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 - 37. 축제와 전조 (2)
사람들이 둥글게 원을 이뤄, 십자 모양의 기둥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기둥은 온통 나뭇잎, 덩굴, 꽃으로 뒤덮여 파릇파릇했다. 십자 부분의 꼭대기에는 현수교처럼 십자의 양팔로 늘어진 줄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둥그런 화관이 달려 있었다. 나는 기둥의 끝자락에 걸린 태양이 내리쬐는 빛에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저게 왜 5월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거라고?”
나는 옆에 양반다리를 하고 주저앉아있는 게오르그에게 물었다. 게오르그는 집념으로 어디선가 몰래 사 온 에일을 맛보며 흡족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툭, 하고 나무잔을 풀밭에 내려놓고, 입가를 손등으로 닦고는 내 질문에 대답을 들려주었다.
“원래 저 기둥을 세우는 풍습은 에버노드… 북부 이남의 지역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군. 거기서 5월에 벌이던 봄꽃 축제에 기둥을 세웠는데, 그래서 5월의 기둥이라 불리는 듯해. 지금은 에버노드의 하지 축제가 훨씬 유명해졌지만 말이지.”
모르는 게 없구만.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내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에 수녀의 모자 대신 화관을 쓴 마리안느가 내 시선을 느끼고는 내게로 눈을 돌려주었다. 수녀 모자 대신 화관이 올려진 은빛 머리는 하지의 해를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굳이 이런 걸 묻는 것도 바보 같지만, 가서 춤 안 춰도 괜찮아?”
“네. 저도 그냥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 왼편 허리춤의 성검과 그 검자루에 걸린 화관을 흘긋 보더니, 이내 다시 5월의 기둥을 바라보았다. 원을 그리며 분홍빛 머리를 나풀거리는 다프네가 보였다. 다프네의 손을 붙들고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카린의 모습 또한 보였다.
다프네가 어린이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마리안느는 아이가 잘 따를 것 같기는 하지만, 돌보는 데에는 재능이 없을 것 같았고, 게오르그는 둘 다 아닐 것 같았다. 울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뭐, 다프네가 내가 카린을 상대할 틈도 없이 독차지하고 있다는 건 상정 외지만 말이다.
“이전에 제게 물어보셨던 건, 알아냈습니까?”
문득 마리안느가 물었다. 이전에 그녀에게 물어봤다고 함은, 불침번을 설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겠지. 나는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못했다. 겨우 그걸 알아냈다고 하기에는 너무 흐릿하게 실마리만을 거머쥐었을 뿐이니까.
“글쎄다. 적어도, 뭐라 말로 설명하지 못할 감각이라는 건 알겠더라.”
눈앞으로 꽃잎이 하나 날아들었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 세워 검처럼 꽃잎을 향해 휘둘러보았다. 꽃잎은 내 손끝에서 잠시 머무르는 듯하다가, 다시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겠다는 기분이야. 무슨 양파도 아니고, 하나 까면 새로운 껍질이 나오고, 그걸 까면 더 단단한 껍질이 나오고.”
왕도에서도, 에버노드에서도 나는 이따금 서고를 들락거리며 검술서를 뒤적거리고는 했다. 가장 기본적인 기수식을 취하는 방법에서부터 복잡한 검식과 고매한 무학에 이르기까지. 용사의 권위를 이용해 꽤 유명하고 비밀스러운 검법도 알아보았지만, 크게 깨달은 바는 없었다. 그저 좋은 참고가 되었다는 것 정도.
“원래 검을 쓴다는 게 그런 거다, 일로이. 검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전사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게오르그가 입을 열었다.
“메이스나, 내가 사용하는 모닝스타같이 쓰는 법이 쉽고 간단한 무기라도, 완벽하게 그것을 다룬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거다. 하물며 검이나 창처럼 쓰기 어려운 무기는 오죽하겠냐.”
게오르그는 그러면서 길게 한숨을 내뿜으며 술기운을 즐겼다. 저 녀석이 하는 말은 옳은 말일 텐데, 한 손에 에일을 끼고 저런 말을 하고 있으니, 그냥 훈수하는 아저씨였다. 여전히 머리에 얹고 있는 화관의 기묘한 비주얼은 덤이었다.
“그 정도 실마리라도 잡으셨으면, 가장 큰 관문은 통과한 거라 생각합니다.”
마리안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결국 그 실마리가, 둑에 뚫린 작은 구멍처럼 점차 벽을 허물어버릴 테니까요.”
“조금만 더 선명해지면 깨달을 거 같은데. 아직은 정말 문간에 발만 걸치고 있는 기분이야.”
알지 못할 때는 막연하기라도 했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하니 답답했다.
“많은 검사가, 혹은 창잡이가 한 번 이상은 거치는 과정이다. 그걸 극복하면 이제 네가 검을 잡고 보는 세계가 달라지겠지.”
게오르그는 마치 그 과정을 모두 거친 사람처럼 말했다. 뭐, 기사단장이니, 기본적으로 저 녀석이 하는 이야기는 대체로 옳은 이야기겠지만.
“그런데, 여태 잘 싸워왔으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이유는 뭐냐?”
게오르그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그런 게오르그를 향해 눈살을 잔뜩 찌푸려 보였다.
“당연한 거 아니야. 재앙을 쓰러트리기에는 아직 부족하니까 그렇지.”
“…그래. 이번 전투에서도 크라켄만큼 운이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쿠당탕.
기둥 아래에서 원으로 빙빙 돌던 대형이 무너졌다. 넘어진 이들은 웃으면서 대열에서 빠져나왔고, 남은 이들이 다시 원을 만들어 돌 준비를 시작했다. 다프네와 카린은 아직까지 대열에서 잘 버티고 있었다.
“넌 바뀌었다, 일로이.”
게오르그가 말했다. 술이 다 떨어졌는지 게오르그는 나무잔을 덜렁덜렁 흔들다가 혀를 차며 풀밭 위에 올려놓았다.
“그 재수 없는 성격은 그대로지만, 조금 더… 뭐라고 할까.”
게오르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 같아졌다고 해야 하나.”
“전에는 꼭 사람 같지도 않았던 것처럼 말하네.”
“모르겠다. 너는 항상 아이시스를 제외한 남에게 적대적이고, 말이 없었으니까. 그때 왜 그랬는지는 묻지 않겠다. 왜 바뀐 거냐?”
나한테 묻는다 한들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 할까. 나는 부루퉁하게 표정을 망가뜨렸다.
“몰라. 세 번째 재앙을 쓰러트린 후, 그 둘을 내보내겠다고 생각하면서 뭔가 바뀌었을지도.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그래. 위험한 선택이었지만 말이지. 설마 네가 기존의 세 파티원을 모두 내보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물며 네 편인 것으로 보였던 넬라도 내보낼 줄은 몰랐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기존 파티원들은 내가 고른 것도 아니었잖아. 이것저것 지시와 추천을 받아 우리 파티에 넣은 거지. 너도 포함해서 말이야.”
“그래, 숙청 끝에 나 또한 내보낼 줄 알았는데, 나는 아직 멀쩡하게 남아있는 게 신기하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게오르그를 내보낼 이유가 어디 있냐. 원작에서도 그 많은 일을 겪고도 끝까지 용사 파티에 남아있던 우직한 녀석인데.
“너는 끝까지 중립이었거든. 아르옌과 내 다툼에서.”
“….”
게오르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로 털썩 드러누웠다. 낮잠이나 잘 요령인 듯했다. 기둥 아래에서 빙빙 돌던 와중, 다프네가 먼저 발이 꼬여 넘어졌고, 덩달아 다프네의 손을 붙잡고 있던 카린이 다프네의 위로 엎어졌다. 다프네는 옷에 묻은 풀잎과 흙을 털고 카린의 옷도 털어준 후 앉아있는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으아. 저거 엄청 재밌네요.”
머리카락에도 풀잎을 잔뜩 묻힌 다프네가 웃으며 말했다. 천진한 모습이었다. 원작에서 용병 파티에 있었을 때는, 이리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기억하는데. 이게 원래 자기 성격에 가까운 거겠지.
“즐기는 거 같아 보이더라.”
“너무 빙빙 돌아서 어지러운 거만 빼면 말이죠. 나잇값 못하는 거 같나?”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너 나이가 어떻게 되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스물셋이요. 그러고 보니, 우리 파티원들 나이도 아직 모르고 있었네요.”
게오르그가 슬쩍 얼굴만 돌려 나와 다프네를 보았다.
“나는 서른셋이다. 한창 팔팔할 때지.”
“노안이네.”
“이 새끼가.”
나는 인상을 확 찌푸리는 게오르그에게서 고개를 돌려 마리안느를 보았다.
“저는…스물두 살입니다.”
스물둘. 생각보다는 나이가 적었다. 다프네보다 나이가 많으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한 살 어렸다. 그러니까, 게오르그처럼 얼굴이 노안이라는 소리는 아닌데, 풍기는 분위기가 더 어른스러우니까…. 이런 생각은 하면 실례겠지.
“[당연히 실례지. 너는 매너라는 걸 더 배워야 하겠구나.]”
성검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성검의 나이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솟아오려는 걸 꾹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괜히 말을 걸었구나.]”
성검이 반쯤 풀이 죽고, 반쯤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할 수 없는 건 아니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을 때 코끼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미안해, 성검. 그때, 다프네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일로이는요?”
내 나이? 아니, 나이는 모르는데. 원작에서 아이시스가 스무 살, 아르옌이 스물아홉. 어쩌지. 진짜로 모르겠는데. 원작에서 일로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온 적이 없었다고. 옆에서 게오르그 또한 궁금하다는 듯 날 보고 있었다. 너도 모르는 거냐.
“스물일곱.”
나는 얼떨결에 거울에서 본 내 모습에서 유추한 나이를 말했다. 맞나? 일단 서른을 넘기지는 않았을 거 같고, 20대 초반이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어느 정도는 있어 보였으니까.
“스물일곱…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다프네는 휘청거리며 카린과 함께 게오르그와 나 사이에 주저앉았다. 나는 헤실헤실 웃는 카린의 머리카락에 붙어있는 풀잎을 정리해주었다.
카린은 가만히 눈을 감고 내가 풀잎을 떼주는 걸 기다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린 듯 눈을 똑바로 뜨며 합,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내 손을 피하며 스스로 머리를 휙휙 털어내기 시작했다. 끙. 그렇게 내 손이 싫었나.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은 거겠죠.”
다프네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다프네를 보았다. 다프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카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아네.”
“왕도에 오기 전에 머무르던 마을에서는 애들을 많이 돌봤어요. 동생들도 있었고, 그 마을의 아이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은 편이었으니까, 대장처럼 애들이 따른 것도 있었고.”
다프네는 그리 말하며 카린이 미처 털어내지 못한, 양갈래 머리에 끼어있던 잎사귀를 떼어내 주었다. 모습을 정돈한 카린은, 아이답게 금방 어지럼증을 털어내고 똑바로 앉았다.
“더 누워있어도 돼요.”
카린은 고개를 저었다.
“철혈공주는 그런 어지러움 같은 건 금방 이겨야 해요.”
그리 말하는 카린의 표정은 아홉 살치고는 결연했다. 나는 고개를 내리며 카린과 눈을 마주치려 했다.
“왜 철혈공주가 되고 싶어 하는 건가요?”
“철혈은 강하니까.”
카린은 그리 말하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강해지고 싶은 건가요?”
“…강해져서, 오라버니를, 아버지를 용사님처럼 도와주고 싶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강하니까,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죠.”
카린은 고개를 숙였다.
“용사님처럼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직은 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는 그리 말하며 카린의 검은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도움이 필요하게 될 때까지 강해지면 되니까. 카린은 조급해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철혈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나는 내 가슴을 짚어 보였다. 카린이 나를 따라 손을 제 심장이 있는 곳에 올렸다.
“여기.”
“마음?”
“네. 마음. 여기만 강하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예요.”
철혈. 나는 아직 그녀를 놀리며 웃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내가 지금 그녀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느냐에 따라 카린이 어떻게 성장할지가 달라질 테니까. 어린 시절의 꿈을 비웃는 건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카린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웃으면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주변에서 밝은 웃음소리는 계속 들려왔고, 여름이 가장 긴 날의 태양은 부드럽게 사람들을 감쌌다. 문득, 졸음이 몰려왔다. 이미 게오르그는 잠에 빠져 있었고, 마리안느도 옆에서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다프네 또한 피곤한 듯 눈을 비볐다. 카린은 이미 다프네의 옆에 먼저 누운 상태였다.
나도 잠시 낮잠이나 잘까.
내가 누울 땅을 고르기 위해 땅을 만져보고 있을 때였다.
쿵.
변화는, 그때 갑작스레 찾아왔다.
졸음이 완전히 달아난 상태로,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버노드의 외벽이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일로이?”
들려오는 다프네의 목소리. 그리고,
드드드드.
미세하게,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축제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당황하며 주변을 마구 둘러보기 시작했다.
“지진인가?”
“갑자기 땅이 흔들려….”
“[일로이.]”
성검의 목소리. 감각이 움찔거렸다. 그녀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산맥 너머, 깊숙한 골짜기를 넘어 세상에서 가장 황량한 땅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