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4 - 44. 다가오는 (1)
마물은 끈질겼다.
퀘노어 대공의 검은 한 번 번득일 때마다 무수한 흰늑대들을 베어버렸지만, 그 잡졸들과 더불어 대공을 막아서는 군단장 - 늑대인간은 나름 대공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흰늑대들은 쓰러지면 또 어디선가 튀어나왔고, 퀘노어의 마음은 그럴 때마다 초조해져만 갔다.
“빌어먹을 금수 새끼들이.”
퀘노어가 날카롭게 검을 가르며 중얼거렸다. 늑대인간, ‘구트’는 교활하게 웃으며 손톱을 검처럼 휘둘러 퀘노어의 검격을 막아냈다. 확실히, 자신을 거인의 수하이자 마물의 군단장이라고 칭할 정도의 강함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강함만을 맹신하지 않았다.
“그래, 예상대로 강하군. 하지만 그건 네놈도 느끼고 있을 테지?”
말 그대로의 발 묶기.
퀘노어의 힘을 낭비하게 하며 다른 순찰대를 구하러 가지 못하게끔 하는 전략. 놈은 결코 깊이 공격하러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버티는 것만을 목적으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고, 최대한 방어적인 기세를 취한다.
물론, 이 형세가 계속된다면 퀘노어가 구트의 목을 베어버릴 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까지 다른 순찰대가 버틸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 되려, 그들이 당하고 다른 마물들이 구트에게 합세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
“시간이 지날수록 유리해지는 건 우리다, 인간.”
구트는 그리 말하며 이빨을 드러냈다. 더 전력을 온존할 때가 아니었다. 퀘노어는 마나를 더욱 끌어올리며 오러를 피워 올렸다. 퀘노어의 신형이 흐릿해지고, 군단장과 충돌했다. 구트는 예상보다 훨씬 강한 퀘노어의 힘에 당황하며 맞섰다. 퀘노어의 검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빠지기는커녕 더욱 날카롭고 빨라지는 듯했다.
‘이놈…. 괴물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자신의 승리였다. 봐라, 지금도 그의 예민한 귀는 숲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학살의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 감미로운, 인간들의 비명을….
캥. 깨갱. 케에엑.
어?
구트의 눈이 당혹감에 흔들렸다. 아니, 잘못 들은 건가. 어째서, 어째서 늑대들의 단말마만이 들려오는 거지? 구트는 간신히 퀘노어의 다음 일격을 튕겨내고는 모든 감각을 숲 깊은 곳으로 집중했다.
빛. 검을 휘두르는 소리. 두려운 냄새.
“말도 안….”
콰직.
그 광경에, 멍해져 있던 구트의 몸에 퀘노어의 일격이 내리꽂혔다. 퀘노어는 몸이 깊게 베이며 앞으로 쓰러지는 늑대인간의 머리통을 짓밟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해냈군, 용사 일로이.”
퀘노어의 눈은 구트가 응시하던 곳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빛이 번득이고 있었다. 새하얀, 그리고 은색으로 빛나는 오러. 숲 전체를 잠식하고 있던 불길한 마물의 기척이 저 빛으로 점점 지워지고 있다. 그건 희망이었고, 불씨를 지피는 바람이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그딴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퀘노어는 발아래에서 발버둥을 치는 구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는 구트에게, 퀘노어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세상에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다.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퀘노어의 오러가 구트의 머리를 꿰뚫었다. 빛은 점점 강렬해지며 퀘노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퀘노어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양손에 검을 들고 있는 용사를 마주했다.
“2번, 3번, 4번, 5번 순찰대, 도착했습니다.”
퀘노어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큰 목소리로 선언했다.
“순찰대 전원! 에버노드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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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천만다행히도, 나는 너무 늦지 않게 3번, 4번, 5번 순찰대를 구조해낼 수 있었다. 나와 1번 순찰대는 노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한 마리 고래처럼 마물들을 휘저으며 숲을 헤집고 다녔고, 모든 순찰대를 규합했다.
퀘노어 대공은 내가 모든 순찰대를 구조해냈을 때 5번 순찰대가 있는 장소에 다다랐고, 우리는 그렇게 첫 전투를 힘겹게 마치고 에버노드로 복귀할 수 있었다. 나는 끝까지 정신을 다잡으며 외성 성문이 닫히고 병사들이 무사히 돌아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 나는,
‘일로이?’
‘용사님!’
음. 그들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눈앞이 깜깜해지고 나서는 기억이 없다. 그대로 기절했나보다. 그리고 다시 깨어난 게 지금. 나는 어둑하게 암막이 쳐진 낯선 방에서 눈을 떴다. 꽤 오래 수면하고 있었던 게 확실한데도 몸에 고통이 여기저기 남아있었다. 아무리 성검이 준 회복 능력이라도 빠르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듯했다.
“[당연하지. 온 몸의 혈관과 근육을 찢고 터뜨릴 기세로 혹사했으니까 말이야. 실제로 찢어지고 터졌어. 그 와중에 심장이 터지지 않았다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일로이. 위험해도 너무 위험한 시도였다. 네가 몸으로 감당할 수 있었던 건 천운이다.]”
깨어나자마자 잔소리를 하는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은 퉁명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내겐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손을 더듬어 성검의 검집을 잡고는 미소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안심되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에?”
“응?”
나는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몸을 슬쩍 일으켜 침대 왼편을 바라보았다. 깜박깜박. 아차. 침대의 끝쪽, 내 다리가 있는 쪽에, 내 침대에 엎드려 자다가 일어난 다프네와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 3초 정도의 정적이 흘렀고, 나는 방이 어두운 와중에도 점차 빨갛게 달아오르는 다프네의 얼굴을 아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다프네의 입술과 눈동자가 형언할 수 없는 모양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에. 저기.”
어쩌지. 쟤 고장 난 거 같은데.
“[네가 알아서 고쳐라.]”
성검은 그리고서는 다시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난감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며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다프네는 그렇게 한동안 얼어붙어 있다가, 서서히 정신을 차리며 내게서 눈을 돌리고는 침대 시트를 바라보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꼬았다.
“일로이가 쓰러지고 하루 지났어요.”
다프네는 내가 시간이 얼마나 흘렀냐 물어보기도 전에 대답을 들려주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 창문의 암막을 슬쩍 들추자, 빛이 눈을 찌르며 들어왔다. 그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쩐지, 거리가 조금 비어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적은 거 같네.”
“피난이 시작됐어요. 루크씨가 앞서서 피난민들을 인솔하고, 기사단 하나를 따로 할애해서 모험가 길드와 함께 사람들을 호위한다고 해요.”
그리 말해주는 다프네의 볼은 여전히 붉었다.
“한계선은 호수 앞에서 멈췄다고 해요. 마물들이 아마 호수를 전초기지로 삼아 침공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기 순찰은 멈췄고, 이제 전쟁의 준비에 총력을 다한다고 해요. 언제 마물들이 침공을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다고, 대공께서 말씀했어요.”
아, 그리고 일로이가 깨어나면 알려달라고도 했는데.
다프네는 그리 말하며 다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프네가 정신을 회복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었다가, 질문을 던졌다.
“게오르그랑 마리안느는 괜찮지?”
“네. 가벼운 부상을 입긴 했지만, 활동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는 듯해요. 두 사람 모두 에버노드의 기사들과 함께 방어전, 공략전을 준비하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주억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프네의 손에 저지당했다. 다프네는 내 가슴을 가볍게 누르며 다시 침대 위로 나를 뉘었다. 다프네의 얼굴이 가까웠다. 그녀의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내 뺨을 간지럽혔다.
“누워 계세요. 아직 전쟁은 시작하지 않았으니, 그때까지 완전히 회복하는 것만 생각해요.”
다프네의 숨이 와 닿았다. 코가 코끼리 부딪칠 것처럼 가까웠다. 내가 눈을 돌리자,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친 다프네는 오이를 본 고양이처럼 퍼뜩 몸을 일으켰다. 나는 쓴웃음을 내뱉으며 다시 배개에 뒤통수를 붙였다.
“다른 돌아온 사람들은 괜찮아?”
“…네.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무사해요. 부상이 심한 사람들은 아래층의 병동에서 치료받는 중이에요. 그 외의 기사들은 지금 모두 복귀한 상태고요.”
그렇구나.
당연하지만, 무사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겠지. 가슴 한구석이 또 무거워졌다. 다프네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는 퀘노어 대공을 부르러 가볼게요. 일로이가 깨어나면 불러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나는 방에서 나가는 다프네의 뒷모습을 눈으로 배웅했다. 문이 닫히고 나자,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팔다리를 늘어뜨렸다. 안다. 내가 정말 신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전쟁에서 모든 이들을 구해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들의 죽음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고, 내가 그들의 죽음에 무너져 내려서도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허접하고, 약하구나. 네놈도 내가 잡아먹었던 다른 모든 기사와 다를 게 없어.’
‘지금의 네게 있는 건 고작 그 괴상하고 불길한 하얀 빛뿐이군.’
대장 흰늑대, 로보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내가 더 빨리 그놈들을 해치웠더라면.”
“[조금은 더 구할 수 있었겠지.]”
성검이 내 말을 받았다. 어설픈 위로가 아니라 오히려 좋았다. 나는 성검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네 2단계를 열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을 거다.]”
무언가, 성검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잊으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무너져도 된다고도 하지 않겠다. 다만, 그날 목숨을 바친 이들의 희생이 결국 이 땅과 사람들을 구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조금의 보답이 될 수는 있을 거다.]”
성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했다. 성검의 검자루를 거머쥔 내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강해지거라, 일로이. 언젠가 네가 철혈공주에게 말했듯 말이야.]”
나는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국 내가 강해져야 한다. 원작에서 이루지 못한 몇몇의 구원을 이루고,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때, 병실의 문이 열렸다. 나는 성검을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켜 열리는 문을 보았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퀘노어 대공이었다. 나는 대공을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고, 대공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내 인사를 받아주었다.
“몸 상태는 좀 어떤가, 일로이?”
대공은 병실의 문을 닫고는 걸어와 간병인 의자에 앉았다. 대공의 푸른 눈은 어느 때보다도 차분했고, 묵중한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여기저기 쑤시네요. 그래도 이렇게 가만히 누워있어야만 할 정도로 아픈 건 아닙니다.”
내가 은근히 병실에서 좀 내보내 달라는 눈치를 주었지만, 대공은 일부러 알아차리지 못한 척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무리하지는 말게. 그냥 가만히 병실에 누워있는 게 지금 우리를 최대한 도와주는 걸세.”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말을 들을 줄은. 내가 눈살을 확 찌푸리자, 퀘노어 대공이 껄껄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괜히 지금 이곳저곳 다친 용사를 전선에 내보냈다가는, 병사들이 자네를 신경 쓰느라 제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괜히 암막을 걷어내며 햇볕을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암막에서 먼지가 폴폴 날리며 햇빛 사이로 산란했다.
“상황은 다프네에게 얼추 전해 들었습니다. 마물들이 전초기지를 형성하고 있다고 하던데.”
“그래. 우리도 그에 맞춰 수성전을 준비하고 있지. 자네 동료들이 제법 큰 도움이 되고 있어. 게오르그는 풍부한 전장에서의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고 있고, 마리안느는 전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대신 성직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있다네.”
퀘노어 대공이 창밖으로 눈을 돌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프네는 에버노드의 마법사들과 함께 활발히 회의를 진행하고 있네. 실전에서도 위력적인 마법사지만, 이론가로서도 학자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군.”
마탑에서 이론서만 계속 통달했다고 하던가. 잊고 싶을 과거의 경험들이 이렇게 도움이 되리라고는 다프네 그녀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는 게 늦었군.”
대공이 진지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내 발이 묶여있던 동안 마물의 떼를 뚫고 나머지 순찰대를 모두 구조했잖나.”
“누구라도 그리했을 겁니다. 대공께 감사를 받을 정도의 일은 아닙니다.”
“그걸 해낸 것과는 또 천지 차이지. 네 번째 재앙의 군세 역시 그때 큰 타격을 받았을 걸세. 군단장이라 불리는 마물 하나와 이름이 있는 마물 여럿을 잃었으니 말이야. 이번 전쟁에 있어 아주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어.”
내 표정이 흐릿해졌다. 대공은 의문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강해지기 위한 계기. 나는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대공.”
“왜 그러나?”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대공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와 대련을 해주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