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 - 40. 전초전 (2)
“…그렇군.”
퀘노어 대공은 긴 탁자 위에 올려진 크롤러 한 마리의 머리를 바라보며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 머리는 일반적인 크롤러의 머리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머리통이 두 배는 됨직했으며, 크롤러의 겉면을 감싸고 있는 검은 갑주의 형태도 장식이 많고 불길했다. 마치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의 그것처럼.
“그런 녀석이 나타났었다는 말이지.”
퀘노어 대공이 크롤러의 머리를 두드렸다. 그는 그렇게 네임드 마물의 머리통을 한참 바라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라고 말이라도 하던가?”
“우리가 곧 거인의 발아래에 짓이겨질 것이라는 둥, 습격을 예고하는 듯한 말을 남기긴 했습니다. 아직 지성이 아주 높은 녀석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지능이 좋지 않다고 해서 놈은 마냥 약하지만도 않았다. 최후의 발악으로 몸을 비틀며 저항하는 놈의 공격들은 생각보다 훨씬 매서웠으니까. 물론 나와 리스의 공격에 금방 죽어버릴 수준일 뿐이었지만, 일반적인 순찰대를 습격했다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거다.
“한계선 너머로는 이런 놈보다 더한 마물들이 수십, 수백 마리 집결하고 있다는 말이겠지.”
“예. 놈들은 마치 인간처럼,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오늘 우리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보낸 이놈들은 그저 소모품도 안 되는 찌꺼기에 불과하겠죠.”
퀘노어 대공은 크롤러의 목을 집어 들고는 대기 중이던 병사에게 넘겼다.
“왕도에 지원 요청을 보낼 때, 근거로 이 목을 함께 제시할 수 있도록 해라. 안목이 있는 기사단장들이라면 상황의 심각성을 바로 깨달을 테니 말이야.”
병사와 다른 인력들이 떠나가고, 회의장에는 순찰대장들과 가신 몇 명, 퀘노어 대공, 루크, 그리고 우리 파티만이 남았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해 보이더냐.”
대공의 이번 물음에는 리스가 답을 했다.
“호숫가에서 한계선의 끝자락을 육안으로 관측할 수 있었습니다. 거인의 이동으로 인한 변동이라 사료합니다. 또한, 호수의 수온은 얼어붙을 듯 차가워졌습니다.”
“…순찰구역이 조만간 축소되겠군.”
퀘노어 대공이 중얼거렸다. 대공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순찰대를 내보내면 이런 미미한 충돌이 계속되겠지.”
“…아시다시피, 마물과의 전쟁이 인간에게 특히 힘든 건 우리의 생각으로는 놈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나는 원작에서 마물들이 얼마나 불가해했는지 떠올렸다. 놈들에게는 합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득과 실은 고려 대상이 아니고, 같은 대상을 공격함에도 아군이라는 개념마저 존재하지 않는다.
“순찰할 때 절대 방심하면 안 됩니다. 전초전은 이미 시작했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다행인 점은, 마물들의 대국적인 움직임, 형세 자체는 우리가 읽을 수 있다는 점이겠지요.”
“거인의 움직임. 그렇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들이 아무리 비합리적이라고는 해도, 행동 원리가 결여된 건 아니었다. 재앙을 신과 같은 존재로 섬기는 이상, 거인이 움직이지 않는데도 갑자기 대대적인 공습을 가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마물들을 하나의 군세로 묶어두는 건 거인이지, 다른 마물이 아니었다.
“일로이의 말이 옳습니다. 세 번째 재앙, 크라켄 전(戰)에서도 마물은 항상 크라켄과 함께 움직였습니다. 항상 재앙이 그들의 중심이 되었지요.”
게오르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우리가 저들의 영역 근처로 다가가는 건 조심해야겠습니다. 어디까지나 대대적인 침공을 하지 않을 뿐이지, 오늘처럼 순찰대를 습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퀘노어 대공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견들을 들려주어서 고맙네. 적어도 주민들이 대피할 시간은 있을 거 같아 다행이군.”
대공은 루크를 향해 돌아서며 어깨에 손을 얹었다.
“추후에 주민들의 피난이 시작되면, 네가 행렬을 이끌 수 있도록 해라. 주민들도 스트로프 가문의 피가 선두에서 함께하는 게 마음이 편할 거다.”
“대공님, 저는….”
“싸우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반박은 받지 않겠다, 루크. 적과 싸우기에 네 실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내가 너를 우선시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다.”
퀘노어 대공은 진작 이럴 때를 생각했다는 듯 루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버노드에는 우리의 성과 땅만이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네게 우리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걸 맡기려는 거다. 알겠나, 부단장?”
루크는 제 아버지의 눈을 쳐다보았다. 얼어붙은 호수처럼 새파란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오고 간 후에,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대공님.”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끝나자,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퀘노어 대공은 루크의 어깨를 몇 번인가 두드려주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다음 순찰부터는 내가 함께 나서도록 하지. 그저 앉아서 보고받는 것보다는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알 수 있는 게 있을 테니 말이다. 또한, 준비가 완료되는 동시에 주민들의 피난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라. 그 과정에서 에버노드의 모험가 지부와 긴밀한 협력을 취할 수 있도록 하고.”
퀘노어 대공은 그리 회의를 일단락 짓고 해산을 명했다. 에버노드의 중진들은 하나같이 무거운 표정으로 회의장을 나섰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를 따라 회의장에서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었다.
“잠시, 일로이, 게오르그.”
나와 게오르그는 우리를 부르는 대공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나는 나머지 파티원들을 먼저 내보낸 후, 대공에게로 다가갔다.
“이야기를 좀 하지 않겠나.”
괜히 불안하게 왜 이래, 이 사람이.
나는 미간을 좁히며 퀘노어 대공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그다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평소와 같은, 고고한 눈과 기세로 가만히 나를 마주 보고 있을 뿐. 보통 저런 게 제일 위험하다고 들었는데. 옆의 게오르그를 흘긋 보자, 그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불안하다는 듯 퀘노어 대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그런 표정을 지을 정도로 심각한 이야기는 아니네.”
퀘노어 대공이 우리를 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이곳에서는 자네들이 유이하게 재앙을 직접 맞닥뜨려보았고, 이 나라 최고의 재앙 전문가라고 할 수 있으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었을 뿐이지.”
퀘노어 대공은 의자를 빼 앉았다. 대공은 질문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다면서,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기 꺼리는 듯했다. 이봐 아저씨, 안 심각하다면서요.
“에버노드가, 이 성채가 외부의 지원 없이 재앙의 침공과 맞닥뜨린다면, 그들을 격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감히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거인을 격퇴하지 못하고, 에버노드에 가까워지도록 내버려 둔다면, 어차피 성은 무너져내리게 되어있습니다.”
“결국 거인이 이 성에 다다르기 전에 쓰러트려야 한다. 라고.”
그 말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풍경은 수많은 마물을 맞아 처절한 방어전을 펼치던 원작의 에버노드였다. 그들은 일로이가 패퇴했기에 시한부의 수성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겠지.
“재앙을 직접 마주하면 어떤 기분이 들더냐.”
순수한 궁금증에서 비롯한 질문인 듯했다. 이번에는 게오르그가 입을 열었다.
“무력감, 좌절….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제 마음을 지배했던 건,”
게오르그의 목소리는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차가워지는 듯했다.
“공포였습니다.”
그건, 단순한 좌절감 따위가 아니다. 몸 가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는 거부감.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의 외침. 누구도 폭발하는 화산에 맞서려 하지 않고, 다가오는 해일과 태풍을 물리치려 하지 않는다며, 게오르그는 말했다.
“그들이 재앙이라고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맞설 수 없지만 불가피한 존재. 그렇기에 재앙.
“공포.”
퀘노어 대공은 게오르그의 말을 되뇌며 자신의 검자루를 잡았다. 원작에서 대공은 몇 번이나 직접 거인과 그 군세에 맞서 그 진군을 늦추었다고 한다. 홀로 재앙을 맞아 그 진군을 늦출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 명이나 존재할까.
그리고, 퀘노어 대공은 결국 목숨을 불살라 아르옌과 함께 재앙을 쓰러트리기 직전의 상태까지 몰아붙인다. 대공이 길을 열어주었고, 아르옌이 거인의 목을 베었다.
“오랜만에 심상 수련이나 해야겠군.”
그리 말하는 대공의 눈이 깊었다. 한밤에 쏟아지는 햇살에, 푸른 눈이 호수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죽음을 읽어내지 않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대답을 들려주어 고맙네, 일로이, 게오르그. 오늘은 들어가서 쉬어도 좋아.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대 거인전 준비를 시작할 테니.”
“예, 대공님.”
나와 게오르그는 함께 착잡한 심정이 되어 회의실을 나섰다.
“한 번 재앙과의 전투를 치르고 나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줄 알았는데, 막상 다음 재앙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하군.”
게오르그는 복도에 멈춰 서서 말했다.
“…너는, 그때 네가 내린 결단을 증명하려 애쓰는 것이겠지.”
게오르그는 그 말만을 내뱉고서는 찡그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결단이라 하면, 크라켄과의 전투에서 일로이와 아르옌 사이에 빚어졌던 갈등을 말하는 건가.
“나는, 이제 온전히 너를 신뢰하고 있다, 일로이. 그때와는 달라.”
“…낯간지럽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게오르그는 쓴웃음을 짓더니 천천히 내게서 멀어져갔다. 나는 게오르그가 먼저 복도를 나서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복도의 끝에서 나는 의외의 인물과 마주치게 되었다.
“일로이.”
머쓱하게 웃는 표정의 다프네와,
“…용사님.”
엉엉 울기라도 했는지, 촉촉하고 새빨갛게 변해버린 눈의 철혈공주.
카린은 다프네의 손을 꼭 붙잡고 서 있었다.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고 카린과 다프네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일로이와 대공님을 봐야겠다고, 나가려다 저택에서 몇 번이나 붙잡힌 모양이에요. 마침 근처에 제가 있어서 회의가 끝날 때까지만 기다리자고 말씀드리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어요.”
훌쩍.
카린이 코를 먹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며 돌아다니니 불안할 만도 하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무릎을 구부려 카린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눈물로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주자, 카린이 조금 진정한 듯 숨소리가 고르게 바뀌었다.
“대공님은 수련을 위해 잠깐 방에 계실 테니, 그전까지 저랑 다프네와 산책이나 할까요?”
카린은 말로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카린을 이끌고 저택 뒤편의 후원으로 나섰다. 스트로프가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린은 그 소음이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계속 눈을 흘긋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날 거래요.”
후원을 걷던 와중, 카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와 다프네가 조금 놀란 눈으로 카린을 바라보았다. 카린은 그저 놀라서 이렇게 울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
“저기, 성벽 너머에서 무서운 마물이 잔뜩 내려올 거라 했어요. 그래서 우리 성의 사람들이 그 괴물들과 싸우러 가야 한다고. 그리고 나는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고.”
카린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어떡하죠, 용사님. 리스랑, 세린이랑, 헤밀이랑. 아버지랑….”
카린은 평소 친분이 있던 기사의 이름을 하나씩 말하다가, 다시 울상이 되어버렸다. 다프네는 다시 훌쩍이기 시작한 카린을 안아주었고, 카린은 다프네의 품에 안겨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가만히 카린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무릎을 구부렸다.
“…괜찮아요.”
카린은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어도,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리스도, 세린도, 헤밀도, 그리고 대공님도 전부 강한 사람들이니까, 마물을 물리치고 다시 에버노드에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강하다’라는 말로는 이 똑똑한 아이를 납득시킬 수는 없는 듯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죽는대요.”
그리고, 이 아이는 전쟁이라는 걸 활자로나마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야 나는 어째서 이 아이가 나를 찾으려 했는지를 알 것 같았다. 나는 카린의 손을 꾹 쥐며 낮게 말했다.
“카린.”
카린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만큼은, 나는 빙의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로 했다. 그저 울고 있는 이 아이를 위해, 하나의 약속을 하려 한다.
“제가 지킬게요.”
카린이 눈을 깜박였다. 그 눈에서 뚝뚝 흐르던 눈물이 멎으려는 기색이 보였다.
“리스도, 세린도, 헤밀도, 대공님도. 모두.”
카린의 초록색 눈이 내 시야 너머에서 빛을 되찾은 듯했다.
“용사님이…?”
“네.”
그래. 일로이가 원작에서 뭐가 어떻게 되었든, 용사니까. 그리고, 이 몸에 들어와 버린 나 역시, 용사로 살아나가야 하니까.
언젠가, ‘내’가 아닌 ‘누군가’가 들었던 말이 문득 머릿속에 떠올랐다.
“용사란 사람을 지키는 존재니까요.”
나는 다시 카린의 눈물진 눈을 닦아 주었다.
“약속할 거예요…?”
카린의 물음에,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카린의 작은 손가락이, 내 손가락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