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36화 (37/158)

Chapter 36 - 36. 축제와 전조 (1)

“여기는 내가 홀로 막으마. 너희들은 아르옌을 데리고 에버노드의 성채까지 후퇴해라!”

퀘노어 스트로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눈보라를 뚫고 울려 퍼졌다. 한계선 너머, 거인이 다가올 수록 온도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휘몰아치는 눈은 발목을 넘어 무릎 위까지 쌓이기 시작했고, 북부의 강건한 기사, 병사들은 눈 속에서 습격해오는 거인의 수하들에게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저희도 죽겠습니다.”

“나는 죽겠다고 말한 적 없다. 그러니 어서 성채까지 후퇴해, 수성전을 준비해라.”

퀘노어 스트로프의 오러는 주변의 눈을 모조리 날려버리고 있었다. 어지간한 마물들은 그 오러의 끝자락에 닿는 것만으로 갈기갈기 찢겨버렸으며, 그의 일검은 제법 강한 마물이라도 그대로 베어버렸다. 에버노드의 병사들이 뒤로 후퇴하는 동안 퀘노어 스트로프만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에게 한계선의 눈보라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물러가라. 이 너머는 너희들의 영역이 아니다.”

퀘노어 스트로프의 검이 다시 눈발을 갈랐다. 이름이 있는 마물들이 나섰다. 퀘노어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보라 깊은 곳으로 발을 뻗어 들어갔다. 새카만 밤이 퀘노어 스트로프를 집어삼켰다.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그 발자국마저 금세 묻어버리고 말았다.

.

.

.

“…망할.”

기분이 더러워지는 꿈이었다. 나는 평소와 다르게 바로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천장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소설의 기록은 활자 이상으로 머릿속에 남아 선명한 영상으로 떠돌았다. 면류관이 보여주었던 광경이 남긴 기억 때문일 것이리라 생각한다. 덕분에 난 아직 꿈속의 눈발에 푹 잠겨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몸을 뒤척거리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

“일어났나, 일로이.”

같은 방의 게오르그는 이미 일어나서 아침 구보를 끝낸 후 씻고 온 것 같았다. 아침 7시 반. 시간이 제법 많이 흘러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너는 휴일에도 빠르네. 그렇게 일어나서 아침에 뛰고 올 힘이 나냐.”

“너야말로 별일이군. 평소에는 나보다도 일찍 일어나면서 말이다.”

나는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나름의 배려인지, 게오르그는 아직 방의 암막을 걷어내지 않았다. 아침의 햇빛이 바깥의 소리와 함께 암막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오늘부터 축제였나.”

“그래. 카린 아가씨가 오늘 점심 즈음에 축제를 안내해주신다고 했으니, 늦지 않게 시간을 잘 기억하고 있으라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암막을 걷어 보았다.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할 때는 아니었지만, 길가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축제 의상을 갖춘 채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네 번째 재앙을 공략하러 와서 이런 평화로운 행사를 경험하게 될 줄이야.”

게오르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퀘노어 대공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정말 하지 축제 기간에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 이미 에버노드의 기사들과 호흡은 맞출 대로 맞춘 상태이고, 언제 출정해도 문제가 없는 거 아닌가.’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며 거절하려 했으나, 퀘노어 대공은 구태여 우리에게 축제 동안은 아무런 일도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딱 잡아떼었다. 순찰도 나서지 말고, 그냥 자기 딸과 함께 에버노드의 여름을 잠시나마 구경해주면 정말 좋겠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나도 하루는 시간을 낼 테니, 부담을 갖지 말았으면 하네.’

기뻐해야 할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우리는 에버노드에서 뜻밖의 추가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나는 창틀을 따라 내 눈을 찌르는 햇볕에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암막을 닫았다. 고개를 내리자, 내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성검과 그 아래의 목함이 보였다.

“….”

나는 목함을 집어들었다가,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그날 이후로 면류관의 시련을 받아 통과해보려 몇 번인가 더 시도해보았다. 다시 그 눈밭을 마주하게 될 줄 알았지만, 면류관은 매번 내게 다른 시련을 내렸다. 다시 고통을 준 적도 있고, 끔찍한 광경을 보여준 적도 있다. 타는 듯한 갈증이나 굶주림, 졸음으로 날 시험하려 한 적도 있다.

물론, 아직 한 번도 그 시험을 통과하지는 못했다. 되려 마음이 조급하다 느낄수록 버티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골치네.’

성검이 2단계의 개방 조건으로 내건 것 중 아직 가까이 다가갔다고 느껴지는 게 없었다. 적어도 면류관의 시험은 일찍 통과할 줄 알았는데, 이게 제일 어려워질 줄은 나도 몰랐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너도 한 바퀴 뛰고 와라. 정신이나 차릴 겸. 아니면 내가 같이 한 바퀴 더 뛰어줘도 괜찮은데.”

게오르그가 목에 걸친 수건을 바구니에 던져버리며 말했다. 내가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게오르그를 바라보자, 게오르그는 왜 내가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암막을 걷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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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축제의 풍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꽃들이었다. 들꽃이든, 가정에서 정성스럽게 재배한 꽃이든. 에버노드는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순간 그 향기가 풀내음, 나무 냄새와 섞이고 섞인 채로 공기를 타고 들어와 머리를 가득 채웠다. 꽃은 나뭇잎, 덩굴과 줄기로 엮여 집 대문, 지붕, 간판, 창문에 걸렸다. 나는 이름 모를 꽃들의 향연을 지켜보며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우와.”

하얀 드레스 차림의 다프네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구름이 군데군데 낀 하늘을 배경으로 꽃잎이 나풀나풀 날아가고 있었다. 북부의 여름은 곧 봄과 궤를 같이하는 듯했다. 나는 화관을 하나씩 쓰고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굉장해요.”

“왕도는 늘 화려하니까. 이런 느낌의 축제는 좀처럼 보기가 힘들지.”

게오르그 역시 감탄하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마리안느 역시 그녀로서는 드물게 눈을 살짝 크게 뜨고는 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국에서는 이런 축제가 없었던가?”

마리안느는 내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오늘 같은 날에도 한결같은 수녀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겨울에 성축일이 있지만, 여름에는 이런 축제가 없습니다.”

마리안느는 그리고서는 길거리에 내놓은 다양한 화분, 화단을 바라보았다. 훈풍에 꽃들이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드물게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인 마리안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감상이 어때?”

“…아름답습니다.”

마을 이곳저곳에는 덩굴에 감싸인 높다란 기둥들이 세워졌고,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둥글게 원을 만들고는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스트로프 가문의 저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의 정문 앞에서는, 처음 보는 평상복 차림의 퀘노어 대공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벼운 긴팔 스웨터 한 장 차림. 진작 저렇게 좀 입고 다니지, 왜 멋을 부린답시고 그 무거운 망토를 매고 다닌 걸까. 대공은 그와 함께 우리를 마중 나온 철혈공주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오늘 하루 딸을 잘 부탁하지.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네. 자, 카린.”

앞으로 나서는 카린은 ‘철혈’은 빼놓고, 어린 공주에 꼭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를 예쁘게 양갈래로 묶었고, 길고 주름이 진, 살구색 치마와 붉은색 자수가 놓인 셔츠를 입었다.

“용사 일행을 잘 안내해주거라. 너도 같이 축제를 즐기는 걸 잊지 말고.”

“네, 아버지.”

카린은 종종걸음으로 우리 앞으로 나섰다. 다프네는 가장 먼저 앞으로 달려 나와 카린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고, 카린은 빙글빙글 도는 눈으로 다프네의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손짓으로 다프네의 손을 맞잡았다.

“…저, 너무 행복해요.”

다프네의 주접을 보는 나와 게오르그가 동시에 입꼬리를 비틀며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눈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린, 오늘 우리 다프네를 잘 보살펴 줘야 한다.

“일단 식사부터 하러 갈까. 축제가 열릴 동안만 먹을 수 있는 전통 음식이 있겠지.”

“오, 식사라. 좋다, 그럼 나는 에버노드가 자랑하는 에일을….”

“술은 내일 실컷 마시셔.”

나는 팔꿈치로 게오르그의 옆구리를 찌르며 핀잔을 주었다. 어딜 철혈공주께서 친히 축제를 안내해주시겠다는데, 술이나 퍼마실 생각을 해. 나는 옆구리를 붙잡는 게오르그는 내버려 두고 허리를 슬쩍 구부리며 카린과 눈을 마주쳤다.

“카린 아가씨.”

“카린…이라고만 불러주세요.”

카린은 뽀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수줍게 말했다. 시선을 조금씩 피하며 머뭇거리는 모습을 옆에서 내려다보는 다프네의 눈빛이 이상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야, 야. 너 그러다가 위병한테 잡혀가.

“그럼, 카린. 점심으로 먹고 싶은 게 있나요?”

“…훈제 연어랑…감자 빵이요.”

잠깐. 연어. 이 세상에도 연어가 있었단 말인가. 아니, 소랑 돼지랑 양이랑 닭이 다 있는데, 연어라고 없으리라는 법은 없잖아. 게다가 여긴, 지구로 따지면 알래스카, 노르웨이, 스웨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연어를 생산하는 지방에 해당하지. 여름이라, 가을에 한창 살이 올라왔을 녀석들보다는 맛이 덜하겠지만, 그걸 어떻게 참아. 나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내 머리를 따라 카린의 고개가 위로 휙 젖혀졌다.

“가죠. 훈제 연어.”

“[…웬일로 기운이 넘치는구나.]”

성검이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딴죽을 걸었다. 연어는 빛이요, 정의다. 구워 먹어도 맛있고, 회로 먹어도 맛있고, 훈제 스테이크는 더더욱 맛있다. 이번에는 내 급발진을 게오르그와 다프네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리안느마저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는 나를 보았다.

뭐. 어쩌라고. 내가 연어 먹겠다는데.

나는 카린의 나머지 한쪽 손을 잡아 들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골목으로 향했다. 다프네가 덩달아 카린의 나머지 한쪽 손에서 꿰여 딸려왔고, 그 뒤로 나머지 멤버들이 떨떠름한 발걸음으로 나를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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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축제에 맛있는 음식은 훈제 연어만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감자 빵. 카린이 감자 빵이라고 말했을 때는 그냥 감자가 들어간 빵인가,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 감자 전분을 넣어 식감을 쫀득하게 살린 빵이었다. 빵을 만두피처럼 얇게 만들어내 그 위에 채소, 청어나 연어를 얹어 싸 먹는 방식으로 먹어보았는데, 그 조합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맛있었다.

“술만 있었으면 더할 나위가 없었을 텐데.”

게오르그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식당에서 몰래 술을 시키려 했지만, 나와 다프네의 눈에 걸려 매번 저지당한 그였다. 배를 채우고 나니 주변을 더 둘러볼 여유가 났다. 카린은 다프네의 손을 붙잡은 채로 에버노드의 이곳저곳을 소개해주었다. 카린을 알아보는 노점상들이 공짜로 이것저것 쥐여준 탓에, 카린의 볼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줄곧 빵빵한 상태였다.

“저거… 하나씩 살래요?”

그렇게 길을 거닐던 도중, 카린은 한 노점 앞에서 멈춰 손가락으로 좌판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화관을 판매하는 상점인 듯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남녀노소 구분 없이,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하나씩 화관을 머리에 쓰고 다니고 있었다. 다프네는 카린의 손을 이끌고 상점으로 가 일행의 화관을 하나씩 사 왔다.

“어때요, 일로이?”

“…엄청 잘 어울리네.”

다프네가 흰 꽃을 엮어 만든 화관을 쓰며 물었다. 이미 꽃잎같은 색의 머리카락과 화관이 잘 어우러졌다. 작은 화관을 머리에 쓴 카린은 철혈이라는 단어에서 한층 멀어진 모습이었다.

“다들 하나씩.”

그런 카린을 바라보던 다프네가, 우리 파티에게 화관을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게오르그는 은근히 분위기에 들떴는지, 화관을 받자 머리에 바로 얹어 보았고, 마리안느는 화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채근하는 듯한 카린의 눈빛에 모자를 벗고 화관을 얹었다. 그녀의 은발에 잘 어울리는 다채로운 색의 꽃이 엮여있었다.

“자, 일로이도.”

나는 다프네가 건네어 주는 화관을 보았다. 다프네는 내게 손짓해 허리를 숙여보라 하더니, 내가 고개를 숙이자 내 머리 위로 화관을 올려주며 웃었다.

“일로이도 잘 어울리네요.”

이 눈매 더러운 얼굴에 꽃이라니.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머리에 걸린 화관을 더듬었다. 다프네는 그런 내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더니, 이내 카린을 데리고 다음 즐길 거리를 찾으러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쓰게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느냐?]”

성검의 의문스러운 목소리. 나는 대답 대신 가만히 머리에 쓴 화관을 벗었다.

“내가 머리에 쓰고 있어야 할 건 따로 있잖아.”

들꽃으로 엮어낸 화관의 모습과 목함 속에서 가만히 도사리고 있던 면류관의 모습이 겹쳤다.

“[뭐, 굳이 그렇다고 네가 화관을 쓰지 않을 이유는….]”

나는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말해오는 성검의 검자루 위로 화관을 걸었다. 성검은 말을 이어가려다, 화관이 씌워지자 멈추었다.

“자, 그러니까 네가 대신 좀 쓰고 있어 줘.”

“[….]”

잘 어울린다고 해야 하나? 나는 화관이 걸린 검자루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성검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고, 나는 멀어진 일행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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