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8 - 48. 용사 (2)
콰광-!!
성검의 검날이 마물의 목을 훑고 지나간다. 나는 검을 한 차례 털어내고는 다음 표적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채 전부 돌리기도 전, 성벽을 기어 올라온 놈들이 날아들었다. 나는 재차 성검을 휘둘러 놈의 몸통을 토막 냈다. 마물의 공세는 어제보다 거세졌다. 리스는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성벽 위로 올라섰다. 마물의 공세가 거세졌다는 게 좋은 징조인지, 나쁜 징조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저 입을 다물고 마물을 베어나갈 뿐이었다.
“그쪽에 올라오는 마물들을 맡길게, 게오르그.”
“알았다.”
“마리안느, 내 뒤를 봐줘. 성벽 전체를 한 바퀴 쓸어버릴 거야.”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나는 지시를 내리며 우리 파티들을 둘러보았다. 게오르그야 원래 완숙한 기사단장이니, 그 강함에 특별히 변함은 없었고, 마리안느 또한 이미 창수로서의 기량은 최상급에 가까운지라 변화가 특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프네의 성장이 돋보였다. 다프네가 쏟아내는 파괴 마법은 나날이 위력이 강해졌고, 방호 마법은 나날이 견고해졌다. 최근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 것이, 6서클의 경지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프네는….”
“하압!”
“…좋아. 잘하고 있어.”
이제 제법 박력이 느껴지는 기합. 그리고 다프네가 만들어낸 거대한 얼음 기둥이 마물들의 몸을 관통하며 날려 보냈다. 다프네는 얼음 기둥을 생성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마력을 가동해 기둥을 잘게 부순 후, 날카로운 고드름 화살을 만들어내 다시 마물에게로 쏘아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우리의 눈빛 속에서는 무거운 걱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마물들을 베어내고서 성벽에 발을 걸치고 멀찍이 숲을 바라보았다. 한계선은 가까워지지 않았다. 다만, 숲의 경계선에서 멈춰서 그 새하얀 장막 밖으로 끊임없이 마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리스 대장님, 대공께서는….”
젊은 기사 하나가 불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리스는 기사가 더 말하게 두지 않고 검끝으로 땅을 내려찍으며 막았다.
“우리는 그저 믿고 기다릴 뿐이다. 대공께서 내린 명령. 성벽을 잘 사수하라는 명령을 잊은 건 아니겠지. 단순히 작전 시간이 길어지는 것일 뿐, 우리가 불안해할 단계는 아니다.”
리스는 최대한 단호히, 그리 말했다. 기사는 바이저 사이로 보이는 눈에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리스는 그에 대해 더 다그치려 숨을 들이마시다, 이내 손을 내저으며 기사를 돌려보냈다. 나는 리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 또한 미세한 불안감에 떨리고 있었으나, 병사와 기사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중이었다.
“위치에서 이탈하지 말고 사수하라! 방어가 무너질 것 같다면 크게 소리쳐라! 기사들이 지원하러 달려갈 것이다!”
물론 리스의 외침에도 끝까지 버티고 서서 죽기 직전까지 싸우는 병사들이 있었다. 나는 성벽 위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병사들이 무리하면서까지 붙들어놓은 마물들을 마무리했다. 병사들은 성벽을 지키고, 나는 병사들을 지켰다. 왕도의 지원군도 없고, 퀘노어 대공도 돌아오지 않는 가운데, 병사들의 사기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방심하지 마라! 어제까지 잘 막아놓고 허무하게 성벽을 내줄 생각이냐!”
리스가 마물을 베어버리며 날카롭게 외쳤다.
“너희가 방심하고 멍청하게 굴수록 힘들어지는 건 용사님이다! 모르겠나? 너희들은 지금 그저 용사님이 구해줄 거라 믿고 안일하게 창칼을 들고 있기만 한 허수아비란 말이다!”
리스의 일갈에, 병사들의 눈에 전의와 오기가 어느 정도는 돌아왔다. 병사들은 억지로 악을 쓰고 고함을 내지르며 사기를 끌어 올리고, 마물에 맞섰다. 리스는 나를 미안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용사님. 원래 이렇게까지 흔들릴 녀석들이 아닌데, 전투가 며칠이나 계속되며 길어지다 보니, 아무래도 사기에 타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죄송할 필요는 없어요. 저도 저들의 심정이 어떨지 이해할 거 같으니까요.”
나는 성벽 밖으로 마물을 밀어내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기세를 되찾은 이후로는,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았다. 나는 성검을 꾹 쥐고 행여 위험해지는 곳이 있지 않을까 살피다가,
쉬이이이익.
성벽을 향해 갑자기 날아드는 마물 하나를 막기 위해 몸을 날렸다.
콰과과광-!!!
무겁다. 나는 성검과 맞붙은 첫 일격만으로 강한 놈이 성벽을 타고 올라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첫 일격 이후, 내가 두 번째 공격을 준비하기 전, 놈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나는 휘두르려던 성검을 회수하고는 그 일격을 성검의 검면으로 받아내었다.
쾅-!!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성벽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기사와 병사들이 내 이름을 외치며 달려들려 했으나, 내가 손을 뒤로 뻗어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멈춰 섰고, 나는 몸을 일으켜 마물을 마주했다.
“굴복해라, 두려움에 떨어라. 어리석은 인간들아.”
설인이었다. 아마 군단장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강함을 지닌 놈. 이놈을 홀로 상대해야 한다. 나는 이를 으드득, 갈며 성검을 거머쥐었다. 그때, 설인이 제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땅에 툭 떨어트렸다. 빈 양동이가 땅에 떨어진 듯한 소리가 나더니, 전장을 몇 번이고 구른 듯한 투구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와 내 발끝을 건드렸다. 대공의 투구였다.
“겨우 그 정도로 그분의 진군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느냐. 희망을 가졌더냐.”
내 뒤의 기사와 병사들이 사색에 물드는 것이 느껴졌다. 곧이어, 분노에 불타는 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 감히 그 더러운 손으로 대공의 투구를…!!!”
“네놈들이 보낸 기사들은 모조리 죽였다. 그분은 그저 발걸음을 옮기기만 했을 뿐인데, 저 알아서 개미떼처럼 몰려가 밟혀 죽더군.”
설인은 괴상한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병사들이 창칼을 쥐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러를 쓸 수 있는 기사들은 곧장 오러를 끌어 올렸다. 당장 내 허락이 떨어지기만 하면, 성벽의 방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이 설인을 찢어 죽여버릴 기세였다.
“분노를 빙자한 절망의 표정들이 참 우습구나. 얌전히 우리에게 그 목을 바치거라.”
“성벽을 방어하는 데 집중해주세요. 이놈은 제가 맡습니다.”
나는 곧장 성검의 1단계를 개방하며 설인에게로 달려들었다. 설인은 광소를 터뜨리더니 성검에 맞서 그 팔을 휘둘렀다.
쾅-!!!
설인의 주먹 위로 덮인 외골격과 성검의 검날이 충돌했다. 놈의 주먹이 베이지는 않았지만, 그 얼굴을 찡그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그대로 설인을 밀어내고는 거리를 좁혔다.
“네놈…. 그 검, 다른 기사들과는 다른…!”
설인은 고통스러운 울음을 내뱉고는 다시 주먹을 날려 성검을 막아냈다. 여유롭게 목을 바치라고 하던 모습은 어디 사라졌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설인을 몰아붙이며 빈틈을 노렸다. 힘을 아낄 여유는 없다. 마물의 말에 병사와 기사들이 분노에 들끓으며 냉정함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실수가 터져 나오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런!!”
주먹으로 막다 못해, 설인은 팔 전체를 들어 올리며 내 공격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가는 느낌이었다. 얼어붙은 불꽃이 마음에서 타오를수록 검로는 냉철하고 예리해진다. 나는 이빨을 꾹 깨물며 검을 휘둘렀다. 생각하기 싫은 광경이 자꾸 머릿속에서 떠오를 때마다 더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이대로 둘 거 같으냐!!”
설인이 나를 뒤로 밀어내며 포효했다. 그와 동시에, 기어 올라오는 마물들이 나를 포위했다. 지원을 바랄 수 없었다. 우리 파티와 다른 기사들은 대공의 몫만큼 더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네임드 마물들을 둘러보며 두 손으로 성검을 거머쥐었다.
마물들이 몸을 날렸다. 초침을 손으로 붙든 듯 시간이 느려졌다. 내 팔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허공으로 몸을 날리며, 가장 가까이 다가온 놈의 몸통을 양단하고, 무게를 실어 앞으로 한 바퀴를 돌며 어깨 너머의 두 마리를 베었다. 옆에서 다가오는 놈은 착지하는 동시에 크게 횡으로 검을 휘두르며 죽이고, 설인의 앞을 가로막은 흰늑대 두 마리를 베었다.
설인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놈의 왼쪽 오금을 베며 그 무릎을 밟고 뛰어올랐다.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린 설인의 몸뚱아리가 비틀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진다.
“검은 머리의 기사뿐만이 아니었나….”
놈의 표정을 더 감상할 시간은 없다. 나는 고꾸라진 설인의 머리통에 성검을 꽂아버렸다. 설인은 그대로 절명했고, 나는 그 거대한 몸뚱아리를 발로 차 성벽 밖으로 떨어트렸다.
설인이 지휘관 격이었는지, 달려드는 마물의 기세가 크게 죽었다. 나는 성검의 불을 꺼트리지 않고 성벽을 질주하며 눈에 보이는 대로 마물을 도륙해냈다. 흩날리는 마물의 피분수 속에서 나는 현기증을 느꼈다.
“[일로이.]”
전투 중에는 웬만해서 말을 잘 걸지 않던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흐트러진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사들이 마물의 사체를 성벽 밖으로 떨어트리고 있었고, 부상자들이 호송되고 있었다. 오늘의 침공은 이전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미세하게 팔이 떨렸다. 마력을 아끼지 않고 지나치게 쏟아부은 탓인 듯했다.
“[정신을 차리거라. 아직 북부대공이 당했다는 확증 따위는 없다. 침착하게 생각을 가다듬거라. 네가 냉정을 잃는다면 병사들에게도 영향이 간다.]”
…알겠어.
나는 재차 숨을 가다듬으며 내게로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저마다 분노에 일그러지거나, 하얗게 질려버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은 에버노드의 중진들이 성벽 위에 모인 회의가 열렸다. 나는 설인이 들려준 말에서 드러나던 허점을 떠올리고는, 하나하나 생각의 조각을 맞추어 갔다.
“…대공께서는 아마 아직 싸우고 계실 겁니다.”
나는 그리 입을 열었다. 단순히 희망을 주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리스가 미간을 좁히며 평소보다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어제부터 거인의 전진이 멈추었습니다. 한계선도 마찬가지로, 한 발짝도 가까워지지 않았어요. 제가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낄 수 있어 확신합니다.”
기사들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 말하는 설인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사기를 꺾어버림으로써 더 쉽게 성을 점령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정말 대공께서 당하셨다면, 거인의 전진이 계속되고 수없이 많은 마물의 공세에 진작 우리 성벽이 무너져내렸어야겠죠.”
리스의 표정이 잠깐 밝아졌다가, 이내 다시 어둡게 물들어갔다.
“…용사님의 말씀을 믿고 싶지만, 저는 현재 이 성의 책임자로서 최악의 상황을 상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설인의 말이 맞고, 내일 다시 그들의 총공세가 시작된다면?”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실패라는 가능성이 점점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눈앞에서 아른거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대공의 명령을 이어받아 항전해야겠죠. 거인의 진군은 어찌 되었건 현재 멈추었으니까요. 그리고, 왕도의 지원군이 오면 다시 의논을 시작해야 할 겁니다.”
지원군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 이토록 무기력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그 말을 내뱉고는 자괴감에 사로잡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강하게 깨물었다.
“구출대를 편성해야 합니다, 리스 대장.”
기사, 세린의 주장이었다. 그녀는 오늘 전투 내내 불안한 듯 성벽 너머를 흘긋거리고 있었다.
“이대로 아무런 소식도 없이 왕도의 지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용사님의 말대로, 아직 대공께서 살아계실 가능성도 크니까요.”
“대공께서 이 성의 최고 전력인데, 어떻게 구출대를 다시 편성한다는 말인가, 세린. 설령 구출대를 편성한다고 하더라도, 대공을 무사히 모시고 돌아오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나.”
“하지만, 주요 전력이 그렇게까지 빠져버린 상태에서의 수성전은….”
기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방법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해라. 흐르는 비릿한 피의 맛이 감돌았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죠.”
도박이고, 모험이었다. 어쩌면 만용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기대를 걸 만한 방법은 지금 단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제게 한 시간, 아니, 30분만 주세요. 그 시간 동안 리스 사령관께서는 구출대를 편성해주시고요.”
“용사님….”
리스의 표정이 우려에 물들었다. 우리 파티의 표정이 마찬가지로 바뀌었다.
“무슨 생각이냐, 일로이.”
“방법이 하나 있어. 성공하면 대공을 구하러 갈 만한 전력이 완성될 거야. 내가 실패한다면, 구출 작전은 취소하고 전력으로 수성전을 대비한다.”
다프네가 걱정된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로이….”
“괜찮아. 어떤 식으로든, 에버노드는 반드시 지켜낼 테니까.”
나는 그리 말하고는 마리안느를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마리안느의 금색 눈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리안느, 나를 도와줘.”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굳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가시 면류관의 시련을 극복하러 갈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말과 함께 적막해진 성벽 위를 바람이 쓸며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