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6 - 46. 다가오는 (3)
부상 중에 팀을 바라보는 축구선수의 기분이 이런 걸까. 수련과 요양만을 반복하며 나는 병동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소음은 어제부터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아마 마물이 침공을 시작하기까지 이젠 정말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을 거다.
“[그게 겨우 며칠이나 됐다고 시간을 죽이니, 마니 하는 소리를 하느냐.]”
성검이 핀잔을 주었다. 뭐,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내가 없어도 마물 떼 정도야 막아낼 역량은 충분하겠지만, 현장에서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게 불만이었다.
“…그래도, 회복 속도가 순조로운 거 같아 다행이야.”
“[다행이지만, 앞으로 당분간 그 쌍검질은 봉인해두거라. 이미 한 번 몸이 엉망이 되었으니, 다시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회복 기간이 필요하다. 다음번에 네가 그 기술을 사용할 때에는 몸이 멀쩡하게 견뎌내리라는 법도 없으니까.]”
성검의 말마따나 내 몸에 부하가 좀 걸리기는 했지만, 쌍검은 확실히 위력적이었다. 두 가지의 힘을 운용하니, 대처하기도 훨씬 까다로울 거다. 성검을 사용할 때 몸에 걸리는 부하를 극복해냈으니 쌍검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성검의 의견은 다른 듯했다.
“[전쟁통에 괜히 쓸데없는 짓 하다가 전장을 이탈하지 말거라.]”
이렇게, 바로 일축당하니 나로서는 뭐라 반발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럴 시간에 그 북부대공이 손봐준 검술이나 열심히 연마하는 게 나을 거다.]”
“그러는 너는, 내게 검식을 가르쳐줄 생각은 없어?”
“[고작 말 몇 마디로 검을 잘 모르는 누군가에게 검을 지도하는 건 불가능하다. 괜히 방해만 될 뿐일 수도 있지. 지금의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 건 기본기와 움직임 정도밖에는 없다.]”
그것도 나한테는 감지덕지라고 생각해야겠지. 덕분에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
“[네가 더 검에 익숙해진다면, 조금씩 알려주도록 하겠다. 먼 옛날의 영웅들이 사용했던, 신화가 되어버린 검식들을 말이다.]”
성검은 나를 달래듯 그리 말했다.
“알았어. 지금은 2단계를 개방하는 거부터 생각해야겠지.”
면류관의 시험에 도전할 시간이 많이 생기는 건 좋았다. 대공과의 수련을 시작한 이후로 점점 시험에 버티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게 긍정적인 신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너는 또 그 수녀의 허벅지 위에서 편하게 잠을 청했겠지.]”
…성검의 말대로, 기둥에 몸을 묶을 상황이 도저히 아니라서, 마리안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부탁한 대로 내가 쓰러질 때 면류관의 가시가 머리에 박히지 않게 도와주었는데, 내가 쓰러질 때마다 무릎베개를 해주어 좀 곤란했다. 그냥 평범하게 베개에 올려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는데, 눈을 떠보면 결국 보이는 건 마리안느의 얼굴이었다. 더 곤란한 건, 그 느낌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성검의 잔소리만 나날이 늘어갔다.
“어쩔 수 없었잖아.”
“[그래도 편안해 보이기는 하더구나.]”
나는 영혼 없는 웃음을 내뱉으며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내일부터는 당장 실전을 치러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으니, 오늘은 그냥 일찍 자야겠다. 아예 새벽 일찍 깨어 성벽에 갈 요령이다. 그렇게 성검을 창틀에 기대어놓고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을 때였다.
쿠구궁.
나는 그 소음이 들려오기가 무섭게 성검을 거머쥐었다. 복장을 갖추자마자 그대로 창문을 열어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얌전히 병동의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오는구나. 네가 거의 다 회복할 때쯤에 시작되는 게 불행 중 다행이로구나.]”
“침대에 처박혀 있던 날도 이제 끝이네.”
병동 밖을 빠져나온 내 옆을 병사와 기사들이 스치며 달려갔다. 아예 말을 타고 달려가는 이들도 있었다. 굳이 외성이 있는 곳을 바라보지 않아도 몰려오는 마물의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쿵. 쿵.
폭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듯했다. 고함과 함성, 창칼이 어지럽게 쏟아지고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벽에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는 더욱 선명해진다.
“…내려라!…”
“…불구덩이로 떨어트려!…”
외침이 간간이 들려오는 성벽에서, 새카만 무언가가 추락했다. 몸이 반으로 잘린 마물이었다. 나는 기세를 늦추지 않고 달려 성벽을 오르는 계단에 도착했다. 올라가는 길목을 지키던 병사가 깜짝 놀란 눈을 하더니 바로 길을 비켜섰다.
계단을 올랐다. 미리 성검을 뽑으며 마나를 돌렸다. 몸이 가벼웠다. 지난 며칠간의 휴식이 몸에 나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계단의 끝에서, 기사 하나를 붙들고 나뒹구는 크롤러 한 마리가 보였다. 나는 곧장 검을 내뻗었고, 입을 벌리고 괴성을 지르던 크롤러의 머리가 잘려 계단 뒤로 굴러떨어졌다.
“감사합니다, 용사님.”
마물의 피로 엉망이 된 기사는 가볍게 고개만을 끄덕인 후 다시 전장으로 향했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가며 도움이 필요한 곳이 있을지 전장을 둘러보았다.
키에에엑, 크에에엑.
그런데, 어째 그다지 내 손이 필요해보이는 곳이 없었다. 들려오는 비명과 단말마 중 병사와 기사의 것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중심에서 압도적인 무위로 마물을 쓸어내고 있는 퀘노어 대공에게로 다가갔다. 대공은 발길질 한 번으로 흰늑대 한 마리를 성벽 밖으로 떨구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늦었지 않나.”
“저를 병동에 박아놓고 늦었다고 타박하시면 어떡합니까.”
“그래. 내일까지 얌전히 거기 누워있었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텐데.”
“다 나았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성벽을 기어 올라온 마물 한 마리를 떨구었다. 놈은 팔다리를 허공에서 버둥거리다, 불길에 휩싸이며 단말마를 내질렀다.
“그런데 이러면 제가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내 손이 필요하긴 한가, 생각이 들었다. 멀찍이 잘 보이는 분홍 머리를 흩날리는 다프네는 5서클의 마법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었다. 게오르그는 중전사답게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철퇴를 휘둘러 마물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들의 근처에서, 갑옷을 갖춰 입은 한 창전사가 빛살처럼 마물을 꿰뚫으며 성벽을 뛰어다녔다.
“자네가 할 일이 없긴 왜 없나.”
대공이 성벽을 가리켰다. 마물과 병사, 기사들이 한데 엉켜 처절하게 피를 튀기고 있었다. 병사들의 창이 마물의 복부를 꿰뚫었고, 기사들의 검이 꼬치가 된 마물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그 광경에, 나는 검자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병사들을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나와 대공은 등을 맞대고서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훌쩍 가까워진 한계선의 찬바람이 뺨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땅을 스치듯 몸을 날리며 대공의 가르침을 떠올려보았다.
‘자네의 움직임이나 기본기는 내가 따로 손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훌륭하네. 다만, 내가 보기에 자네에게 부족한 건 싸움에 있어 세부적인 문제. 결국, 네가 가진 힘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지.’
검날을 세운다. 눈앞의 목표는 많다.
‘감은 좋지만, 감각에만 의존하는 싸움은 결국 네 신체 능력의 총량을 고려하지 않은 싸움일 뿐이네. 용사 일로이, 내 움직임을 눈에 잘 새겨두게나.’
절제한다. 팔의 움직임은 최소한으로 가져간다. 내 몸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선별한다.
‘전쟁은 짧지 않아, 일로이.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네. 힘은 배분이 잘 이루어질 때야말로 가장 위력적이네.’
“[북부대공이 좋은 걸 가르쳐줬구나. 잘 써보거라.]”
달려가는 추진력을 그대로 살린다. 나는 자연스럽게 첫 번째 마물의 몸통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힘을 크게 들이지 않아도 마물은 알아서 잘려주었다. 병사들과 힘을 겨루고 있던 설인(雪人)이 그렇게 죽었다.
“아니, 용사님!”
“우리 공적을 가로채기 있습니까?!”
내 등 뒤에서 불만 아닌 불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씨익 미소를 지어주고는 본격적으로 마물을 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밀리는 곳이 있으면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눈에 보이는 마물을 죽이고, 또 죽였다. 두 시간도 되지 않아 나는 백 마리에 가까운 마물을 베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의 마물들이 전부 내게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내가 워낙 설치고 다닌 탓에 최우선 제거 대상이 되어버린 듯했다. 나는 놈들과 대치하며 잠시 숨을 돌렸다.
“저놈을 먼저 죽여라.”
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설인이 낮게 으르렁댔다. 그 말과 함께 성벽을 기어 올라온 마물들이 순식간에 내게 덤벼들었다. 베어내고, 밀쳐내고, 피했다. 그 와중에 등 뒤로도 나를 덮치는 마물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괜찮다. 마나를 돌리면 놈들의 이빨은 제대로 박히지도 않을 거다. 충격에 대비하려 이를 꾹 깨물었을 때였다.
콰광.
“용사님, 괜찮습니까?”
나는 그만 몸에서 힘을 빼며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마리안느의 성창이 내 등 뒤에서 다가오는 마물 두 마리를 순식간에 꿰뚫어버린 것이었다.
“타이밍 좋았다, 마리안느.”
“길은 내가 열도록 하지.”
내 앞으로 게오르그가 달려와 철퇴와 방패로 길을 열었다. 마물은 게오르그의 힘 앞에서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쓸려나갔다. 이어-
“라이트닝 볼트.”
다프네의 마법이 끝에 서 있던 설인의 몸뚱아리에 적중했다. 설인은 고통스러운 외침을 토해내며 몸을 비틀었다. 다프네가 내 옆에서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지막은 용사의 몫 아닌가요?”
“…체면 안 서게 하네.”
내 다리는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설인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참격. 다프네의 마법에 속박된 설인의 목이 성검의 검날에 잘려 나갔다. 초반에 강하게 몰아닥치던 마물들의 공세가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마물의 시체가 장작이 되어 불을 강하게 지폈고, 시체의 벽은 바리케이드가 되어 마물들이 성벽에 붙지 못하게 만들었다.
“밀어내라!”
악을 쓰며 달라붙던 마물들이 베여 쓰러졌다. 여전히 밝게 내리쬐는 해 덕분에 시간 감각이 없었다. 진한 주황색으로 잠시 하늘이 물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다시 아침의 창백한 볕이 들고 있었다. 마지막 마물이 성벽 밖으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활활 타오르는 사체 더미를 바라보았다. 그 언덕을 경계선으로 마물들은 더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내 모종의 명령이라도 떨어진 건지 마물들이 등을 돌려 숲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비해라. 오늘의 전투는 끝났다.”
대공의 선언과 함께, 병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전장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대공의 눈은 여전히 전의에 불타오르며 성벽 너머의 마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방어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겁니다.”
내가 말하자, 퀘노어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성에 한계선이 들이닥치는 순간 끝장일 테니까. 자네의 말대로, 거인의 발길질 한 번에 모든 게 무너져내리겠지.”
대공은 오늘의 전투를 승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병사들 또한, 긴장감을 놓지 않은 듯한 모습들이었다.
“왕궁의 지원이 도착하면, 그들에게 이 성의 방어를 맡기고 거인을 쓰러트리러 향하는 게 최고의 작전이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저 마물들이 움직여줄지는 모르는 일이지.”
퀘노어 대공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우리 병사들이 내일이 다가오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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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물의 공세는 탐색전을 벌이듯 규칙적이었다. 우리는 아침이면 몰려오는 마물을 맞아 싸우고, 마물은 수없이 많은 희생을 내고는 밤이 되면 물러났다. 수성전은 며칠이나 지속되었지만, 상대는 늘 같은 기세로 쳐들어왔다. 전투 한 번에 나오는 희생자는 많지 않았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쌓여갔다.
'나는 군단장, ‘무르’다.'
성벽을 기어 올라온 군단장 하나에 기사 열 명이 죽었다. 병사는 백 명 넘게 죽었을 거다. 대공이 놈의 목을 베었다. 그날의 전투는 평소보다 일찍 끝났다. 그날 나는 전투가 끝나고도 대공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점점 이 땅에 밤이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종일 쨍쨍 떠 있던 해가 어느덧 오후를 지나 땅거미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밤은 두어 시간만 기다리면 사라졌다. 전장에 찾아오는 밤은 그리 반가운 손님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조금 추워진 거 같지 않아?”
전투가 끝난 후의 어느 밤. 병사들은 훌쩍 찾아온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성벽에 몸을 기대었다. 마물의 악취는 여전히 머리를 띵하게 어지럽혔다.
“이렇게 얼마나 더 버텨야 하는 걸까.”
병사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 파티에게로 다가가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서는 앉았다.
“이건 크라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군. 그때는 꼭 태풍과 맞서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점점 목을 조여오는 거 같아.”
게오르그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지원군이 도착하면 성문을 열고 나서 거인을 공략하러 갈 거래. 그때까지 마물들이 기다려줄지는 모르겠지만.”
다프네는 성벽에 기대어 쪽잠을 자는 중이었다. 며칠간 미친 듯이 마나를 소비했으니, 피로가 극심할 거다. 마리안느는 아직 깨어있었지만, 피곤한 얼굴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때, 내 등골을 타고 한기가 올라왔다. 나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끼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느껴본 적 있는 느낌이었다. 가시 면류관이 내게 보여주었던, 한 겨울 속 풍경.
“일로이?”
쿠구구구궁-!!!
세상이 흔들렸다. 셩벽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병사와 기사들이 모조리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보를 울려댔다. 나는 성벽 가장자리로 다가가 숲이 있는 곳을 내다보았다.
“…빌어먹을.”
한계선의 희뿌연 장막 너머로, 무언가의 실루엣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