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3 - 53. 주인공과 성녀 (3)
주민들이 에버노드로 돌아오고 난 후로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했다. 퀘노어 대공은 내친김에 중단된 하지 축제를 다시 열었고, 우리 파티는 사흘 동안 전쟁의 압박 없이 순수하게 축제를 즐겼다. 그리고, 축제 마지막 날의 행사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나 다름없다.
말해 뭐할까. 기사들의 술판이다.
쾅-!
길쭉한 나무 테이블 위로 무식하게 커다란 술잔이 하나 얹혔다. 술잔의 가장자리를 따라 에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누구의 술잔인지 물어 뭐할까, 게오르그의 것이었다. 이 녀석은, 이미 제대로 된 술자리가 시작되기도 전에 홀로 취한 거 같은 텐션이었다.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온몸에서 술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햣하-! 오늘은 봉인 해제다-!!”
목청껏 알코올 해방의 날을 부르짖으며 게오르그는 술잔을 들어 올려 보였다. 무슨 리터 단위로 세어야 할 거 같은 술잔을 들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기사단장. 뭐라고 해야 할까. 엄청 낭만은 있었는데, 솔직히 저 옆자리에 앉기는 많이 부담스러웠다.
“뭡니까, 게오르그 단장님. 오늘 보여주시는 겁니까?”
“얘들아, 다들 잔 안 채우고 뭐하냐! 혼자 그만 마시고 옆으로 통 좀 돌려라!”
“원샷! 원샷!”
그리고 원샷을 부르짖는 미친놈들. 게오르그는 기어코 자리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주목하며 원샷을 때리라고 할 때까지 어깨를 으쓱거리며 흥을 돋우었다.
“좋아, 다들 내가 이 잔을 비우는 것을 원하는 것 같으니, 먼저 시범을 보이도록 하지. 다들 나를 따라 술잔을 들어라!! 내가 비우면 너네도 마시는 거다!!”
“우오오오오!!”
이야. 술 좀 즐길 줄 아는 녀석인데. 나는 감탄 반, 질림 반의 눈빛으로 기사들의 호응을 즐기는 게오르그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얼씨구, 눈썹이 아주 그냥 춤을 추고 있었다. 게오르그는 기사들을 한 바퀴 쭉 둘러보더니, 그대로 에일을 입에 때려 붓기 시작했다. 아니, 입이 아니라 목구멍을 열고 위장에 때려 붓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다.
“게오르그! 게오르그!”
“마신다! 마신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게오르그는 텅 비어버린 술잔을 보여주며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돌았고, 기사들은 저 미친 주당의 흡입력에 자극이라도 받았는지, 환호하며 제 술잔을 들어 똑같이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반쯤 개판이 되어버린 술자리를 바라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떠들썩한 것도 나쁘지 않네요.”
다프네 역시 양손으로 술잔을 붙들고는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취해서 웃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기분이 좋아서 절로 나오는 미소 같았다.
“전쟁터의 소음보다는 훨씬 듣기 좋은 소음이에요.”
“맞는 말이야. 뭐, 저 근엄한 척하던 북부의 기사놈들이 까고 보니 이런 술쟁이라는 건 조금 깨긴 하지만.”
나는 내 잔을 내려다보았다. 나무잔에 따라진 술은 무슨 색인지 알 수 없었다. 잔 위로 내 얼굴이 나타났다가 다시 흔들리며 사라졌다.
“우리도 건배할래요?”
다프네가 잔을 내밀어왔다. 나는 쿡쿡거리며 웃으머 잔을 들어 마주쳤다.
“그런데, 일로이는 아직 술 마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약주.”
다프네는 아직 내가 몸에 감고 있는 붕대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술을 조금씩 들이켰다. 청량감. 찝찝한 달짝지근함과 끝에 남는 쓴맛. 특별할 건 없는 맛이었지만, 맛있었다. 아는 맛이라 그런가.
마리안느는 술을 마시지 않지만, 용케도 자리에 나와 앉아있었다. 손에 들린 저 나무잔에는 아마 물이 담겨 있겠지. 그녀는 항상 그녀답게, 이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그녀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눈을 감고 술처럼 물을 홀짝이고 있었다.
“뭐야. 이미 대판 마시고 있었군.”
그리고,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온 퀘노어 대공과 루크는 이 풍경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기사들은 한층 더 왁자하게 대공과 루크를 맞아주었다. 전혀 그렇게 생겨 먹지 않은 주제에, 퀘노어 대공은 씨익 웃으며 기사들의 환영을 즐겼다.
“자자, 내가 건배사 한 번 하지. 다들 잔은 채웠나?”
퀘노어 대공은 자연스럽게 잔을 하나 집어 들었다. 기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술통을 다시 돌리기 시작했다. 빈 잔에 다시 술이 채워지고, 분위기는 더 달아오른다.
“건배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행시로 하지. ‘용사’. 누가 운 좀 띄워봐.”
퀘노어 대공은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으악. 나는 기겁하며 입꼬리를 괴상하게 뒤틀었다. 제발, 그런 거 좀 하지 마. 물론, 대공은 내 기겁한 표정을 보고는 더 좋아서 잔을 아예 높이 치켜들었다. 아, 그냥 무표정으로 있을걸.
““용!!””
“용사님!”
제발.
““사!!””
“사랑해!!”
““사랑합니다!!””
시발.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단순하게 날 부끄럽게 할 수 있는 거냐. 나는 아예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아버렸고, 저 악질 새끼들은 그런 내 반응을 보며 한껏 웃으며 즐기고 있었다. 남 돌리기 좋아하는 건 여기 사람들 특징인 건가. 몇 년 후의 카린이 걱정될 따름이었다.
나는 얼굴이 시뻘개진 채로 고개를 들어 술을 마셨다. 마리안느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고, 게오르그는 기사들과 웃고 떠드느라 바빴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게 건배를 권하고, 잔을 마주치면 신나서 입에 술을 들이붓는 기사들.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누가 더 마물을 많이 쓰러트렸을지 계산하는 기사들.
그리고.
“헤헤헤. 일로이이.”
어느새 취해버린 채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바보 같은 웃음을 짓는 다프네. 다프네는 내 옆으로 완전히 바싹 붙어오며 얼굴을 내 팔에 기대었다. 몇몇 기사들이 그 광경을 눈치채고는 술을 들이켜며 슬쩍슬쩍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물 마셔, 물. 너 취했어.”
“알아요. 헤헤.”
그리고는 내 팔에 턱을 툭, 올리며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저도 사랑해요.”
다프네의 보랏빛 눈이 연회장의 조명에 반짝이고 있었다. 새삼, 참 예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래, 그래, 라고 대꾸하며 다프네에게 물잔을 가져다주었지만, 다프네는 무시하고는 다시 내 팔에서 얼굴을 떼고는 술을 마셨다.
“쯧쯧.”
“재미없기는.”
나를 향한 비난의 눈초리. 그리고 속닥거리는 소리. 내가 눈빛을 날카롭게 만들며 기사들을 돌아보자,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돌리며 자기 술잔을 찾았다.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다프네와 기사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웃으며 다시 술잔을 채웠다.
술과 이야기가 떠돌았다. 나는 취해가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함께 취했다. 대공, 루크, 리스, 헤밀, 세린, 한스, 아드리안…. 나는 기사 하나하나의 웃음 짓는 얼굴을 담으며 눈을 감았다.
.
.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해야겠군, 일로이. 이건 몇 번을 해도 부족할 테지.”
대공이 내 손을 힘차게 쥐며 말했다. 8월 중순, 우리는 이제 왕도로 돌아가기로 했다. 북부의 바람은 이제 서늘해지기 시작했고, 밤은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 이제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도 하루만 더 머물고 가라는 말을 이기지 못한 결과였다.
“자네는 거인을 쓰러트린 그날부터, 아니, 우리 기사들과 함께 순찰을 나서던 그날부터 에버노드의 가족이 되었네. 앞으로 영원히, 그렇게 남을 것이고 말이야.”
그렇게 나를 붙잡아놓고,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퀘노어 대공은 그러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대공의 뒤로는 에버노드의 중진들이 성대하게 우리를 배웅하러 몰려 나와 있었다. 굳이 오지 않아도 되는 다른 이들은 성벽 위에서 우리 파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자네의 뒤에는 항상 에버노드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나는 대공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처음 이 성에 들어올 때와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다.
“에버노드가 저를 기억하듯, 저 역시 언제나 에버노드를 기억하겠습니다.”
“언제든 찾아오게. 자네와 게오르그, 다프네, 마리안느의 자리는 언제나 남겨둘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돌아서려는 내 앞으로, 쭈뼛거리는 카린이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이냐고, 내가 고개를 슬쩍 갸웃거리자 카린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용사님이랑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이 절대 에버노드와의 마지막은 아닐 거다. 다시 만날 기회는 앞으로 많을 거다.
“…이번에도 약속해줄 수 있어요?”
카린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고, 나는 기꺼이 내 손을 내밀어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카린은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출발한다!!”
나는 말에 오르고, 앞을 바라보았다. 왕도로 가는 길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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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가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렸다.
소식은 날개를 단 듯 빠르게 전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세 번째 재앙이 쓰러진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들려온 낭보에, 전 대륙이 기쁨에 휩싸였다. 성녀의 퇴출로 논란이 없잖아 있던 용사 파티였기에, 그 놀라움은 두 배였다. 특히 에버노드를 위시한 북부의 다른 도시들은 노심초사하며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승전보를 듣고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그리고, 에버노드와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바크틴스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은 날아들었다.
“성녀님 덕분에 위급한 환자들이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이걸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바크틴스의 지방관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감사 인사를 했다. 방금 골절상을 입은 환자의 다리를 말끔하게 고치고 천막 밖으로 내보낸 차였다. 많이 호전되었다는 말은 성녀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아이시스는 머리에 추가 달린 것처럼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에요.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더 불러주세요. 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더 남아있을 수 있으니까.”
환자를 돌보면 돌볼수록, 아이시스의 치유 마법은 더 성장했고, 마나는 불어났다. 첫날은 다섯 명만을 돌볼 수 있던 것이 몇 주가 지나니 열다섯 명은 거뜬하게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이시스는 결코 그 성장에 기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치유 마법이 성장했다는 건, 그만큼 다친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니까.
“…그게 말입니다, 성녀님.”
지방관은 주저하며 말을 꺼내었다. 아이시스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 아닌, 괴로움에 휩싸인 주저함이었다.
“이제 이곳에서 성녀님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아이시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바크틴스의 주민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 다른 도시로 가게 될 겁니다. 언제까지 이 임시 부락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을 살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치료할 수 있는 환자의 상태는 더 악화할 거고,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인력을 낭비하는 셈이 됩니다.”
지방관이 아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허 위로 새로 도시를 개발하기는 하겠지만, 상태를 보면 아시다시피 당장 지금은 행정구역으로 써먹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 않습니까. 도시의 재건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면 그때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겠지요.”
지방관의 말은 무겁게 아이시스의 속을 찔러댔다.
“그럼… 저는….”
아이시스는 길 잃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이 되어 말을 더듬었다. 그런 아이시스의 뒤로 사제 하나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바크틴스를 떠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아이시스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희는 이제 아무런 수확도, 복구의 진전도 보지 못한 채로 성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말인가요…?”
사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 눈이 안타깝다는 듯 아이시스를 보고 있았다.
“아뇨. 얼마 전에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새로운 소식이요?”
사제는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었다.
“용사 파티가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리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입니다.”
아이시스의 동공이 확장되며 떨렸다. 쓰러트렸다고. 네 번째 재앙을. 자신과 용병 없이? 네 번째 재앙의 공략전이 정말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저 무모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패퇴할 것이라 여겼는데, 도대체 어떻게? 대체 무슨 수로…?
“네 번째 재앙을… 정말 쓰러트렸다고요? 용사가?”
아이시스는 혼란에 빠져 헤매는 표정을 지었다. 사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이곳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이제 없으니, 에버노드로 짐을 챙겨서 출발하라는 전언과 함께 말입니다.”
아이시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치료받아야 할 사람이 많았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많았다. 이대로 떠날 수는….
“아이시스, 이제 이곳의 환자들은 네 도움 없이도 살아남아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위급한 환자들은 진작에 다 치료했잖나.”
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용병, 아르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자신도 혼란스럽다는 듯 사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네 번째 재앙이 쓰러졌다고?”
“예. 용사가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렸다는 소식은 지금 전 대륙으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아르옌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사제는 여전히 멍하게 앉아있는 아이시스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출발하시죠, 성녀님. 에버노드에도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이시스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로이가 남겼던 말들이, 하나둘씩 그녀의 마음속에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