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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41화 (42/158)

Chapter 41 - 41. 전초전 (3)

“…또 기절한 건가.”

이제는 침실보다도 익숙해진 창고에서, 나는 눈을 떴다. 언제나 그랬듯 바닥에는 가시 면류관이 나뒹굴고 있었고, 암막 사이로는 아침의 새하얀 빛으로 바뀐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맥이 빠진 손으로 조심스럽게 면류관을 주워 들어 목함에 넣었다.

“[몸은 괜찮은 게냐? 그 기둥에 묶여서 밤새는 모습은 처음이다.]”

나는 밧줄을 능숙하게 풀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안 괜찮아. 몸이 기둥에 묶인 채로 자니까 몸이 너무 뻐근해. 오늘은 좀 스트레칭도 하고, 정자세로 잠을 자야 할 거 같은데.”

굽혔던 무릎을 펴고, 몸을 이리저리 뒤틀자 뼈마디가 뚜두둑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뭐, 마나 좀 돌리고 성검을 차고 연병장 몇 바퀴만 돌면 나아지긴 했지만. 성검이 내 신체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몸을 죽이지는 말거라. 그 선이 어디인지는 일로이 네가 잘 알고 있겠지.]”

“…응. 고마워.”

나는 몸에 어느 정도 활력을 불어넣은 후 창고의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쓰러져 잤는데도 몸은 정확히 다섯 시에 기상했다는 점이 징그러웠다. 이게 그 습관의 힘이라는 건가.

나는 밧줄을 정리하고서는 목함을 들고 창고를 나섰다. 아직 사람들이 일어나 활동할 시간은 아니었던지라, 꼭두새벽부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에버노드 전체는 완전히 고요함에 잠겨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목함을 들고는 조심스럽게 용사 파티가 머무르는 별채로 향했다. 나만큼이나 일찍 일어나는 게오르그가 별채 근처 운동장을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지런한 놈.

별채 안으로 들어가자, 나는 가만히 앉아 묵상에 잠긴 듯한 모습의 마리안느를 볼 수 있었다. 마리안느 역시 내 기척을 느꼈는지,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나를 보았다. 나는 마리안느의 시선이 완전히 나를 포착하기 전, 목함을 탁자 하나에 올려다 놓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일어나 있었네?”

“예. 눈이 일찍 떠져서. 다시 잠들기는 애매한 시각이었기에 잠시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안느는 언제나 같은 표정이었다. 이따금 정말 놀랄 때 바뀌는 표정이 아니라면, 늘 무표정이라는 뜻이다. 그 사실이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나는 시간을 두고 그녀를 더 지켜보기로 마음을 먹었기에 구태여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용사님께서는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일로이라고 부르래도, 마리안느는 여전히 나를 용사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건 그녀 나름의 고집인가 싶었다.

“나는 원래 이 시간쯤에 일어나. 방금은 잠시 산책 갔다 오는 길. 밖에 게오르그는 한창 뛰고 있던데, 봤어?”

“예. 제게 용사님은 어디 갔느냐고 물어보셔서, 저도 못 봤다고 답해드렸습니다.”

“…그러냐. 나중에 게오르그한테도 말해줘야겠네.”

나는 마리안느의 맞은편에 앉아 길게 몸을 늘어뜨렸다. 아직 순찰에 나설 때까지는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잠시 여기서 죽치다가 씻으러 가든가 해야겠다.

“차를 내올까요?”

마리안느가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차는 원래 다프네 담당인데. 나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자던 사이 몸에 스며든 냉기를 해소하고 싶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는 내 허락이 떨어지자 바지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간소한 부엌이 마련된 곳으로 걸어갔다.

“[생각보다 여유가 넘치는구나.]”

성검이 뾰족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밤새 고생했는데, 이 정도는 봐주라. 잠시 성검과 그렇게 속으로 잡담을 나누자니, 마리안느가 금세 김이 솟아오르는 따뜻한 차와 비스킷을 들고 돌아왔다.

“고마워.”

“제 일입니다.”

마리안느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는 앉던 자리에 앉아 두 손으로 컵을 감싸 쥐었다. 나는 가만히 차를 홀짝거리다가, 문득 마리안느를 보고는 물었다.

“긴장되거나, 두렵지는 않아?”

마리안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긴장되고, 두려워야 하는지 물어보는 것 같았다.

“전쟁. 다가올 네 번째 재앙이.”

“저는 청교회의 신자입니다. 본 적 없는 신의 적을 두려워할 수는 없습니다.”

마리안느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그저 용사님을 따라 적을 물리칠 뿐입니다.”

“…나를 신뢰하냐?”

“그저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말했다. 그 망설임 없는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리안느는 내 웃음을 무표정으로 바라보며 나와 함께 차를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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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찰 조를 증대하겠다.”

퀘노어 대공은 이번 순찰을 나서기에 앞서 그리 선언했다. 최대한 넓은 범위를 할 수 있는 한 가장 꼼꼼히 둘러보려는 의도인 듯하다.

“기존 3개 순찰대에서 5개로 증대. 각 순찰대의 간격을 좁히고 중간지대를 두어 긴밀히 서로의 안전 여부를 점검하도록 한다. …그리고,”

대공은 우리 파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일로이, 자네 파티를 한데 묶어두지 않고 각 순찰대에 하나씩 포함하려 하는데, 괜찮겠나.”

전력을 한데 집중하기보다는, 각 순찰대에 골고루 나누어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려는 건가. 나는 게오르그를 돌아보며 의견을 물으려 했다.

“…웬일로 이런 일에 내 의견을 물어보는군.”

게오르그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닥였다.

“나는 찬성이다. 충분히 순찰 경험이 쌓인 지금, 우리가 한데 모여 있을 이유가 없어. 차라리 순찰대에 한 명씩 배정해 평균 전력을 증대하는 게 나을 거다.”

퀘노어 대공은 구개를 주억대고는 인원을 배분했다. 대공 자신이 1번 순찰대, 내가 2번, 게오르그, 마리안느, 다프네가 순서대로 3, 4, 5번 순찰대에 배정되었다.

“이번 순찰은 비단 구역의 위험 요소를 확인하는 것만이 아닌, 수성전에 있어 마물들이 어떻게 전선을 형성하고 올지, 취약 구역은 어디인지를 점검하는 목적 또한 지닌다.”

퀘노어 대공의 말에 실린 힘은, 기사와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마력이라도 지닌 것 같았다. 별 말을 하지도 않고 그저 담담하게 작전 개요를 설명하고 있을 뿐인데, 병사들의 집중력과 기세가 눈에 띄게 상승하고 있었다. 아니면 그가 함께한다는 사실 자체가 영향을 끼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나 또한 대공의 말에 조금씩 고양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오늘부로 에버노드는 전시 체제에 돌입한다. 전 성벽에 병력을 증원하고, 장비 물자 점검, 보수를 실시한다.”

퀘노어 대공은 그리 선언하고는 요즘따라 많이 바라보는 외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성문이 덜컹거리며 들어 올려졌다. 지금은 저 밖에서 몰려오는 한기에, 에버노드 병사들의 기세가 밀리지 않았다.

“자, 가자. 오늘의 순찰은 순찰이되 정찰이며, 정보전의 시작이다.”

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길을 갈라 떨어지는 우리 파티들을 바라보다가, 고삐를 강하게 쥐고 말을 앞으로 몰아 나왔다. 오늘은 나 홀로 2번 순찰대의 병사들을 이끌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은 게 있다면, 지체하지 말고 알려주세요. 평소보다 진군 속도를 느리게 하겠습니다.”

“뭐든지 용사님이 하고 싶으신 대로 해주십쇼!”

“아무리 요새 용사님이 잘하셔도 그렇지, 우리 모두 용사님 보조를 맞출 정도는 됩니다!”

자신만만하고 씩씩하게 외치는 북부의 병사들. 나는 그들을 향해 피식 웃어주고는 가볍게 말의 옆구리를 찔렀다.

순찰대는 평소와는 다르게 움직였다. 그저 감으로만 알던 지형을 자세히 살피고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기록했다. 숲은 평소와 같이 조용하지 않고 소란스러웠다. 한 번에 많은 순찰대가 숲에 투입되어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손님이 우리뿐만인 건 아닌 듯했다.

“전방에 레이븐 포착. 정신사납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2시 방향 40보 지점에 트롤 포착. 가서 빠르게 해치우고 오겠습니다.”

“11시 방향. 흰늑대 무리. 수가 꽤 많으니, 아예 진로를 틀어 토벌하는 방향으로 합시다.”

마물이 많았다. 꽤 많았다. 내 강화된 감각이 쉴새없이 마물들을 포착해내고 있었다. 일일이 마물을 쓰러트리러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마물의 위치만을 대략 파악하고, 순찰대의 진로와 겹치는 마물만을 토벌하며 ‘북부의 눈’으로 나아갔다.

“…최근 들어 마물이 많이 나타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걸까요.”

기사 하나가 내게 물었다. 나는 발치에 목이 잘린 채 쓰러진 흰늑대 무리의 우두머리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한계선이 아주 가까워졌다는 말이거나, 아니면 저 마물들도 우리처럼, 전초전을 위해 병력을 보냈거나. 함부로 확인하기 전에는 추측할 수 없겠지만요.”

내 말에, 기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느 쪽이든 경계해야겠군요. 어쩌면 호수가 얼어붙기 시작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떡할까요?”

“조금 속도를 내겠습니다. 만일 한계선이 생각보다 가까이 다가왔을 경우, 지금 우리는 생각보다 위험한 상황에 빠진 것일 수도 있어요. 다른 순찰대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처럼 빠르게 호수로 향할 테니, 서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나는 다시 뒤꿈치로 말의 옆구리를 찔렀다. 말은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투레질을 하다 내 재촉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썩 느낌이 좋지는 않구나. 바짝 경계하고 있어라.]”

내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은 조용히 있던 편인 성검마저 그리 말했다. 나는 미리 조금씩 심장에서 마나를 뽑아내며 돌리기 시작했다. 숲의 끝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길을 가로막는 마수들을 거의 썰어내다시피 물리치며 서둘렀다. 한기가 강해진다. 아직 호수가 보이지도 않는데 입에서 입김이 나오기 시작했다.

“…용사님.”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속도를 더 높였다. 숲이 가로막는 빛과 시야가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수목을 지나보낸 나는, 북부의 눈에 도착하자마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젠장.”

푸른 호수는 얼어붙었다. 구태여 나아가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새하얗게 빙판이 낀 수면 위로 얼어붙으며 생긴 금이 쩍쩍 가 있었다. 나는 호수에서부터 시선을 끌어올려 반대편의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코앞이군요.”

기사의 목소리가 굳어있었다. 그의 말 그대로, 한계선은 이미 산을 넘어와 호수의 앞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하늘이 희뿌옇다. 산의 몸체는 전부 눈으로 뒤덮여 새하얗게 변해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 국경처럼 단호하게 그어진 새하얀 장막 너머에 도사리는 끔찍한 존재들을. 그리고 그 끔찍한 존재들의 너머에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끔찍하리만큼 거대한 존재를.

“…여기 순찰대가 집합하면, 따로 떨어져 가지 않고 모여서 가야만 합니다.”

나는 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계선이 대공과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접근해오고 있었다. 제발, 무사히 이 호수까지 다다라야 할 텐데. 내가 이를 부드득 갈고 있던 차에, 수풀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나타났다.

“…망할.”

일단, 인간으로 보이는 생물체는 아니었다. 그리고, 평범한 마물 또한 아니었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건, 빌어먹을 정도로 거대한 흰늑대 한 마리였다. 마물을 많이 풀어놓은 게, 설마 내 감각을 흐트러뜨리기 위해서였나.

“알아서 늑대의 아가리에 걸어 들어온 가여운 인간들아.”

늑대는 으르릉거리며, 그리 ‘말했다.’

“그분의 위대한 걸음에 앞서 너희들의 피로 식전주(食前酒)를 담그겠노라.”

늑대의 등 뒤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흰늑대들이, 수십 마리의 흰늑대들이 한 마리씩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이를 꽉 악물며 성검을 뽑아 들었다. 내 등 뒤의 기사와 병사들 역시 하나씩 검을 뽑아 들었다.

“…로이. 신호탄을.”

내 말에 기사, 로이는 신호탄을 꺼내들다가, 이내 얼어붙고 말았다. 나 또한, 로이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가 침음성을 흘렸다.

휘이잉.

펑. 펑. 펑.

여름의 깨끗한 하늘 위로,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탄이 동시에 쏘아 올려지고 있었다.

“희망은 버려라. 칼을 내려놓아라.”

늑대는 신호탄이 터지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말했다.

“얌전히, 우리의 제물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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