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4 - 54. 주인공과 성녀 (4)
북부로 가는 길에는 내내 비가 내렸다. 아이시스는 마차의 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빗물은 느리게 흘러내렸다. 한 번 내릴 때 많이 내리지 않았지만 비는 끊기지 않고 내렸다. 진창이 생기며 마차의 바퀴에 진흙이 늘어 붙었다. 해가 뜨고 땅이 마르면 바퀴에 붙은 진흙이 굳어 골치가 아플 거다.
“하루, 이틀 정도 늦춰지긴 했지만, 조만간 도착할 거 같습니다. 비가 그치지를 않는군요.”
마부가 창을 열고 그리 말했다. 아이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부는 창을 닫았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이시스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아르옌은 북부로 이동하는 내내 저리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고 말을 타고 있었다. 아르옌의 검은 우비는 이미 푹 젖어있었다.
“바크틴스에서의 구호 활동이 무의미한 건 아니었어요.”
아이시스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갈색 머리의 수녀가 입을 열었다. 수행원으로 사제들과 함께 따라온 간호 수녀였다.
“많은 사람이 성녀님께 구원받았습니다. 특히 중환자들을 많이 살릴 수 있었다고, 지방관께서 아주 기뻐하셨지요. 상태가 너무나 악화되어, 가만히 앉아 치료할 방도도 없이 그들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요.”
수녀는 담담하게 죽음을 입에 담았다. 아이시스는 속이 더부룩해지는 것을 느끼며 수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제들보다도 열심히 현장을 돌아다니며 환자를 치료하는 데 힘을 썼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해주시는 건가요?”
수녀는 다소곳하게 묵주를 쓸어내렸다.
“오는 길 내내 성녀님의 표정이 좋지 않았으니까요.”
수녀의 대답에 걸맞도록, 아이시스의 목소리에는 맥이 없었다. 몇 주간 많은 걸 보았다. 그 풍경은 아이시스를 꿈에서도 괴롭혔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 죽어가는 사람의 씨근덕거리는 숨소리. 형체를 잃어버린 얼굴과 짓뭉개진 팔다리.
아이시스가 용사를 만나기 전 치료하던 이들은 이송된 환자들이었다. 아이시스는 찾아오는 그들에게 치유 마법을 베풀었고, 그들은 아이시스에게 감사해했다. 아이시스는 그들의 감사에서 충족감을 느꼈고, 사명감을 가질 수 있었다.
파티를 박차고 나서기 전 치료하던 게오르그나 아르옌, 일로이는 고통을 아주 잘 견뎠다. 그들은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어도, 고통스러운 티를 잘 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현장은, 바크틴스의 폐허와 지저분한 임시 부락 속의 환자들은 몸이 치유되어도 결코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다른 환자들을 걱정하거나, 텅 빈 눈과 목소리로 아이시스에게 감사하다는 말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그건, 이전에 아이시스가 겪어보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청교회와 용사 파티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성녀는 너무나 어리숙했고, 어렸다.
“말씀도 전해 들었습니다. 끝까지 바크틴스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셨다고.”
수녀는 대견하다는 듯 그리 말했지만, 아이시스는 그것을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한 의심이, 그리고 죄책감이 계속 끊이지 않고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그때 아르옌의 선택은 최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승률이 0에 수렴하는 싸움을 하는 건 자신들에게도, 병사들에게도, 바크틴스의 주민들에게도 하등 좋을 게 없었다.
정말, 정말 그게 최선이 맞았을까. 어느 정도의 희생을 담보로, 가능성을 얻어 세상의 멸망을 막아내는 것이 정말 최선의 선택지였을까.
“용사 파티에서 추방된 후에도 피해 복구에 솔선수범해 나서실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성녀님께서 괜히 성녀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아니에요.”
아이시스는 반사적으로 그리 말했다. 칭찬은 칼처럼 날카롭게 아이시스의 마음을 후볐다. 그게, 아니다. 나는, 나는.
“…성녀님?”
갑자기 칭찬을 부정하고서는 새파래진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젓는 아이시스를 바라보며, 수녀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시스는 그렇게 어깨를 떨다가, 이내 파르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제발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그때 우리는 옳은 선택을 한 것일지, 용사의 선택에 반(反)한 것이 맞았을지.
“나는….”
아이시스는 말이 막힌 듯 그리 말하고는 다시 답을 구하듯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르옌이 다시 보였다. 아르옌은 물론, 지금도 아이시스에게 상냥했다. 함께 하는 동료들을 챙길 줄 알았고 마물의 습격이 있다면 나서서 정리해주었다. 평소의, 평소의 아르옌이다. 그에게 지금 아이시스의 생각을 묻는다면 어떤 식으로 대답을 들려줄까? 화를 낼까. 그렇지 않으면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여줄까.
“미안해요.”
아이시스는 그리 말하고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좀처럼 마음이 정돈되지 않았다. 사실, 지난 몇 달간 계속 정돈되지 않고 점점 더 흐트러지기만 했다.
“고민이 있다면, 떠안으려 하지 말고 제게 말씀해주세요.”
수녀는 상냥하게 말했다. 아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가 진 고민을 고백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아이시스 본인조차 전부 설명해낼 수 없었으니까.
빗줄기가 얇아지고 있었다. 빗소리에 묻혔던 숲의 소리가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서늘해진 공기가 감돌았다. 북부는 8월 중순부터 날씨가 서늘해진다고 했다. 비가 내리자 기온은 더 떨어졌다. 사흘 만에 드디어 비가 그치고 날이 개었고, 성녀 일행은 숲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이 숲만 지나가면 에버노드까지는 정말 금방입니다. 어디 불편하신 점은 없는지….”
마부는 아이시스의 눈치를 보며 물었고, 아이시스는 금방 고개를 저어 주었다. 똑, 똑. 풀잎이 빗방울을 떨어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냇물이 흐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숲의 마지막 나무를 지나 보내자, 광활한 북부의 들이 펼쳐졌다.
“저 언덕 너머로 보이는 성채가 바로 에버노드입니다.”
마부가 아이시스에게 귀띔했다. 아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방금 마부의 말에서 이상한 점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한 채로.
“웅장하지 않습니까? 단일 성채로는 이 왕국에서 가장 큰 성이라고들 하더군요.”
에버노드로 향하는 언덕을 올라가며, 마부가 관광지를 설명하듯 말했다. 성채가 더 잘 보일수록, 가까워질수록 아이시스의 동공은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성채가 너무, 멀쩡했다.
물론,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여전히 재앙이 휩쓸고 간 바크틴스의 폐허를 기억하는 아이시스는 인식과 현실의 부조화에 마차의 창틀을 붙잡고는 끊어지는 숨을 내쉬었다.
‘바크틴스의 모든 사람을 죽이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그렇게 크라켄을 상륙시켜, 육지에 놈의 몸을 묶어 재앙을 쓰러트린다고 하자. 그럼 남은 이들은 어떻게 할 거냐? 그 상륙에 희생당할 이들은 누가 책임지지?’
용사의 말대로 죽은 이들을 책임져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친 사람들을 책임져줄 사람도, 자신이 파티에서 탈퇴한 이후 용사의 명에 따라 바크틴스로 향할 때까지도 없었다. 아이시스의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고개를 돌려 밖을 보니, 아르옌이 말을 멈춘 채로 에버노드의 성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아르옌답지 않게, 동요를 보이고 있었다. 아이시스는 그 동요에서 – 자신이 붙들고 있던 믿음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아, 저기 에버노드에서 마중을 나오는군요.”
성문이 열리고, 에버노드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 차림의 기사들이 아이시스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아이시스는 마차에서 내려 다가오는 기사들을 맞이했다.
“반갑습니다, 성녀님. 에버노드 기사단의 총 기사단장, 리스 스완슨이라고 합니다. 바크틴스에서 이곳까지 바로 오셨다고 들었는데, 수고가 많으십니다.”
“…성녀, 아이시스 플룸이라고 합니다.”
바크틴스의 지방관과는 달리, 에버노드의 총 기사단장의 얼굴에는 수심이 없었다. 아이시스는 입을 열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수 없었다. 그를 확인하는 순간, 정말 자신 안의 무언가가 끝장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렸다고요.”
아르옌이 그때, 먼저 입을 열었다. 리스는 고개를 들어 아르옌과 눈을 마주치더니 살짝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예. 용사님 덕분에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릴 수 있었죠. 당신은….”
“지금은 성녀의 호위를 맡은 아르옌 엘미온입니다.”
아르옌의 목소리에는 일종의 조급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리스는 아르옌을 바라보더니 미간을 슬쩍 좁혔다.
“혹시, 이전에 용사 파티에 속해 있었던 용병분이 맞습니까?”
아르옌은 그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뭐, 그쪽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요.”
리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길을 안내하려 다시 말 위로 올랐다.
“말해주십시오.”
돌아가려는 리스의 발걸음을 아르옌의 목소리가 붙잡았다. 리스는 고개를 돌려 아르옌을 바라보았다. 아르옌은 혼란스럽고, 어딘가 분노한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 용사가, 그놈이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렸습니까.”
“예. 용사님은 에버노드의 성채를 지켜내며, 한계선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 얼어붙는 지옥 속에서 홀로 네 번째 재앙, 거인과 싸워 그를 베어버렸습니다.”
리스는 똑똑히 들으라는 듯 그리 말했다. 성녀는 용사를 강력하게 두둔하는 리스의 태도를 보며 눈을 감았다. 아르옌이 물으려 하면 할수록, 리스의 입에서 증언이 나오면 나올수록, 아이시스의 머리에 일기 시작한 균열은 크기를 키워갔다.
리스는 아예 말머리를 틀어 아르옌과 마주했다.
“보십쇼, 당신들이 우리 용사님과 대체 무슨 갈등을 빚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당신들이 용사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미묘한 적개심. 총 기사단장은 고삐를 거머쥐고는 서늘하게 바뀐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곳, 에버노드에서만큼은, 당신들 입조심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디서 돌팔매라도 맞기 싫다면 말이죠.”
리스의 말은 마치 폭탄을 떨어트린 것처럼 일행을 멍하게 만들었다. 용사의 평판이 아주 좋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수행단원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앞서가는 리스를 보았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나.”
“그 무뚝뚝하고 말 없던 용사를….”
수행 단원들이 쑥덕거리는 소리. 하지만 아이시스의 귀에는 제대로 그들의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홀린 듯, 성녀 일행은 리스의 뒤를 따라 에버노드에 입성했다. 리스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온 수행원들을 돌아보며, 엷게 웃었다.
“에버노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성녀님.”
아이시스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길을 걷는 아이시스는 휘청거리지 않기 위해 옆의 수녀를 꽉 붙들어야만 했다.
겉으로 보이는 피해는 없었다.
바크틴스의 임시 부락에서 들려오던 비명과 신음, 통곡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얼굴에 미소를 띠고는 골목골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이 시끄럽게 소리치는 소리, 장사치들이 호객하는 소리, 마차가 굴러가는 소리. 에버노드는, 그대로였다.
머리가 어지럽다. 속이 메스꺼웠다. 바크틴스에서 맡았던, 상처가 썩어가는 냄새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지독한 약의 냄새가 올라왔다.
에버노드의 공기에서는 풀과 나무의 냄새가 났다.
“용사님 덕분에 성채가 온전히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주민들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대공과 용사께서 목숨을 걸고 거인이 성채로 진입하는 걸 막아준 덕분입니다.”
‘해안가로 저 괴물을 다가오게 해서는 안 된다. 넓은 바다는 물론 안 되겠지. 좁은 해협에서 놈을 맞아 상대해야 해. 해협 사이에 놓인 섬들을 활용하면 가능하다.’
“그게, 가능했다고?”
아르옌의 말끝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런 무모한 짓을….”
“그 무모한 짓의 결과는 보다시피, 이렇습니다.”
리스는 아르옌의 혼잣말을 자르고 들어오며 그리 말했다.
“바크틴스의 피해 상황은 상당히 심각하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리스는 고개를 돌리며 에버노드의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용사님은 아마 그곳을 지켜내지 못한 것을, 줄곧 마음속에 품고 있었겠죠.”
“당신이 제멋대로 저 용병을 따라 파티를 탈퇴할 때, 용사님은 당신을 구태여 찾아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전후의 복구를 지원하고 상처 입은 자들의 마음을 보듬어주기를 바랐지요.”
안드레 주교의 말이 지금 떠오른 건 어째서일까.
“그렇기에 이곳에서 더욱 절박하게 싸움을 벌였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무. 사명. 정의.
아이시스가 믿고 있던 단어는 낱말로, 의미 없는 선으로 하나하나 해체되었다. 도대체 무엇이 의무였고, 무엇이 사명이며 뭐가 정의냐. 바크틴스의 무너진, 고통받는 모습? 그리고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으로 재앙을 잡아낸 것? 그렇지 않으면….
“대공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느새, 아이시스는 스트로프 가문의 저택 앞에 도달했다. 아이시스는 눈에 초점을 잃은 채로, 몸의 감각을 상실한 채로 계단을 걸어 올라가 대공의 집무실에 도달했다.
똑똑똑.
리스가 문을 두드리고는,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집무실의 가운데, 북부대공, 퀘노어 스트로프가 앉아있었다. 그 강대한 기척에 아르옌은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고, 아이시스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일행을 안내해준 리스는 대공에게로 다가가 무언가 귀엣말했다.
“공교롭군. 하필 일로이 일행이 출발하고 이틀 후에 도착하다니 말이야.”
퀘노어 대공은 새파란 눈으로 문가에 선 성녀 일행을 응시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버노드에 온 걸 환영하네, 성녀.”
대공은 그들의 앞에 서서 팔짱을 끼더니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었다.
“그래서, 그대들은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는가?”
“전후 복구의…, 도움을 드리러 왔습니다.”
복구에 정말 그들이 도울 일이 있을까? 도우러 왔다는 아이시스의 목소리가 쥐구멍으로 기어들어 가듯 작아졌다. 그런 아이시스의 모습을 바라보던 퀘노어 대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벽 복구는 이번 달 내로 끝나네. 무너진 집도 재건축에 들어갔고, 주민 중에서는 성녀, 그대의 보살핌이 필요할 정도로 다친 사람은 없어. 굳이 그대가 필요한 곳이라면, 전후의 부상자들을 치료해주는 정도일까. 그들마저 아주 위급한 이들은 고비를 넘긴 상태지만 말이네.”
퀘노어 대공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바크틴스 때와는 달리, 아주 그들이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공은 팔짱을 낀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누구보다 그대의 도움이 필요했던 건 일로이였네.”
아이시스의 동공이, 다시 한번 진동했다.
“전투를 끝내고 성으로 돌아온 일로이는 반쯤 시체가 되어있었어. 그의 강건한 정신이 아니었다면, 버텨내지 못했을 정도로 깊은 상처도 있었네.”
대공의 파란 눈은 아이시스를 꿰뚫듯 바라보고 있었다.
“일로이가 아직 성에 남아있었더라면 그대에게 곧장 치료를 부탁했겠지만, 지금은 부질없는 이야기겠지.”
퀘노어 대공은 그리 말하고는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럼에도 그대가 일로이와 떨어지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
대공은 손을 내밀었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다. 짧은 시간이겠지만, 잘 부탁하네, 성녀.”
아이시스는 파들거리며 떨리는 손을 내밀어 퀘노어 대공의 손을 맞잡았다. 이미, 그녀 속의 무언가가 부서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