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9 - 49. 용사 (3)
‘무엇이 자네를 그렇게까지 싸우게 하는 건가.’
처음에는 정말 나 하나 살고자 시작한 일이었다. 어차피 도망가면 죽으리라 생각했고, 재앙과 싸우는 것만이 내게 남은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임무고 뭐고 팽개치고 도망이나 가는 게 재앙과 싸우는 것보다는 생존 확률이 높았을지도 모르겠다. 원작에서 용사는 도망가지 않았기에, 나는 검을 들고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했다.
다프네를 찾아 영입했다.
게오르그와 다투면서도 그의 인정을 받았다.
의도치 않게 마리안느와 만났다.
성검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고, 많은 걸 배웠다.
북부로 오기 전에도 수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가며 만났고, 에버노드에 도착해서는 더 많은 사람과 만났다. 그들은 활자가 아니었다. 내가 싸워 오며 겪었던 두려움은 거짓된 두려움이 아니었으며, 훈련하던 중 생긴 상처는 진짜 고통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달칵.
나는 목함을 열었다. 가시덩굴이 엮인 면류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마리안느를 향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내가 평소에 이걸 머리에 쓰는 걸 봐서 알겠지만, 아마 성공하기는 쉽지 않을 거야.”
마리안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 눈에는 그게 마치 목각인형의 머리처럼 달랑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마리안느는 그녀답지 않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니, 그녀답지 않다니. 이런 상황에서도 불안하지 않다면 그게 이상한 건가. 미안한 부탁을 하게 되어버렸다.
“내가 시련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의식을 잃고 쓰러지게 될 거야. 그럼 그 즉시 어떻게든 나를 깨워서 리스에게로 데려다줘.”
생각하기 싫은 경우였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가시 면류관을 집어 들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나는 면류관을 그대로 머리에 썼다. 언제나처럼 면류관에서 마력이 흘러나오며 내 머리로 들어갔다. 나는 면류관의 마나가 몸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느끼며 심장의 마나를 찬찬히 돌리며 조응하기 시작했다. 시련이 지속되는 동안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른다. 나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눈을 감았다.
콰지지직.
감은 눈 속의 시야가 재차 암전되며 시련이 시작되었다. 어두워진 시야는 밝아지는가 싶더니, 새카만 어둠 속으로 나를 빠뜨렸다. 아찔한 부유감과 함께, 심상 세계 속의 나는 끝없는 무저갱 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의식을 잃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심상 세계 속의 몸이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낙하가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나는 어느새 어둠의 밑바닥에 서 있었다.
“…여기는 어디야.”
몸을 움직이려 해보았다. 팔다리와 몸통이,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강하게 잡아 끄는 것처럼 붙들어 매어져 앞으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발버둥을 쳤지만, 아주 미세한 움직임만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시련을 주려고 이러는 거지. 시간이, 많지 않아. 힘을 더 불어넣으며 탈출을 시도하려 할 때, 내 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건, 당신이 지고자 하는 구원이라는 것의 대략적인 무게.”
목소리는 남자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여자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며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카만 암흑만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앞은 당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길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건가? 차라리 뭐라도 보이는 가시밭길이 훨씬 나을 지경이었다.
“당신은 그럼에도 그 무게를 지고 이 앞을 걸어 나갈 건가요?”
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같잖은 각오 따위를 시험받으러 온 게 아니었다. 그냥, 무게를 지울 거면 지우고, 걸어가야 한다면 걸어갈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내가 이 성유물의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사람들을 지킬 수 있다면.
“그래. 못 걸어 나가라는 법도 없잖아.”
나는 내뱉듯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찔거리기만 하던 내 몸은 앞으로 더 나아가려 하자, 훨씬 무겁게 바뀌어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았다. 억지로 잡아당기려 하면 도리어 팔다리가 부서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빌어… 먹을….”
움직이지 않는다. 팔다리는 못박힌 듯 이제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나는 등을 뒤집힌 벌레처럼 허공에 팔다리를 버둥대었다. 정확히는, 버둥거리려고 애를 썼다.
“우습게 본 건 아니시겠죠. 구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가증스러웠다. 닥치라는 말이 입안에서 감돌아, 자꾸 밖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이런, 이런 무게 따위. 나는 마구 몸을 비틀었다.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이 무게를 지고 앞을 걸어 나갈 생각입니까?”
“그래.”
긴 대답을 들려줄 여유가 없다. 나는 묵을 쥐어짜내 목소리에 대답하고는 다리를 먼저 움직이려 했다. 뿌드득, 뿌드득. 부서지는 건 내 몸이었다. 나는 제대로 몸을 뻗어보지도 못하고 멈추었다. 그러는 한편, 내 몸은 멈춘 걸 넘어 점점 뒤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구원은 결국 당신마저 끌고 들어가며 저 아래로 추락할 겁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똑같은 어둠이 펼쳐져 있었지만, 저 뒤로는 넘어가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이 내 등을 잡아끄는 덩어리와 합쳐지며 영원히 추락하는 상태로 어둠 속에 빠져들 거다. 그리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며 참담한 기분으로, 나의 실패를 선언하게 되겠지.
“그러면 다시 올라올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도 저 어둠 속의 손길과 하나가 되어, 바닥 없는 구멍 속으로 떨어지기 시작할 겁니다.”
뿌드득. 나는 안간힘을 쓰며 끌려가는 내 몸뚱아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내 몸은 속절없이 뒤로 끌려가고 있었다. 무기력하고, 무능하게.
“낭떠러지가 바로 한걸음 뒤에 있습니다, 용사.”
“웃기고 있네….”
버티려 하면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조각조각 분해되어 저 속으로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버텼다. 지금 이곳에서 버티다가 부서지나, 버티지 못하고 저들과 함께 떨어지나 똑같았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왔다. 나는 눈에 핏대를 세우며 몸을 앞으로 잡아끌었다.
“이 속박에서 자유롭게 풀려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힘을 가지고 있겠죠.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당신에게 내 힘의 일부를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일부는 의미가 없어. 저 거인의 목을 잘라낼 힘이, 사람들을 구할 힘이 필요해.”
콱. 콱. 내 뒤꿈치가 낭떠러지의 가장자리에 맞닿았다. 나는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절박하게 내게 말하듯 목소리에게 대답했다.
“구하기로, 약속한 게 있으니까.”
‘약속할 거예요…?’
나는 내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의 새끼손가락에 걸리던 작은 손을 기억했다. 그 무게는, 그 온기는, 엄지가 닦아내던 눈물과 울음을 그치던 목소리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활자에서 읽어낼 수 없던 것이었다.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에버노드의 병사들이 떠올랐고, 하지 축제에서 길을 거닐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활자가 아니었고, 성검을 든 나는 이제 독자가 아니었다. 방관자로 남아있을 수 없었다.
그냥, 그리고서 머릿속을 관통하는 건 하나의 물음이었다.
남을 구할 능력이 없는데도 구하려 하는 이들이 있는데, 왜 정작 남을 구할 능력이 있는 이들은 다른 사람을 구하려 하지 않는 걸까. 라고. 그건 빌어먹을 활자 속의 세상에서도 같았고, 활자 밖의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람을 저버리지 않는다.”
위선이라 해도 좋다. 이해받지 못해도 좋다. 자기만족이라 해도, 오만하다 해도 좋다. 우연히 소설 속에 떨어진 사람이 우연히 성검을 잡게 되었다 하더라도. 구하고자 하면 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구하지 않을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구원이 필요한 이를 저버리지 않을 거다.”
그게, 네가 바라는 구원인가.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드득, 드득. 끌려가던 내 몸이 멈추었다. 나는 벼랑 끝에 발을 걸치고 서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몸은 더 끌려가지 않는다. 다만, 내 몸에 매달린 무게는 아직 느껴졌다.
“그게 당신의 선택입니까.”
“기꺼이 짊어지겠어. 비록 내가 원치 않게 맡게 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그리 말하고는 자세를 고쳤다. 조금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보여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네가 내게 힘을 준다면야.”
아주 천천히, 내 오른발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폭포수처럼 땀을 흘리며 발을 내디뎠다. 겨우 한 발. 앞으로 가는 것도 아닌 여태 끌려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일 뿐.
“가자.”
몸을 앞으로 숙이는데 허리가 뜯겨 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억지로 몸을 끌어 상체의 무게중심을 옮겼다. 나머지 왼발만 앞으로 온다면, 한 걸음은 걸어본 셈이었다.
“좋아.”
나머지 한쪽 다리는 자연스럽게 딸려오지 않았다. 뜯어진다. 저것에 잡혀, 내 몸이 산산조각이 나며 분해된다. 아니, 뜯어지지 않는다. 부서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일 뿐이다. 나는 이를 악물며 남은 다리를 움직였다. 뚜둑, 뚜둑. 부서져도 괜찮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저 구덩이로부터 함께 멀어질 수 있다면.
나는, 걷는다.
“저 앞에는 빛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목소리가 그리 말했다.
“추락하지만 않으면, 빛은 끊임없이 찾아다니면 돼.”
“빛은 허상일지도 모릅니다. 단순한 희망고문일지도 모릅니다.”
“그건 찾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지. 그리고, 중요한 건.”
빛을 찾아다닌다면, 저 무저갱에서부터 점점 멀어질 거라는 사실.
“그럼 우리는 빛을 찾아다닐 걱정을 하고, 구덩이로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절망을 걱정하는 게 아닌, 희망을 바라보게 되는 거잖아.”
그때가 되면, 내 등을 붙잡은 손들도, 각자의 빛을 찾아 해방되어 사라질 거다.
“그때가 내 구원을 완수하는 순간이 아닐까.”
“설령 남은 이들이 그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되더라도?”
“헤매고, 절망하는 게 추락하고 헤맬 기회조차 받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보다는 낫지.”
나는 그리 말하며 발을 또 앞으로 디뎠다.
“그렇지?”
“[너는 틀리지 않았다.]”
성검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 듯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아가라.]”
눈앞의 광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둠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균열이 일어난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균열 속으로 손을 뻗었다. 빙판 위로 이는 금처럼 균열은 어둠 전체로 퍼져나가더니, 이내 파사삭, 무너지기 시작했다.
“훌륭합니다, 용사.”
아스라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도와드리겠습니다.”
.
눈을 떴다. 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눈앞에 마리안느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받치고 있었다. 나는 마리안느의 손을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안느는 손을 살짝 떨며, 내 얼굴에서 떼어냈다.
“…괜찮으신가요.”
“응.”
머리에 느껴지던 따끔한 가시의 감각이 사라진 채였다.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면류관은 부서져버린 채 말라붙은 가지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축하한다.]”
성검의 말에, 나는 침실 구석에 있던 거울을 보았다. 면류관과 닮은 형태의 빛나는 고리 하나가, 내 머리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성공한 건가.”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보다가, 시계를 보았다. 시험을 시작한 지 고작 30분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 심상세계 속에서는 몇십 시간을 보냈던 것 같기도 한데. 나는 검자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평소와는 쥐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조금 더 성검과 가까워진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성공했구나.]”
나는 서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빠르게 기세를 정돈했다. 심장에서 일어나는 마나의 움틀임이 평소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제, 그를 구하러 갈 수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마리안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안느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점점 내게 다가오더니, 내 옷소매를 붙들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마리안느의 손아귀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마리안느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마리안느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다가, 이내 포기한 듯, 작게 숨을 내쉬며 입술을 떨었다.
“다녀올게.”
“다녀…오십시오.”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이미 우리 숙소의 1층에는 리스와 세린이 대기하고 있었다. 리스는 내 모습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황당함과 기쁨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달라지셨군요. 몰라보게 강해지셨습니다.”
“구출대는?”
리스가 고개를 까닥였다. 세린을 필두로, 에버노드 굴지의 기사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와 용사 파티는 성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대공님을 구해주십시오, 용사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말에 올랐다. 말은 평소보다도 차분한 태도로 나를 맞이했다. 나와 구출대는 성문의 앞에 섰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개문!!”
창살이 올라갔다.
나는 성검을 뽑아 들었고, 말은 알아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
기다렸다는 듯 마물의 해일이 몰려왔다. 나는 성검을 휘둘렀다. 흩날리는 마물의 파편 속에서, 나는 새하얀 한계선의 장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음속에 세운 하나의 결심을 내건다.
용사란 사람을 구하는 존재.
지금부터 나는 용사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