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 - 50. 용사 (4)
살을 에는 바람이 불었다. 겨울은 수도 없이 많이 겪어보았다. 에버노드의- 북부의 겨울은 길고 춥고, 대륙의 그 어떤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었으니까. 퀘노어 스트로프에게는 겨울의 세상에서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겨울에 맞서 싸웠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북부에서 겨울은 곧 세상 전부였기에, 그건 곧 세상에 맞서 싸웠다는 자부심이었다.
한계선은 부드럽게 퀘노어와 기사들을 빨아들였다. 장막 너머는 새하얀 어둠이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퀘노어는 뒤를 돌아보았다. 반평생을 에버노드와 그를 섬겨온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앞장서서 돌파하지. 경들은 전력을 아껴라.”
아주 희미한 그림자밖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퀘노어는 그들의 앞에 수백, 수천의 마물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말머리를 늦추지 않고 가속했다. 퀘노어의 뺨을 한계선 속의 바람이 면도날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퀘노어는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순환하는 마나가 달구어 놓은 숨이 새하얀 김이 되어 흩어졌다.
“단숨에 가겠다. 선두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의 대답은 칼바람을 뚫고 들려왔다. 대공은 처음부터 오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랜드 소드마스터의 경지를 바라보는 이의 마나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 한계선, 네 번째 재앙의 영향을 받아 강해진 마물들은 그 힘을 믿고 마구 달려들다가,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장난이 아니군.”
퀘노어는 갈수록 강해지고 짙어지는 눈발 속에서 이를 깨물었다. 기감을 펼치면 기사들의 기척을 간신히 감지할 수 있었지만, 한계선 속의 공간이 특수한 마력이라도 머금고 있는 건지, 퀘노어의 감각은 점점 흐트러뜨려지고 무뎌지고 있었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다. 거인의 존재감이 선명하게 느껴져.”
퀘노어는 끊임없이 기사들을 독려했다. 기사들은 대답할 힘마저 아끼며 싸움을 대비하고 있었다. 퀘노어가 재차 계획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자신이 이곳에서 거인의 전진을 막고, 용사 일로이가 성벽을 막아낸다. 오늘 성벽을 침공할 마물들은 퀘노어가 반쯤 쓸어버린 것 같으니, 일로이는 오늘 덜 고생하겠군.
발아래에 쌓이는 눈이 말의 발목까지 왔다. 퀘노어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마물들을 바라보았다. 서른 마리 정도. 모두가 지성이 있는 놈들이었다.
“이 앞으로는 지나갈 수 없다. 감히 미물들이 그분의 발치에 다다르려 하다니.”
설인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눈을 부라렸다. 그 옆으로 비정상적일 정도로 거대한 트롤, 레이븐, 회색곰 등의 마물들이 이를 드러내며 퀘노어를 향해 살기를 뿜어냈다.
“전원 발검.”
검날이 검집을 긁으며 울었다.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한 눈보라는 인간에게 불리한 환경이다. 퀘노어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단순히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세로 누르고, 기사들의 사기를 끌어 올려야 한다. 더, 더 강하게. 이 한계선 속의 눈보라를 아예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콰아아아-!!
오러가 솟아올랐다. 용오름과 같은 마력의 소용돌이가 눈보라를 밀어내며 시계를 밝혔다. 재앙의 마력은 자신에게 반기를 든 인간을 용서치 않았다. 마물들은 제 눈을 핏빛으로 물들이고서는 달려들었다. 퀘노어와 기사들이 검을 들었다.
“에버노드를 위하여.”
기도하듯 짧게 읊조린 퀘노어가 검을 휘둘렀다. 땅을 위하여, 성을 위하여, 기사, 병사, 양민을 위하여. 강화된 마물들이 기사들을 덮쳤다. 퀘노어는 모든 기량을 쥐어 짜내며 오러를 뿜어내고 마물을 도륙했다. 기사들이 퀘노어의 마력에 동조하며 오러를 끌어올렸다. 오러는 서로 공명하며 그 크기를 키웠다.
“죽어라!!!”
마물은 흥분했고, 퀘노어는 비교적 차분했다. 각오는 없다. 단지 그는 자신이 세운 작전을 완수하기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다가오는 거인을 멈춘다. 그리고 최대한 많은 마물을 죽여 없앤다. 퀘노어는 검을 휘둘렀다. 그들이 달려온 길을 따라 붉은 피가 눈길 위로 남아있었다.
군단장 두 마리가 무어라 외치며 퀘노어에게 달려들었다. 퀘노어의 손발이 묶였다. 그들은 오래 함께 싸워온 것들처럼 퀘노어를 괴롭혔다. 손발톱이 날아들고, 적당히 치고 빠지며 퀘노어가 더 나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퀘노어는 굴하지 않았다. 마물의 이빨이 말의 목을 깨물고, 말은 바닥에 죽어 쓰러졌다. 낙마한 퀘노어의 발목이 눈에 푹 잠겼다. 그 틈을 타 군단장들은 매섭게 퀘노어에게 달려들었다.
"이제 그만 그 목을 내놓아라!!"
퀘노어의 오러는 꺼지지 않았다. 바닥의 눈 째로, 퀘노어가 주변 일대를 모조리 베어버리는 오러의 회오리를 일으켰다. 다가오는 마물은, 군단장과 잡졸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몸통이 잘게 썰려 붉은 눈보라를 만들었다.
"..."
퀘노어는 조금 흐트러진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따라온 열넷의 기사 중 보이는 건 열 명 정도였다. 마물들이 말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건지, 아직 말에 타고 있는 이는 없었다. 쓰러진 이들은 가슴과 목에서 피를 흘리며 쏟아지는 눈에 묻혔다. 퀘노어는 그들의 시신을 향해 눈을 감고 목례하고는, 돌아 다시 길을 나아갔다. 시신을 수습할 시간이 없었다.
걸었다. 그들은 한참을 걸었다. 한계선은 마치 그 속의 공간을 잡아 늘려놓은 것 같았다. 눈과 쓰러진 나무들이 즐비한 폐허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추위는 이미 일반적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섰다. 바람에 쓰러진 나무둥치가 덜컹거리며 흔들린다. 기사들의 머리카락과 눈썹에 눈발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추위에 강했다. 손발의 감각이 무뎌지고 폐부를 칼바람이 찌르며 몸속의 피를 얼려도, 그들은 검을 놓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기사들의 심장은 세차게 뜀박질하며 피와 마나를 공급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부서진 나무마저 쏟아지는 눈보라에 뒤덮이고, 퀘노어의 오러가 눈보라에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할 때였다. 선두에서 길을 열던 퀘노어가 처음으로 멈춰 서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게 바로."
퀘노어의 등 뒤에서 헤멜이 말했다.
"일로이와 게오르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것 같군 그래."
퀘노어는 그리 중얼거렸다. 그건 지나치게 거대했다. 아주 멀리서 희끄무레하게 보일 때의 그것은 형상에 지나지 않았다. 점차 가까워지자, 눈보라에 가려진 시계마저 그것을 차마 전부 가리지 못했다.
거인은, 우뚝 서있었다. 그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은 채로.
"...우리는 저런 걸 상대하려고 했던 겁니까."
헤멜이 침음성과 함께 말을 내뱉었다.
"쓰러트리려고, 죽이려고 하고 있지."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마르게 하려 했군요."
퀘노어가 씨익, 사납고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일로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어떤 건지 깨달았다. 어째서 저놈을 쓰러트려야 하는 사람이 일로이여야 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성검의 힘이니, 검술이니.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그래도 해야만 하지."
거인은 미동도 없었다. 애초에 저것이 살아있는 생물이 맞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북쪽 숲의 침엽수림이 거인의 발 옆으로 비죽비죽 솟아나 있었다. 그 주변은, 우습지만, 마치 성전(聖殿) 같은 고고함, 고요함과 거룩함이 있었다. 거인은 산보다 높고, 협곡보다 깊다. 퀘노어가 한숨을 내쉬자, 입에서 마나의 푸른 기운이 섞인 입김이 새어 나왔다.
“스스로 목을 내놓으러 온 건가, 검은 머리의 기사?”
거인의 발치에서 마물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뒤에서도, 앞에서도. 사방에서 마물들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멸망은 멈출 수 없다.”
“아니, 거인의 발걸음은 이곳에서 멈춘다.”
드드드드드.
땅에서 약한 울림이 일었다. 거인이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퀘노어는 거인의 미동에서 죽음을 예감했다. 저것을 막으려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목숨을 바쳐야 가능하다는 사실 또한 깨닫고 있었다. 퀘노어는 뒤를 돌아보았다. 지쳤지만, 눈빛만큼은 투기에 불타고 있는 기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퀘노어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에버노드가 있는 방향을 보았다. 눈보라가 장막처럼 시야를 가려 풍경의 윤곽조차 보이지 않았다.
일로이. 자네를 믿어도 괜찮겠나.
퀘노어가 속으로 물었다. 그 빛을 믿고 이곳에서 자신의 모든 걸 걸어도 괜찮을까.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모든 것. 헬라, 루크, 카린, 에버노드의 가신과 기사들. 주민들의 모습. 에버노드의 여름과 겨울.
퀘노어는 검을 강하게 거머쥐었다. 새로운 밤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
.
.
베었다.
몸이 무거웠다. 몸이 무겁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퀘노어는 마물의 포위망을 뚫고는 거인에게로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다리를 움찔, 들던 거인이 퀘노어의 공격에 발을 멈추었다. 거인은 말을 하지 않았다. 발치에서 피를 튀기며 싸우는 미물들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앞으로 걸어가는 것만이 그것이 지닌 생명으로서의 사명인 듯했다.
퀘노어는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꼈다. 거인을 침범하는 대가는 참혹하다. 퀘노어의 마나가 진탕이 되었다. 퀘노어는 고드름으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입에서 피를 쏟아내었다.
하지만, 막아낼 수 있다.
퀘노어는 그 사실만을 머리에 되새긴 채 검을 휘둘렀다. 이따금 뒤편의 기사들을 피해 달려오는 마물은 검격의 여파만으로 찢겨 날아갔다. 짧은 밤이 지나고 다시 해가 떴다. 해가 중천을 향해 달려가다가, 빨려 들어가듯 서쪽을 향해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아침까지 돌아가겠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군.
퀘노어는 문득 검을 늘어뜨리고는 뒤로 돌아보았다. 기사들이 얼마나 남았지? 더욱 거세진 눈보라 속에서 보이는 기사들은 많지 않았다.
하루 정도는 늦춘 건가.
퀘노어가 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는 길을 마물의 벽이 막고 있었다. 거인은 퀘노어가 공격을 늦춘다면 당장이라도 걸음을 재개할 것 같은 기세였다. 돌아갈 수도 없는 건가? 퀘노어는 손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검을 꾹 쥐었다.
목숨을 불살라서라도.
“헤밀.”
곧 따라갈 테니, 먼저 마물의 벽을 뚫고 돌아가라고 말하려던 퀘노어가 헤밀의 표정을 보고는 멈추었다. 헤밀은 멍하니 눈보라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공도 느끼셨습니까?”
응?
퀘노어는 얼굴을 굳혔다. 느꼈다니? 설마, 거인이나 지금 이 마물들 말고도 무언가가 더 있는 건가? 퀘노어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본 헤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가 더 있다는 말이지.”
“아뇨, 그게 아니라… 느낌이 조금 다른데. 너무 강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마치, 용사님의 기척 같습니다.
퀘노어가 눈을 크게 떴다. 빛나는 무언가가, 눈보라를 뚫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이곳까지 내달려오고 있었다. 눈을 껌벅거리는 퀘노어를 스치고, 엄청난 기세의 검기가 불어닥쳤다.
콰과과과광-!!!
마물들이 말 그대로 증발했다. 눈보라의 기세가 무언가에 밀려 약해지고 있었다. 퀘노어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는 말 위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는 용사의 얼굴을 보았다. 구원자처럼, 용사는 머리 위로 가시가 돋친 빛나는 원을 띄우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나 무리하지 말고 바로 돌아오라고 말씀드렸거늘.”
일로이가 말에서 내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퀘노어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야말로, 성벽을 지키라고 했는데 여기서 뭐하는 짓인가.”
“상호 합의를 어겼네요. 그런데 대공께서 먼저 어겼다는 건 기억하고 계셔야 할 겁니다.”
일로이는 그러면서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성검에서 흘러나오는 빛 또한, 이전보다는 정돈된 느낌으로 빛나고 있었다.
“거인을 쓰러트릴 셈이로군.”
용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자들은 저와 함께 온 다른 기사분들이 태워서 돌려보내겠습니다. 억지로 남겠다는 소리 하는 사람은 기절이라도 시켜서 돌려보내요.”
퀘노어는 기사들을 향해 돌아서는 일로이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 불안함과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집념.
퀘노어가 그의 눈에서 읽어낼 수 있던 감정은 그것이 유일했다.
“다른 마물들을 부탁하겠습니다.”
일로이는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눈보라가 무색하도록 굳건히 말했다.
“저는 지금, 이곳에서 네 번째 재앙을 끝내버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