부서진 검에서 오러를 거두고는 검을 내려놓았다. 뒤로 돌아보자, 루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챙.
짧은 금속음과 함께 루크의 검에서 오러가 사그라들며 그 검신이 정확히 반으로 동강 나 떨어지며 바닥에 검끝을 박았다. 루크의 승리를 예측하던 이들의 웅성거림이 사그라들고, 놀라움의 정적으로 바뀌었다. 루크는 그렇게 제 부러진 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팔을 떨어트렸다.
“…대단하군요.”
홀가분한 목소리로, 루크가 말했다. 심판은 가만히 지켜보다 내 승리를 선언했고, 나와 루크가 악수를 나누자 기사들과 병사들의 환성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도, 그들은 내게 달려오는 게 아니라 루크에게 모조리 달려가 위로 아닌 위로를 전달했다.
“완전히 발렸네요, 부단장님! 근데 재미는 있었습니다.”
“설마 그런 거 가지고 삐지는 건 아니죠?”
“그러게, 도대체 왜 대련을 신청해서.”
…아니, 이 미친놈들은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는 게 아니라 그냥 놀리기 시작했다. 처음 내 머릿속에 있던 에버노드의 근엄한 이미지는 오간 데 없고 그냥 남 놀리기 좋아하는 악질들만이 남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다 꺼져, 혼자 있고 싶으니까.”
“웁니까? 울러 가는 겁니까?”
“솔직히 쪽팔리면 쪽팔린다고 말하십쇼. 보는 우리도 솔직히 쪽팔렸습니다.”
그 시끄러운 소란을 뚫고, 퀘노어 대공이 루크의 앞에 나타났다. 결투에서 져버린 아들을 질책하는 눈은 아니었다.
“졌습니다, 아버지.”
“수고했다. 왕도에서 허투루 시간을 보낸 건 아닌 것 같더구나.”
“그래도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퀘노어 대공이 내쪽으로 시선을 흘긋 돌렸다. 뭐요.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대공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발해서 언젠가는 용사를 이길 수 있도록 해라. 한 번 진 상대라고 해서 영원히 그 상대에게 지라는 법도 없으니.”
저 아저씨, 분명 뭔가 다른 말을 하려고 한 거 같은데, 나를 보고는 말을 바꿔버린 거 같다. 그 옆에서 철혈공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 오빠의 다리를 위로하듯 툭툭 쳤다.
“오라버니, 힘내요.”
“…고맙다, 카린.”
내 옆으로 파티원들이 다가왔다. 다프네가 성검을 건네주었다. 원래라면 이것저것 물어봤어야 할 거 같은데, 성검은 말이 없었다. 아직 삐져있나.
“[삐지긴 누가 삐졌다는 게냐. 다만, 네가 검을 수련할 때 나만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다른 검을 휘둘러보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성검이 가시 돋친 목소리로 말했다.
“[오러를 사용하며 잠시 대련하는 동안 무언가 보이지 않았더냐.]”
그렇지. 물론 어슴푸레하게 끄트머리를 보았을 뿐이지만, 성검이 말한 ‘힘’을 다룬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아닌 평범한 검으로 가끔 수련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 그래. 나중에 손질이나 잘 해줄게.
내가 놀리듯 마음속으로 말하자, 성검은 말을 뚝 끊어버렸다. 조금 미안하네. 나도 에버노드에 머무르면서 여기 기사들에게 악질 기운이 전염되었나 보다.
자박 자박.
그때, 내 옆으로 소심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프네의 그것과 어딘가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작고, 더 망설이는 발걸음. 고개를 돌리니, 꼬마 카린이 어느새 옆에 와 있었다. 그 뒤에서 루크와 퀘노어 대공이 나란히 서서 카린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심부름 나서는 애 지켜보는 것도 아니고, 당신들 뭐야.
“용사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어휘가 풍부하지는 않지만, 격식이 갖춰진 존댓말. 너무 격을 갖추는 게 아닌가 싶긴 한데, 별명이 별명이니 그러려니 생각했다.
“고마워요, 철혈공…아니, 카린.”
진짜, 에버노드 이 악질놈들. 그리고 카린, 이 아가씨는 대체 어떻게 그리 찰떡같은 별명을 생각해냈는지 모르겠다. 내가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린은 눈을 똘망똘망하게 빛내며 한 글자 한 글자 똑바로, 내게 제안을 건네었다.
“이번에 열리는 하지 축제에, 용사님 일행을 제가 안내해드리고 싶어요.”
하지 축제? 처음 들어보는 말에, 내가 퀘노어 대공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에버노드에서는 하지를 전후로 3일 동안 축제가 열리네. 바로 이번 주 주말이지. 재앙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전초전도 시작하지 않았어. 잠시 사람들이 즐길 시간은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네.”
대공은 내게로 다가오며 카린의 머리를 대견하다는 듯 쓰다듬었다.
“축제 동안은 순찰대를 제외한 에버노드의 모든 사람이 잠시 일을 내려놓고 막 찾아온 여름을 만끽하지. 밤이 없는 나날이 그리 달가운 건 아니지만, 추위보다야 훨씬 반가운 손님이거든.”
영지가 평소보다 시끌벅적한 게 단순히 대공의 가족이 돌아와서만은 아니었나. 나는 가만히 연병장 밖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보았다. 분주한 소란과 활기는 평소의 기계적인 활기와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들뜬, 분명한 즐거움에서 오는 활기.
“자네들도 그동안은 잠시나마 임무를 잊고 하지 축제를 즐겼으면 하네. 아직 내가 영지 구경도 제대로 시켜주지 못했지 않나.”
여름의 햇살이 쨍하게 내리쬐었다. 퀘노어 대공은 눈이 부신 듯 슬쩍 찡그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도 마주 입꼬리를 올려주기는 했으나, 마냥 즐거운 의미의 미소를 지어주지는 못했다. 이번 여름의 첫 훈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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샥, 샥.
나는 깨끗한 헝겊으로 먼저 성검의 검자루를 닦았다. 성검의 검자루를 감싸고 있던 가죽띠도 평범한 가죽으로 만들어진 건 아닌지, 꽤 오래 썼을 텐데도 빳빳하고 튼튼했다. 자루 끝, 둥근 부분을 닦고 가드 부분을 문질렀다. 흙먼지, 말라붙은 피 등이 헝겊에 묻어 나왔다.
“[몸이 닦인다는 게 생각보다 기분이 좋은 일이구나.]”
머릿속에서 미약한 한숨과 함께 성검이 말했다. 나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손질되는 게 처음이라는 듯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 주인들은 널 손질하지도 않은 거야?”
“[음, 글쎄. 이렇게까지 정성스럽게 나를 손질한 사람은 네가 처음일지도 모르겠구나. 내 검날은 상하지도 않고, 무뎌지지 않고, 부러지지도 않으며 피가 묻어 더러워지지도 않으니까.]”
성검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헝겊에 기름을 먹였다. 그리고서 다시 조심스럽게 자루 끝에서부터 성검을 닦아 나갔다. 검날은 성검이 말해주었던 대로, 처음 보았던 상태 그대로였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신까지 꼼꼼히 닦았다. 홈이 난 곳, 음각이 새겨진 곳까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뭐, 이렇게 닦아도 네 검날은 어차피 빛나고 있었으니, 큰 의미는 없네.”
“[…그렇지만은 않다.]”
검날이 조금 더 빛나 보이기는 했지만, 특별한 효과는 없어 보였다. 내가 조금 불만스럽게 투덜거리자, 성검은 작은 목소리로 내 말을 부정했다. 나는 낮게 웃었다. 아무래도 자주 손질을 해줘야겠다. 나는 가만히 성검을 손질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금빛 햇살이 방에 드리우고, 금빛 창호가 덧씌워진 창밖으로는 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구나, 괜찮은 게냐?]”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정말이야.”
성검이 내 기분을 정확히 파악하고는 물어왔지만,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걱정하는 건 현재의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내가 걱정하는 건 조만간 닥쳐올 재앙과 맞서 싸워야 할 이 성채였다. 내가 정말 싸워서 지켜낼 수 있을까, 그 면류관 속에서 보았던 존재를 대면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아직 걱정하기에는 때가 이르다, 일로이. 조금은 마음을 편히 하거라.]”
“응. 그래야지.”
나는 그러면서 창밖, 멀찍이 걸어가는 퀘노어 대공과 그의 가족들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저 사람을 걱정하는 게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원작에서, 퀘노어 스트로프는 거인과 싸우다 전사한다.
나는 자기 막내딸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는 퀘노어 대공을 보며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