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 - 51. 용사 (5)
“나한테 마물의 정리를 맡아달라고 하는 사람은 또 처음 보겠군.”
퀘노어 대공이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퀘노어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충 보기에도 대공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마력의 순환 체계가 아슬아슬했다. 대공의 기세는 날카로웠지만 정돈되지 않은 채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틀 동안 말 그대로 쉬지 않고 오러를 뿌려대며 싸웠을 테니, 멀쩡한 게 도리어 이상하다.
“돌려보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그리 말씀드려도 이상하지 않은 몸 상태이지 않습니까, 대공님. 마나를 순환하는 것도 제대로 안 되고 있으면서.”
내 말에 퀘노어 대공은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이내 미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자신만큼 커버린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눈과 같았다.
“이제 그런 게 다 보이기 시작한 건가, 일로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대공께서 무리하지 않고 싸울 자신이 있다면 나중에 저를 도와주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거인을 바라보았다. 아직 성검의 2단계는 완벽하게 개방된 상태가 아니다. 억지로 위력을 끌어올릴 수는 있지만, 성검이 언급했던 두 번째 조건, 힘을 다루는 방법을 완전히 깨우치지는 못한 탓이다.
“[조건을 따질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어라, 일로이.]”
나는 성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2단계의 개방은 1단계와는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1단계를 처음으로 개방했을 때보다도 훨씬 강한 힘이 온몸을 휘저었고, 면류관으로 강화된 신체가 삐걱거릴 정도로 심한 부하가 걸렸다. 면류관을 열지 못하고 2단계를 열었더라면, 내 몸뚱이는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망가져버렸을 거다.
그래. 상황을 봐줘서 고맙다.
조금만 더 하면 그 경지에 닿을 거 같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다. 나는 까마득하게 높이 솟아있는 거인의 몸체를 바라보았다. 눈보라 속에서 윤곽으로 보이는 거인은 족히 수백 미터는 넘어갈 정도로 거대했다. 나는 거인을 바라보며 면류관이 보여준 풍경 속의 무저갱을 떠올렸다.
거인은 구덩이보다 깊지 않다. 한계선이 드리운 먹구름 위로 덮이기 시작하는 짧은 밤은 구덩이 속 어둠보다 어둡지 않았다.
“역시, 아직은 세상이 멸망할 때가 아닌가보다.”
나는 성검을 들어올리며 그리 중얼거렸다. 눈보라가 거세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계획은 있나?]”
일단 부딪쳐봐야지. 저놈이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말이야.
나는 눈을 감으며 집중하기 시작했다. 심장의 중심에 자리한 작은 불씨. 그로부터 마력의 줄기가 뻗어 나오며 몸을 돌아다닌다. 발밑에서 소용돌이가 일었다. 퀘노어 대공이 오러를 발동할 때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력의 와류(渦流)는 예기를 띠며 바람마저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내게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은 눈보라를 잡아먹으며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 다들 용사 일로이에게서 물러나라.”
내 변화를 파악한 퀘노어 대공이 경악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거인은 여전히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놈의 기세가 바뀌는 것으로 보아, 다시 전진이 시작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네가 이쪽을 보게 만들어주지.”
더, 더 강하게. 내 아래의 땅이 파였다. 쌓여있던 눈이 허공을 날아가며 흩어졌고, 땅이 맨살을 드러내었다. 성검에 빛이 모여들고 있었다. 검신에 모이는 서기(瑞氣)는 나선 모양을 그리며 뻗어갔다. 첫 일격은 위에서 아래로 곧은 직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리는 일섬.
“그 너머를 바라보지 마라, 거인.”
성검의 검날은 한계선 속의 거울을 찢어발기며 울부짖었다. 빛은 앞으로 달려드는 마물들을 모조리 찢어발기고서는 거인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과과광-!!!
폭음이 일었다. 거인의 몸에는 상처가 나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작은 지진이 일어났다. 줄곧 에버노드를 향해 나아가려던 거인의 발끝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로, 내가 있는 쪽으로.
“[관심을 끌었군.]”
그러게, 확실히 거인의 관심을 끌어버린 것 같았다. 거대한 나무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온몸을 짓누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니, 거인의 어깨 위로 달린 머리가, 나를 향해 삐걱거리며 돌아오기 시작했다.
“움직였어….”
거인의 시선은 나뿐만이 아니라 기사 전부를 짓눌렀다. 퀘노어 대공을 제외한 기사 대부분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거인의 시선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마물마저 짓누른다. 마물들은 재앙의 변화에 우리를 공격하다가 말고 납작 조아리며 떨었다.
쿠구구궁.
산 하나가 통째로 움직인다면 저런 소리가 날까. 거인의 발은 방향을 바꾸며 그 방향에 놓여있는 모든 것을 통째로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나무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마물은 짓뭉개지며 한 줄기 핏물만을 남겼다. 거인은 나를 확연히 인식했다. 한계선 속의 세계가 함께 나를 인식하고는, 사납게 돌변했다. 목적은 오로지 나 하나를 죽이기 위해.
바람이 말 그대로 칼날이 되어 세상을 찢어발긴다. 내 마력의 소용돌이가 형성한 구역을 긁어댔다. 나무둥치가 덜걱거리며 흔들리더니, 거대한 창살이 되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그 여파가 뒤의 기사들에게 닿게 하지 않기 위해 마력을 쏟아부으며 성검을 휘둘렀다. 바람은 무작위로 세상을 난도질하다가, 내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내 맞은편에서 불기 시작했다.
“[버텨라.]”
나는 성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버티는 것을 넘어 나아갈 거다.
심장 속의 작은 불씨가 그 크기를 키웠다. 맹렬하게 뜀박질하는 마나의 정수(精髓)가 내 바람에 응답해 장막의 크기를 키워갔다. 짓누른다. 가소롭다는 듯.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거인의 마력이 나를 짓눌렀다. 거인이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네가 그렇게 세상을 발아래에 둘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굴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어깨 위로 짊어져야 할 테니까.
“네가 그 오만한 고개를 내 발아래에 숙이기 전까지는-.”
나는 이를 부드득 갈며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한 발짝의 보답은 더 거센 저항이었다. 거인은 내 전진을 허락지 않겠다며 마력으로 나를 짓눌렀다. 내가 딛고 선 땅이 움푹 파이기 시작했다.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더 나아갔다.
“고개를 꺾지 않을 거다.”
거인과 나의 힘 싸움이 이어졌다. 거인의 마력은 무한하다. 내 마력은 많지만 무한하지 않다. 이대로 줄다리기가 계속되기만 하면 언젠가는 내 마력 역장이 찢어져 버릴 거다. 나는 무사할지 몰라도, 내 뒤의 기사들은 무사할 수 없다. 뚫어야 한다. 밀리면 안 된다. 이렇게는-!
그때, 내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 섰다.
“이거, 에버노드의 체면이 다 죽어버렸군.”
짐이 덜어졌다.
나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거인의 압력을 떨쳐내 버린 퀘노어 대공이 미소를 지으며 마력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푸른 마력이 내 은빛 마력과 섞이며 역장을 보완했다. 마력의 순환이 불안정하다 싶더니, 지금은 어느새 꽤 회복한 모습으로, 심지어 이전보다도 강해진 모습으로 나를 지탱해주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의 추위와 눈보라에 북부의 기사가 굴복할 것 같았더냐?”
퀘노어 대공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퀘노어 대공은 뒤로 돌아보았다. 땅에 검을 박고 압력을 버티기에 급급했던 에버노드의 기사들이 검을 지지대 삼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퀘노어 대공은 엄한 표정으로 기사들을 다그치듯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지나 보낸, 우리가 극복했던 지난 수십 번의 겨울이 이보다 약했더냐?”
“…아닙니다.”
가장 먼저 헤밀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마나를 끌어올려 검에 오러를 맺었다. 다시, 내 마력 역장을 지탱하는 손길이 하나 늘었다. 헤밀은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말해 보아라, 한스, 아드리안, 티론. 자네들의 겨울은 이보다 따뜻했나? 우리는 그때 굴복하며 성채를 내주었나? 칼바람이 우리의 성벽을 무너뜨리게 내버려 두었나?”
퀘노어 대공의 질책에, 기사들이 고개를 저었다. 티론이 일어섰고, 한스와 아드리안이 거의 동시에 일어섰다. 그들 역시 헤밀과 같이 검에 오러를 피워 올렸다.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이 정도는, 한 번의 겨울만 못한 추위입니다.”
기사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퀘노어 대공이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대답해라, 에버노드의 기사들이여! 그대들의 본분이 무엇인가?”
나를 따라온 세린이 입을 열었다.
“목숨을 걸고서…, 에버노드를…,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런 그대들이 누군가의 등 뒤에 숨어 언제까지 벌벌 떨고 있을 건가? 적의 목을 먼저 따러 나서겠다고 해도 부족할 판에, 우리는 적에게 무릎을 꿇고 굴욕적으로 굴복할 것이냐고 물었다. 저 더러운 발로, 에버노드의 성채를 짓밟게 둘 것이냐는 말이다!”
““아닙니다!!””
기사들이 전부 몸을 일으켰다. 점점, 내 등을 받쳐주는 손이 늘어갔다. 장막이 두꺼워졌다. 내 마력이 안정을 찾았다. 기사들의 마력과 마력이 엮이며 단단히 장벽을 만들었다. 시야가 개였다. 눈앞에 거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인의 마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지만, 단단하게 엮인 기사들의 마력을 뚫을 수는 없었다. 되려, 그들의 마력은 눈보라와 한기를 몰아내며 내가 달려가야 할 길을 열어주기 시작했다.
눈발이 사그라들었다. 바람은 우리를 침범하지 못했다. 맨살이 드러난 땅 너머로, 일직선으로 길이 뻗어갔다. 그 길의 끝에, 내가 마주해야 할 재앙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성검을 강하게 쥐고 마력을 정비했다.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버티고 서라! 그대들이 저 거인의 목을 베지 못하겠다면, 적어도 그 목을 베러 나서는 이에게 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 알겠습니다!!””
퀘노어 대공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퀘노어 대공을 마주 보고 있었다. 기사들의 오러가 거인의 눈보라를 막아내고는 온갖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게나, 용사 일로이.”
퀘노어 대공은 다른 이의 검을 왼손에 들고, 자신의 보검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퀘노어 대공과 그의 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물론 성검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스트로프 가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우리를 지켜준 검일세.”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검집에서 대공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은 대공의 의지에 조응하듯 작게 울고는 내 손에 감겨 들어왔다. 나는 검들의 무게를 느끼며 돌아서 거인을 마주했다.
“잘 쓰고 돌려드리겠습니다.”
“흠집 하나라도 나 있으면 용서하지 않겠네.”
대공의 농담에 나는 피식, 웃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최대한 조심해보도록 하죠.”
오러의 길. 나는 그 위로 발을 내디뎠다. 기사들의 바람, 의지, 믿음, 희망. 오러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다시 한 발. 한 발. 나는 그 모든 감정을 느끼며 걸음을 달리기로 바꾸었다. 가속한다. 한없이 가속했다. 내 몸이 오러의 빛에 휘감겨 빛날 때까지. 나는 오러의 길 끝에서 다리를 웅크렸다가, 펼치며 뛰어올랐다.
왼손에 들린 대공의 검신이 내 은빛 오러에 휩싸이고, 성검이 개방되며 새하얀 빛을 내뿜었다. 몸은 해방된 듯 가벼웠다. 나는 한없이 높이 날아오르며 눈보라를, 한기를, 구름을 뚫고 창공으로 상승했다. 한계선의 구름이 내 오러에 흩어지며 검푸른 하늘을 드러냈다. 어느새 밤이 지나가고 미명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 끝에, 거인의 머리가 보였다. 눈, 코, 입이 달리지 않은 마치 마네킹과 같은 모습. 그 위로는 붉게 빛나는 십자 모양의 균열이 그어져 있었다.
“그래, 네놈의 얼굴은 그렇게 생겼군.”
우우우웅.
고래의 울음소리를 증폭시킨 것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분노한 거인이 내는 소리인가 싶었다. 거인의 고개가 나를 따라 돌아갔다. 나는 거인이 내게로 다가오기 전, 먼저 오러를 격발시키며 그 머리로 신형을 날렸다.
콰과과광-!!
거인의 머리에서 폭발이 일었다. 거인이 처음으로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검을 타고 내 몸속으로 한기가 침범했다. 몸속을 내달리는 마력이 한기를 금세 몰아내었다. 거인의 머리에 그어진 십자가 속에서 빛나는 구체가 돌아가며 나를 포착했다.
“한 번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나는 그리 말하며 왼손의 검을 내리찍었다.
콰과광.
거인이 다시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멈추지 않는다. 내 검무(劍舞)가 시작되었다. 나는 왼손, 오른손을 가리지 않고 내리찍으며 거인의 방어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쿠궁. 쿠궁. 거인이 내게 밀리며 뒷걸음질을 친다. 아직, 벨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베일 때까지 몰아붙이면 된다.
쿠구구궁-!!
뒷걸음질을 치던 거인이 산등성이에 부딪혔다. 산의 몸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거인은 몸을 비틀며 쓰러지고, 나는 그 위로 가속하며 교차된 두 검을 떨어트렸다.
콰과광-!!
거인이 분노에 찬 울부짖음을 다시 토해냈다. 그러면서, 거인은 마침내 나를 치워야 할 미물이 아닌 적으로 인식한 듯했다. 거인이 팔을 뻗어 날아드는 나를 그대로 쳐내려 했다. 나는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날아드는 거인의 주먹에 검격을 내리꽂았다. 나는 마력을 쏟아부으며 나를 밀어내는 거대한 물리력에 저항했지만, 이내 거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가 반대편 산봉우리를 무너뜨리며 처박혔다.
“커헉-!”
오러가 부서지며, 충격이 내 몸을 들이받았다. 나는 입에서 피를 토해내며 몸을 휘청거렸다. 겨우 한 번의 공격. 어렵사리 막아낸 그 공격은 내 몸을 반쯤 부수기에 충분했다. 거인의 공세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는 하늘을 덮어버리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일어나서, 막아야 한다.
콰과과광-!!
거인의 손 틈으로 빠져나왔다. 거인의 손은 무자비하게 산을 짓누르며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손 위로 올라서고, 다시 박차고서는 달렸다. 통증은 무시한다. 뼈가 부러졌든, 내장이 터졌든. 몸이 형체를 유지하는 이상 싸울 수 있다.
우우우웅.
거인의 울음소리와 함께 다른 한쪽 손이 내게로 날아들었다. 다시 충돌. 이번에는 튕겨져 나가다, 허공에 몸을 붙들었다. 거인이 이번에는 양손을 펼치고 나를 눌려 죽이려는 듯 손뼉을 치려 했다. 나는 그대로 아래로 하강했다.
쾅-!!!
거인의 손뼉에서 바람이 일었다. 나는 휘청거리며 땅에 처박혔고, 거인은 나를 향해 발을 높이 들었다. 가만히- 당해줄까 보냐.
다시, 솟아오른다. 오러는 기름을 들이부은 불꽃처럼 타오른다. 거인은 발을 내려 꽂아버리기도 전, 내 공격에 부딪히며 휘청거렸다. 아직, 부족하다. 아직 더 나아가야 한다. 이를 악물며 검을 틀어쥐는 내 귓가에, 성검의 말이 들려왔다.
“[재앙을 강함으로 굴복시키려 하지 말거라.]”
성검의 목소리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웠다. 그 순간, 세상의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강(强)은 너의 무기가 될 수 있지만, 네 뿌리가 될 수는 없다. 재앙은 언제나 너보다 강할 것이고, 너보다 크고, 무겁고, 압도적일 거다.]”
내 손에 들어간 힘이 조금 빠져나왔다.
“[그것을 네 손으로 베어내겠다는 건, 결국 강(强)을 다른 힘으로써 굴복시킨다는 것이니.]”
지금의 너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거다.
눈송이가 떨어졌다. 눈이 떨어지는데, 그 눈송이 하나만이 이상하게 잘 보였다. 눈송이는 나풀거리며 세상을 뒤덮는다. 저 하나의 눈송이가.
검을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성검의 검날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렇게, 떨어지는 눈송이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픽.
눈송이의 정중앙을 성검의 검끝이 꿰뚫었다. 그 순간, 검과 나는 하나가 되었다.
“[이슬을 검 끝에 올려보아라. 내가 그리 말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성검의 목소리는 대견함을 품고 있었다.
“[눈송이 하나는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겠지.]”
거인이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검은 처음부터 나와 하나인 듯했다. 다시, 이번에는 왼손의 검을 휘둘러 눈송이를 꿰뚫었다. 형태는 부서지지 않고 검끝에서 온전했다.
“…됐다.”
목소리는 입에서 절로 빠져나오는 듯했다. 나는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성검에게 말을 걸었다.
“성검.”
다시, 내 몸을 미증유의 힘이 감싸는 것과 함께 내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고요하고, 깨끗한 공간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내 시야의 끝에는 빛을 등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한 여성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뜻 보니, 머리 위로 화관을 쓰고 있었다. 여성은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여기까지 잘 왔다, 일로이.”
여성은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아주었고, 나는 그 온기를 느끼며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아주 잠시나마 볼 수 있었다. 눈처럼 하얀 머리에, 따뜻하고 붉게 빛나는 눈동자. 여성은 내 눈을 바라보며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거라.”
다시, 꿈은 사라진다. 나는 어느새 차가운 공기 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선을 그리는 성검과 내 오러가 날개처럼 피어올랐다. 거인이 울음을 토해내며 산을 무너뜨리고 내게로 다가온다.
“[할 수 있겠느냐.]”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나는 거인과 한계선을 향해 마지막이 될 일격을 꽂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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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노어는 새하얀 광망을 그리는 은빛 유성이 거인과 충돌하며 사투를 벌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유성은 밀리는 듯하다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사들이 어느새 퀘노어의 곁에서 그 빛을 함께 지켜보고 있었다.
“이길 겁니다.”
세린이 힘을 주어 말했다. 대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용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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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프네의 손에 마물이 또 한 마리 쓰러졌다. 오늘은 공세가 거의 없었다. 오후가 되기도 전, 마물들은 모두 다급하게 다시 숲으로 사라졌다. 한계선은 더욱 짙어지며 영향을 흩뿌렸고, 용사 파티와 에버노드의 병사들은 한계선을 간절한 눈으로 응시했다.
제발, 일로이와 대공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몇 번이고 지진이 일어났다. 거인과의 격렬한 전투가 지속되는 것 같았다. 절망과 희망. 그 교차로에 선 그들은 점점 절망의 그림자가 커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일로이.
다프네가 두 손을 강하게 맞잡았을 때, 갑자기 하늘이 개었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프네는 점점 갈라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두 줄기의 빛이 먹구름을 베어 가르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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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눈송이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내 손과 검로 위에서 한계선은 베어졌다. 나는 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았다. 내 검로가 남긴 흔적이 뚜렷하게 대지와 산 위로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의 끝자락을 바라보며, 나는 성검과 대공의 검을 땅 위로 꽂았다.
네 번째 재앙, 거인은 쓰러졌다.
에버노드는 무너지지 않았다.
베어진 하늘 속에서, 태양이 밤을 깨부수고 찬란하게 빛을 쏟아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