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9 - 39. 전초전 (1)
나는 파티의 나머지 멤버들과 카린을 데리고는 미친 듯이 달려 퀘노어 대공의 저택에 도착했다. 퀘노어 대공 또한 아까 전의 흔들림과 움직임을 느꼈는지, 굉장히 심각해진 표정으로 저택 앞의 병사들과 기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는 중이었다. 대공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함께 저택 앞에 나와 있던 부인에게 카린을 맡기고는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일로이, 잘 왔네.”
심각했어도, 퀘노어 대공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북부에서 강력한 마물들과 맞서 싸우고, 그들을 모조리 무찔러 온 이는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할 줄을 알았다. 그와 반면, 내 심장은 침착하지 못하게 안쪽에서부터 왼쪽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방금 대공께서도….”
“느꼈네. 아주 확연히. 일로이, 자네도 느낀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않았다. 대규모 군세가 밀려온다든가, 갑작스럽게 마물이 급증했다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훨씬 근본적이고, 두려운 느낌. 나와 퀘노어 대공은 동시에 같은 곳을 바라보며 입가를 굳혔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대공의 지휘를 우선시하겠습니다.”
그라면 지금 상황에 더 적합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거다. 거기에 내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조언해주면 되겠지.
“주민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지만, 축제는 첫째 날에서 끝내야겠군. 피난령을 내리고 나흘 내로 모든 주민이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켜놓도록 하겠다. 리스!”
퀘노어 대공이 옆을 돌아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리스는 병사들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리다가 퀘노어의 호출에 재빠르게 뛰어왔다.
“지금 당장 긴급 순찰대를 구성해라. 인원은 평소 구성 인원의 두 배. 특별히 주의해서 모든 순찰 구역을 일제히 돌도록 하고, 신호탄을 넉넉히 챙길 수 있도록 해라. 더해 오늘부터 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가장 높은 수준의 경계 태세를 유지하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퀘노어 대공은 내게로 흘긋 고갯짓했다.
“앞으로 용사 파티를 1번 순찰 구역의 순찰대에 고정적으로 포함한다. 리스, 1번 순찰 구역은 너와 일로이가 동시에 지휘를 맡을 수 있도록 해라. 둘이 공동 지휘를 맡되, 전반적인 순찰 계획은 네가 짤 수 있도록 하고, 현장 지휘는 일로이에게 조금 더 의지할 수 있도록 해라.”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리스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동분서주하는 병사들에게로 뛰어갔다. 대공은 금세 리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파란색. 굳건한 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일로이.”
“예, 대공님.”
“부디 조심해서 정찰할 수 있도록 하게. 방심하지 말고. 그 무엇보다도, 무사히 귀환하는 일을 우선시해야 하네. 아무리 수상한 점이 있어도, 더 조사하려 하지 말고 그냥 넘어가.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는 사실만을 아는 것으로 족하니 말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퀘노어 대공의 말에는 사람을 동하게 하는 기묘한 울림이 있었다.
“정찰을 돌고, 네 번째 재앙이 다가온다는 정황이 포착되었을 경우, 왕도로 지원 요청을 보내는 동시에 주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리도록 하지.”
“세 번째 재앙을 쓰러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현재 왕도 병력에 여유가 많지는 않을 겁니다. 대규모의 지원은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알겠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하지 않겠나.”
대공은 그리 말하고는 잠시 나를 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용사를 너무 부려 먹는 게 아닌가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언제는 저를 안 부려 먹은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대공님.”
내가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퀘노어 대공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아직 농담할 정도로는 정신이 있군. 1번 순찰대를 잘 부탁하네, 일로이. 그리고, 용사 파티들도.”
대공의 말에 게오르그와 마리안느가 고개를 끄덕이고, 다프네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우리 파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 저들과 함께 진짜 전쟁을 준비해야만 한다.
“가자. 1번 순찰 구역이 어땠는지는 다들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이다.”
“예.”
“네. 기억하고 있어요.”
동료들의 상태를 점검한 나는 마지막으로 성검의 검자루를 꾹 움켜쥐었다. 성검은 내 손길에 즉각적으로 대답해주었다.
“[괜찮다, 일로이. 네 동료를 믿고, 너를 믿어라. 지금은 다른 복잡한 일을 생각하지 말고, 저 대공이라는 자가 말한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거라.]”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방망이질 치던 심장이 더 요동칠 힘을 잃고 천천히 원래 심박을 되찾아갔다. 성검의 말대로, 지금은 우선 순찰에서 재앙의 전조가 보이는지 확인하는 일만을 생각하자. 마구간에서 말을 타고 나오자, 리스가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선 구역을 샅샅이 둘러보는 건 후에 하고, 호수로 가는 걸 최우선으로 한다. 한계선의 변동 여부를 확인한 후, 돌아오는 길에 보도록 하지.”
외성의 쇠창살이 철컹거리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리스와 내가 속한 1번 구역의 순찰대를 필두로, 에버노드의 기사들에 출입구의 앞에 집결했다. 리스는 순찰대들을 돌아보았다.
“출발한다! 만에 하나 일이 생기면 객기 부리지 말고 신호탄부터 터뜨려라!”
““예, 알겠습니다!””
나는 순찰로로 이어지는 길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기분 탓일까, 평소보다 불온한 기운이 저 끝에 남아 맴도는 것 같았다.
“출발하겠습니다, 용사님. 함께 선두에 나서지 않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휘권이 나와 리스에게 모두 있다지만, 내가 리스와 함께 선두에 선다면 괜히 지휘 계통이 망가지고 판단이 느려질 수도 있다. 순찰대의 통솔은 전적으로 리스와 리스를 돕는 부관들에게 맡기고, 나는 순찰대의 후미에 서서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하는 편이 훨씬 나을 거다.
“아뇨. 저는 최후미에서 혹시 모를 습격을 경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상황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다급해질 때만 도울 수 있도록 하죠. 지휘를 부탁하겠습니다.”
리스는 군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평소보다 빠르게 말을 몰았다. 순찰대는 순식간에 외성 밖 초입을 벗어나 침엽수림으로 진입했다.
“그 진동이 네 번째 재앙이 다가온다는 뜻이었을까요?”
나보다 조금 앞에서 달리고 있던 다프네가 물었다. 나는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마 그게 몸을 일으키면서 일어난 지진이었을 거야.”
“…그저 몸을 일으켰을 뿐인데, 지진이 일어나다니.”
얼굴에 핏기가 가신 다프네가 고삐를 그러쥐며 침음성을 내뱉었다.
“일로이는 그걸 직접 느낀 건가요?”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나는 단순히 그 흔들림을 느꼈을 뿐만이 아니라 거인의 존재를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원래 재앙이라는 존재가 이렇게까지 또렷하게 느껴지는 건가? 다프네의 반응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만도 않은데.
“[내 마나가 네 기질을 바꾼 거다, 일로이. 재앙을, 마물을 더 잘 감지할 수 있도록.]”
너, 생각보다 자잘한 기능이 훨씬 많았구나. 나는 성검의 검자루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나를 고작 다양한 기능이 달린 검으로 취급하는 건 둘째치고 말이다.]”
성검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선두의 리스가 서서히 대열의 속도를 늦추었다. 정신없이 달려가던 말들이 잠잠해지자 숲이 일순간에 고요해졌다. 멀찍이 2번 순찰 구역을 도는 순찰대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조용하군.”
게오르그가 중얼거렸다.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 순찰 구역은 고요했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지나쳤다. 풀 부스럭거리는 소리, 작은 생물이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려오지 않는다. 하물며 마물의 낌새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숲속에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숲 전체가 숨을 죽인 느낌.
그때, 리스가 왼손을 치켜들더니 검을 빼 들었다.
“‘북부의 눈’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최대한 경계하며 전진할 수 있도록 하지.”
리스의 말에 병사들이 일제히 무장을 준비했다. 나 또한 성검을 뽑아 들고 마나를 순환하며 기감을 넓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경계가 무색하게 숲의 끝에 다다를 때까지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군세를 구성하기 위해 이 숲에 존재하는 모든 마물을 불러 가버린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순찰대의 불안은 ‘북부의 눈’에 도착하고서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다.
“…맙소사.”
산맥 너머, 하늘이 완전히 잿빛이었다. 어렴풋이 보이던 회색 구름이 더 짙게 모여들고는 파란 하늘을 잡아먹고 산등성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너머의 공기가 희뿌옇고 흐렸다. 아마 사람을 가볍게 날려버릴 수 있는 눈보라가 저 너머에서 몰아치고 있을 거다.
가시 면류관이 내게 보여주었던 풍경이 겹치며 떠올랐다. 잿빛 하늘 아래에서 몰아치는 눈보라. 아무도 없는 에버노드를 홀로 걸어가던 나. 그리고, 이 숲의 나무들을 성냥개비처럼 짓밟아버리고 다가오던 재앙이, 거인이.
“[일로이.]”
나는 성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렸다. 감각이 예민해지며 바람이 품고 있는 한기가 더욱 선명하게 와 닿았다.
“[정신을 차리거라. 그렇게 멍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내가 말해주었잖느냐.]”
…미안. 기세만으로 이렇게까지 압도당한 적이 없어서, 조금 정신이 흐트러졌나봐.
“[방심이라는 건 비단 자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만은 아니다. 주의하거라, 일로이.]”
성검은 엄하게 타일러주었고, 나는 고개를 세차게 내젓고는 호숫가로 향했다. 리스는 나처럼 산맥을 바라보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보고할 내용이 무겁군요. 한계선이 고작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나 가까워지다니.”
“아마 지진이 일어났을 때가 전진한 때였을 겁니다.”
내가 대답하자, 리스는 장갑을 벗고 호수에 손을 잠깐 담가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완전히 얼음장이군. 여름의 호수가 이렇게까지 차가운 적은 없었어.”
리스는 손을 털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마침 2번 순찰 구역과 3번 순찰 구역의 순찰을 끝낸 순찰대들이 속속들이 북부의 눈에 도착하고 있었다.
“수색대장님!”
“심상치 않아. 호수가 조만간 얼어붙기 시작할 거 같아. 너희들은 오는 도중에 마물과 마주친 적 있었나?”
2번 순찰대의 대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숲이 끔찍하리만치 조용하더군요. 그렇게 자주 보이던 흰늑대도 보이지 않았으니.”
“3번은?”
3번 순찰대의 대장 역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애초에 1번 순찰로에서 마물과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나머지 순찰로가 마주칠 리는 없지 않습니까.”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그것 빼고는 평소와 완전히 같아요. 빌어먹게도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뭐라도 보였으면 마음이 편했을 거 같아요.”
리스는 입술을 깨물고는 호수의 건너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다시 열띤 회의를 열기 시작한 순찰대장들을 바라보다가, 숲속에서부터 느껴지는 감각에 고개를 휙 돌렸다.
“용사님?”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아주 희미하지만, 피부를 찌르는 듯한 꺼림칙한 감각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숲속에 뭔가 있습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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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롤러, ‘주’는 지성이 있는 마물이자, 네 번째 재앙, ‘거인’의 수하를 자청하는 마물이었다. 주라는 이름은 다른 마물에게 받은 이름이었다. 함께 거인을 섬기는 마물 중에서는 비교적 약한 편에 속했지만, 은밀하고 재빠르게 행동하는 데에 있어서는 다른 마물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멍청한 인간들.
주는 사마귀 같은 집게턱을 딸각거리며 웃음과 비슷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물론, 사람들의 귀에는 그저 섬뜩하게 뼈를 갈아버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주는 자신의 피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저들을 죽여라. 죽여서 먹어버려라.
때가 머지않았다. ‘그분’의 걸음과 함께 나아가 저들을 한갓 고깃덩이로 만들 날이 머지 않았다. 제아무리 저들이 살아보려 발버둥을 쳐도 결국 다가오는 ‘그분’의 발아래에 짓뭉개지고 영원한 겨울 속에 가두어질 테니.
딸깍. 딸깍.
지성이 생기고서 말하는 시체들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저들이 오가는 길을 쭉 지켜본 후, 다시 저들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나타나 죽이는 것 또한 즐거웠다. 그렇다면, 지금 참고 있는 이 피의 충동을 해방하며 마음껏 놈들을 도륙하는 건 얼마나 더 즐거울까.
주는 부드드 뒷다리를 떨고는 숲의 그림자 속으로 물러갔다. 기척을 조금씩 발산해도 저들은 조금도 눈치채는 기색이 없었다. 숲속에서는 주의 수하 크롤러들이 함께 턱을 딸각거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조금은 저들을 놀려주어도 상관없겠지. 자신이야 유유히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습격을 결심하고서 다시 자리로 돌아온 주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뭐지? 분명히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저곳에 놈들이 있었는데?
바스락.
주는 제 본능에 따라 몸을 날렸다. 하지만,
쾅-!!
그대로 맥없이 굉음과 함께 내팽개쳐졌다. 주는 재빠르게 몸의 균형을 되찾으며 앞발의 날을 세웠다. 감히, 어떤 놈이 겁도 없이-!
그리고는, 눈앞에 나타난 ‘놈’의 모습에 주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쥐새끼가 하나 숨어있었군.”
웬 잿빛 머리에, 청록색 눈을 한 인간이 검을 높이 쳐들고 있었다. 그 뒤로는, 그를 따라온 것으로 보인 기사들이 전투 태세를 갖추고는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어떻게? 설마 그 잠시 내보낸 기척을 따라온 건가?
“보아하니 넌 지성이 있는 놈인 거 같으니….”
인간이 검을 낮게 낮추었다. 마물에게는 더없이 불길한, 새하얀 기운이 저 검에서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잠깐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