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45화 (46/158)

Chapter 45 - 45. 다가오는 (2)

이틀 후의 아침, 기사단의 연병장.

아직 부상은 남아있었지만,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는 수준까지 치유되었다. 나는 손목과 어깨를 휙휙 돌리며 몸을 예열했다.

“내가 부상 중에 그렇게 무리하지 말라 했는데도.”

퀘노어 대공은 검을 한 손으로 그러쥐며 한숨을 내쉬었다. 날을 죽인 대련용 검이었다. 나는 진검으로 상대해달라 부탁했지만, 대공은 진검으로 대련할 거라면 절대로 대련하지 않겠다며 버티고 서서 어쩔 수 없이 날을 죽인 검으로 바꾸었다. 나 역시 성검을 내려놓고는 대련용 검을 들고 대공과 마주보고 섰다.

“자네가 무언가를 얻어가리라는 보장은 없네. 내가 자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무언가가 더 필요합니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그리 말했다. 대공은 알고 있다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오게나. 이왕 자네와 대련하기로 한 거, 허투루 하지는 않을 테니.”

대공은 그리고서는 기세를 바꾸었다. 함께 마물과 싸울 때 으레 보이던, 전투 시의 태세였다. 그렇게 기세를 바꾼 것만으로 약한 바람이 불어 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아군이었을 때는 그보다 든든한 게 없었는데, 상대로 마주하니 칼을 맨살에 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언제 베여도, 잘려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기세.

“최선을 다해 상대해주도록 하지. 자네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말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바로 신형을 날렸다. 베기가 아닌 찌르기.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으로. 하지만 내 칼끝을 따라 정확히 시선을 옮기던 대공의 대응은 기민했다.

키이이잉-!!

검면이 검날을 쓸며 쇠가 긁히는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자루 끝으로 내 검면을 밀어내고 안쪽으로 좁혀 들어오는 참격을 날렸다. 나는 대공이 밀어내는 힘을 추진력 삼아 뒤로 뛰어오르며 검격을 흘렸다. 허공에서 착지하며 균형을 잡는 건 익숙했다.

“첫 일격에 끝나지는 않았군.”

대공은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첫 일격에 끝낼 생각이었나 봅니다.”

“자네를 무시한 건 아니라네. 자네가 뛰어난 덕분이지. 나는 다음 공격도, 다다음 공격도 일격에 자네를 쓰러트릴 생각으로 휘두를 걸세.”

대공은 그리고서 순식간에 내게 육박했다. 나는 대공이 휘두르는 일검에 마주 검을 휘두르며 대응했다. 검날에서부터 전해지는 충격은 저게 정녕 사람이 휘두르는 검이 맞나,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검을 놓칠 수는 없었다. 자세를 흐트러뜨릴 수도 없었다. 방어만 하면 내가 먼저 부서진다. 공세로 전환하면 잡아먹힌다.

“큭-!”

나는 방어적인 태세로 온전히 공격을 막아내며 기회를 노리지도, 맞불을 놓으며 맞서지도 못한 채 대공의 검을 상대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대공의 검끝이 내 목을 겨누었다.

“…다시 해보아도 되겠습니까.”

내 말에 대공은 말없이 검을 거두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다시 검은 격돌한다. 두 번째로 경합을 벌일 때는 더 오래 버틸 수 있었다. 세 번째까지도. 하지만 네 번째 대련부터는 대공이 나를 꺾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대공의 검에 적응할 수 없었지만, 대공은 내 검에 점차 적응해갔다.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검로는 제한적이었고, 대공은 무수히 많은 변화로서 그 제한적인 검로에 대응했다.

콰당.

내가 열 번째로 땅에 나동그라지고 나서, 대공은 대련용 검을 땅에 꽂아 넣은 채 짧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흙먼지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할. 붙다 보면 어떻게 저 검에 대응할 방법이 생각날 줄 알았는데, 저 아저씨의 검은 달라도 뭔가 달랐다. 대공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서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나?”

나는 거칠게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자네를 그렇게까지 싸우게 하는 건가.”

그답지 않게, 내게 이유를 물어보는 대공의 목소리에는 주저가 묻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검을 늘어뜨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유는 없습니다. 굳이 찾고 싶지도 않고요.”

살기 위해 용사 같이 행동해야 한다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곳에 다다르기 전에는 그리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쓰게 웃으며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여름의 훈풍이 불어오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장의 서늘한 바람이 분다. 성벽으로 올라가 멀리 내다보면, 에버노드에서도 한계선의 흐린 구름들을 볼 수 있었다.

“적어도 에버노드에 있어서는 손해가 아니지 않습니까.”

길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나는 대공에게 에둘러 말해주었다. 퀘노어 대공은 팔짱을 끼더니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강해지고 싶어서 대련을 신청했다면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나.”

대공의 말대로, 물론 대련은 어디까지나 대안일 뿐이었다. 가장 좋은 건 그냥 대공에게 검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는 것이겠지만, 아무리 나라고 해도, 분명히 거절당할…

“차라리 자네에게 검을 알려주겠네. 너무 늦게 결심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자네를 훨씬 강하게 만들어주겠지.”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그 반면, 퀘노어 대공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자네가 찾아 헤매고 있던 깨달음을 확실하게 체득시켜줄 마지막 열쇠가 되어줄지도 모르고. 꼭 무언가를 찾는 사람의 검 같더군.”

아니, 이 아저씨 내가 그런 걸 찾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대. 내가 황당함과 놀라움에 대공을 쳐다보자, 대공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힘차게 검을 뽑아 올렸다.

“거절하고 싶다면 거절해도 괜찮네. 강요는 아니야.”

거절은 무슨! 저건 원작 주인공이라도 거절하지 못할 거다. 나는 고개를 재빠르게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성검의 지도도 좋았지만, 직접 검을 맞대가며 가르침을 받는 것과는 아무래도 효과에서 차이가 클 거다.

“아뇨.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퀘노어 대공은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갑자기 대련용 검으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자세를 잡아주었다. 나는 입에서 볼썽사나운 소리를 내뱉으며 검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자, 그럼 시작해보도록 하지. 진작 이런 방법을 쓸 걸 그랬어. 자네는 부상 중인데 말이야.”

퀘노어 대공이 입꼬리를 비틀며 나를 바라보았다. 망할. 뭔가 잘못 선택한 거 같은데.

“칼을 똑바로 들게. 여태 내가 자네와 대련하며 느꼈던 문제점부터 하나하나 알려줄 수 있도록 할 테니 말이야.”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두려운 눈으로 대공을 보았다. 역시, 사람은 생각부터 조심해야 한다.

==

“여기 화살 보충해라!”

“여름에 싸우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이것들아. 너네는 한 번도 침공받은 적 없지?”

성벽은 분주했다. 에버노드가 자랑하는 웅대한 외성의 성벽 위로 병사들이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 마물들이 밀려 들어올지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짬밥 좀 먹었다는 기사와 병사들은 내려가는 기온으로 전쟁이 머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 놈들이 밀려올지 모른다. 눈 부라리고 있어라.”

비주기적으로, 몇 년에 한 번꼴로 마물들은 에버노드의 성벽을 두드렸다. 그를 겪어본 이들은 이번 침공이 지난 침공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년 전의 대침공이 그나마 비슷한 정도일까. 기사들은 긴장한 채 한 시도 한계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마물들에게 쏟아부을 마법을 연구한다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틀 밤을 꼬박 세어가며 마법사들을 지도한 다프네는 눈 밑이 퀭해진 채로 성벽을 뛰어다니는 게오르그와 마주쳤다.

“상황 어때요?”

“날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 한계선이 굉장히 가까워졌어. 이미 순찰대가 가던 숲은 장막에 덮여 보이지도 않는다. 오늘, 늦으면 내일 중 전쟁이 시작될 거야.”

다프네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로이가 함께 있었더라면 정말 좋았겠지만, 부상에서 완쾌할 때까지는 성벽에 코빼기도 비치지 말라는 게 대공의 명령이었다. 그녀 또한 일로이가 불안불안하게 다친 몸으로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건강하게 돌아오는 게 훨씬 편했고.

“마리안느는 돌아왔나요?”

“그래. 어제부터 대기 중이라고 하더군. 일로이가 복귀하게 되면 우리 넷이 함께 움직이게 될 테지. 일로이가 완전히 회복하기 전에 전쟁이 시작된다면-.”

쿠구구궁.

“…우리가 있던 장소에서 싸우면서 일로이를 기다리게 되겠지.”

병사, 기사를 가리지 않고 성벽 위의 사람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땅이 울리고 있었다. 거인이 움직였을 때의 진동과는 달리, 수천, 수만의 마물들이 한꺼번에 달려올 때 일어나는 진동. 다프네는 마른침을 삼키며 성벽 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물이 다가온다!!”

“전원 제자리로! 당황하지 마라! 훈련대로 한다!”

병사들을 다그치는 매서운 퀘노어 대공의 목소리와 함께, 에버노드의 병사들이 창칼을 준비했다. 게오르그는 인상을 찡그리고는 다프네를 보았다.

“나는 있던 곳으로 가겠다. 너도 마법사들과 함께 행동하면 될 거 같군.”

게오르그는 그리고서 등의 방패를 내리고는 어딘가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다프네는 성벽 너머의 광경을 바라보고는 숨을 삼켰다.

나무가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한 채 한 채 쓰러지고 있었다. 나무들을 무너뜨리며 진격해오는 건 마물의 파도였다. 잿빛곰과 같은 덩치가 큰 마물들이 앞장섰고, 비교적 덩치가 작은 마물들이 그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성벽 아래에 있는 애들 전부 올려보내! 마법사들은 포격 준비하고!”

성벽 곳곳에서 마법사들이 마법을 준비하며 발하는 빛이 번쩍거렸다. 다프네 역시 마력을 끌어올리며 마물을 쓸어버릴 마법을 구동시켰다. 마물의 선봉이 숲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퀘노어 대공이 고함을 내질렀다.

“사격 개시!”

투두두두두.

마법과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앞에서부터 쓰러지는 마물을 뒤에 몰려오는 마물들이 밟고 지나갔다. 짓뭉개지는 마물들의 몸체에서 피와 살이 터지며 쏟아져 내렸다. 진군 속도는 늦춰지기는커녕 숲을 벗어나는 마물이 많아지며 더욱 빨라졌다.

“성벽에 붙을 것 같습니다.”

“떨어트릴 준비. 기사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놈들을 처리하고, 마법사들은 계속해서 본대를 타격한다.”

대공은 검을 뽑아 들었다.

“놈들은 초장에 이곳을 넘어오려 할 거다. 단 한 마리도 이 성벽을 넘어가게 하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마물들이 성벽에 달라붙었다. 몸집이 비대한 마물들이 먼저 성벽 아래로 몸을 들이받았다. 놈들이 마치 발판처럼 기반을 다졌고, 그 위로 마물들이 얹혔다. 마물은 몸을 돌보지 않는다. 덩치 큰 마물들의 벽 위로 마물이 올라서고, 그 마물 위로 또 다른 마물이 올라섰다. 벽 앞으로 고깃덩어리들의 탑이 쌓였다. 마물과 돌 세례가 쏟아져 마물을 죽이면, 그 사체가 다시 발판이 되었다.

“불 마법을 사용해!! 놈들이 사체 위로 달라붙지 못하게 해라!”

마물의 사체 위로 불이 붙었다. 시체의 벽이 무너져내리며 불의 장막을 형성했고, 성벽을 기어 올라오던 마물들은 그대로 성벽 아래로 추락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타죽었다. 하지만-

콰드득.

성벽을 아득바득 붙잡고 기어코 기어오르는 놈들이 있었다. 퀘노어 대공은 성벽에 서서 올라오는 마물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고고한 기세와 존재감에, 마물들이 낮게 울음을 내었다.

“네놈들은 이 땅에 발을 붙일 수 없다.”

대공의 검이 오러를 뿜어냈다. 그대로 성벽 위를 기어 올라오던 마물 수십 마리가 절명했다. 대공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대로 성벽을 종횡무진 ‘걸어 다니며’ 검을 휘둘러 마물을 정리했다. 마물은 오러에 이끌려 퀘노어 대공에게 들러붙었고, 대공의 손짓 한 번에 고깃조각이 되어 피를 흩뿌렸다.

에버노드의 다른 기사와 병사들 역시 검을 뽑아 들고 능숙하게 마물을 찍어 죽이며 성벽 밖으로 떨어트렸다. 성벽에서 떨어지는 마물들은 성벽 아래의 불구덩이에 처박혔다.

“늦었지 않나.”

대공은 태연하게 고개를 돌리며 성벽을 올라온 한 기사를 보았다. 일로이는 마물들을 너무나 노련하게 도륙내는 에버노드의 인력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퀘노어 대공은 그 찡그려진 재수없는 얼굴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일로이는 볼멘소리로 전황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급하게 뛰어왔더니, 이러면 제가 할 게 없지 않습니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