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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55화 (56/158)

Chapter 55 - 55. 필요에 의한 (1)

비는 운 좋게도 우리가 출발하고 하루 뒤에 멎었다. 그 덕분에 왕도로의 귀환은 아주 순조로웠다. 에버노드를 떠나기 전 왕궁에서 내린 명령은 딱 하나였다. 왕도 인근에 도달한다면, 바로 입성하지 말고 인근 도시에서 잠시 머무르며 왕궁에 연락을 보낼 것.

그렇게 우리는 왕도에서 말을 타고 두 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의 도시에서 왕궁의 허락이 떨어지거나 다른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소도시인데다가, 얼굴을 함부로 드러내놓고 다닐 수도 없어서 우리는 한 여관의 방을 빌려놓고 가만히 죽치고 앉아있었다. 다프네가 어디선가 가져온 플레잉 카드로 할 수 있는 게임은 죄다 해보는 건 덤이었다.

“왜 바로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던 걸까요?”

다프네가 마리안느의 패에서 카드 한 장을 뽑으며 중얼거렸다. 이번 게임은 도둑잡기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가장 끝의 카드를 뽑은 다음, 그 옆으로 내 패를 내밀었다.

“개선식 때문이겠지요. 영웅의 개선을 어떻게 연출하느냐가 사기에 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함께 북부로 지원을 나섰던 기사, 레너드가 내 패를 뽑으며 그리 말했다. 내 패에 있던 조커가 레너드의 패로 이동했다. 왕도에서 우리와 함께 파견되었던 다른 기사들은 파견 기간을 채우기 위해 에버노드에 남았고, 레너드만이 보고를 위해 우리와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왕도의 사람들은 개선식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개선식을 여냐고 불만이 많겠는데.”

내가 우스갯소리를 하자, 게오르그가 옆에서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옛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조커를 뽑았거나.

“지난번 개선식 때는 힘들었지. 크라켄을 잡던 과정에서 내부 잡음이 없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우리끼리 완전히 날이 선 상태에서 보여지는 건 화목한 용사 파티를 연출해냈어야만 하니, 얼마나 골치가 아팠는데.”

게오르그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와 아르옌을 지켜보는 건 말 그대로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일로이.”

“…그때는 그랬겠지.”

게오르그가 일로이와 아르옌의 갈등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애초에 말릴 수가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이었다. 세계를 멸망시킬 재앙이라는 존재 앞에서 절충안이란 나올 수 없었고, 죽음의 수량을 두고 토론할 수밖에 없었다.

“뭐, 이번에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개선식에 참여할 수 있겠군.”

패에 한 장의 카드만을 남겨두고 있던 게오르그가 손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째로 이기고 있는 거야. 지난번에 술귀신이 들려 술을 마셔대던 것도 그렇고, 사실 조용한 척하면서 제일 잘 노는 게 아닐까.

“나는 출정식에서 보여줬던 거 반만큼 해도 대성공이라 생각한다.”

나는 인상을 확 찌푸렸고, 레너드가 킬킬거리며 게오르그의 말에 동조했다.

“저도 그때는 놀랐습니다. 세 번째 재앙의 출정식, 개선식에는 제대로 말을 하지도 않던 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은 몰랐죠.”

그리고, 레너드가 손을 털고 일어났다. 내 손에 남은 패는 한 장. 마리안느가 내 손에서 패를 뽑으면 나는 끝이었고, 남은 건 다프네와 마리안느의 싸움이었다.

“이번 연설도 기대해보겠습니다.”

“…그때도 딱히 준비하고 한 건 아니었어요.”

다프네와 마리안느의 귀에는 우리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프네가 마리안느의 패에서 카드를 한 장 뽑고는,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마리안느는 늘 그렇듯 표정 변화가 없었다. 저런 게임에서는, 사기가 아니냐고 따져야 할 정도로 유리한 것 같다.

“[쳇, 내가 첫 번째로 통과하게 될 줄 알았건만.]”

참고로, 난 대리 게임 중이었다. 게임 도중부터 성검이 슬쩍슬쩍 가운데 카드를 골라라, 맨 끝에 있는 카드를 고르라며 자기도 게임을 하고 싶다는 티를 내기 시작했기에 그냥 내친김에 성검이 말하는 대로 게임을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드를 잘 고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언제 게임을 하고 싶다고 말했느냐! 나는 그냥, 네가 하는 게 하도 답답해서….]”

아, 네. 그러셨어요? 정말 게임을 하고 싶지 않으셨나 보네요.

“[그런 식으로 대꾸하지 말거라!]”

나는 웃음이 터지는 걸 막기 위해 이를 꽉 깨물며 다리를 꼬집었다. 그 와중에 마리안느와 다프네의 싸움은 점입가경의 경지로 들어가고 있었다. 뭐가 재밌냐고 하면, 다프네의 표정 변화와 그에 대비되는 마리안느의 무표정이 재미있었다.

“으….”

다프네가 손을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다프네의 손에 남은 카드는 한 장. 마리안느의 손에 남은 카드는 두 장. 한 장은 조커, 한 장은 게임을 끝낼 카드. 다프네는 마리안느의 눈을 노려보며 어떻게든 동요를 찾아내려고 하고 있었지만, 마리안느의 눈에서 그런 게 보일 리가 없었다. 동요는 되려 마리안느의 눈을 바라보는 다프네의 눈에 일고 있었다.

“이건가…?”

다프네가 눈을 딱 감고 한 장의 카드를 집었을 때, 여관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레너드가 문을 확인하러 갔고, 다프네는 안도 반, 아쉬움 반의 한숨을 내쉬며 카드를 정리했다. 끼익, 낡은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고, 레너드는 문가에서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대략 1.5초가 흐른 뒤.

“여왕 폐하를 뵙…!”

“조용. 다른 사람들도 인사하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라.”

여왕, 아그네스 블랑쉬 뤼미에르가 후드를 걸친 채 입가에 손을 올리며 방에 들어오고 있었다. 여왕 특유의 피처럼 붉은 눈이 후드 새로 비치고 있었다. 3, 4인실인 방에 우리 파티, 레너드에다가 여왕과 호위 기사가 들어오니 방이 숨이 막힐 듯 좁아졌다.

“조금 어수선하긴 하구나.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여왕은 모자를 걷어 얼굴을 드러내었다.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뜬 채로 여왕을 맞이했다.

“폐하. 어찌 여기까지.”

“최초로 두 개의 재앙을 쓰러트린 영웅을 맞이하는데, 어떻게 내가 엉덩이 무겁게 앉아서 맞이할 수 있겠느냐.”

여왕은 농담하듯 말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내 바로 앞에 앉았다. 격의 없는 그녀의 모습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턱. 여왕의 손이 내 손 위로 얹혔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쥐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용사 일로이, 정말 잘했다. 우선 이 말부터 들려주고 싶구나.”

나는 황송하고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믿어주신 덕분입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이 너를 믿게 되겠지.”

여왕은 작게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선식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보도록 하지. 아마 지난번과 형식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용사 파티는 왕도의 대로를 쭉 걸어 왕궁까지 올 거고, 사람들이 네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게 될 거다. 출정식과는 달리, 네게 무어라 말을 시키지는 않을 거야. 그냥 네가 개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효과는 충분할 테니.”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겨우 행진하는 것만으로 끝내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크게 축하하기에는 아직 넘어야 할 산들이 몇 개 있으니 지금은 여기서 만족해야겠지.”

여왕은 아쉽다는 듯 그리 말하며 웃어 보였다. 하긴, 재앙을 쓰러트린 건 비단 나의 일이 아닌, 여왕의 일, 카이로스 왕국의 일로도 남는다. 그녀가 이리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너는 그냥 너대로 있으면 된다, 용사 일로이.”

“…그리하겠습니다.”

생각보다 과정이 간단해서 다행이었다. 여왕은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손을 천천히 내 얼굴 쪽으로 가져왔다. 나는 그 엷은 미소와 붉은 시선에 못 박힌 듯 얼어붙었고, 여왕의 부드러운 손은 내 얼굴에 와 닿았다.

“상처는 숨기지 말아라. 네가 사투를 벌이고 돌아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여왕의 시선이 내 어깨로 향했다. 옷 사이로 붕대가 슬쩍 드러나고 있었다.

“복장은 마치 방금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것처럼 해라. 네가 어떻게 싸웠는지 보여주어라. 그렇게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네 존재를 각인해라. 그렇다면 이제 내부에서도 지난번처럼 시끄러운 잡음이 나오는 일은 없을 거다.”

그리 말하는 여왕의 목소리는 씁쓸했다.

“네 싸움마저 정치로, 웃기지도 않는 무대로 꾸며야 하는 나를 용서하거라,”

“개의치 않습니다. 그게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면.”

여왕은 내 대답에 후후, 작게 웃음을 내뱉고는 얼굴을 쥔 손에 힘을 빼었다.

“그래도, 다른 건 출정식 때처럼 더 꾸미고 들어와도 괜찮을 거 같구나.”

여왕은 그리 말하며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앞머리가 슬쩍 가리고 있던 시야가 트이며, 여왕의 얼굴이 확실하게 보였다. 어딘가 호기심이 깃든, 차가우면서도 아름다운 얼굴. 내가 놀라 눈을 깜박거리자, 여왕이 쿡쿡 웃으며 내 얼굴을 놓아주었다.

“그래. 그렇게 내 앞에서 표정도 조금 더 다양하게 지어보아도 좋겠구나. 늘상 무표정이거나 황송하다는 듯한 표정이니 말이야.”

여왕은 멍하게 눈을 깜박거리는 나를 내버려 두고는 다른 파티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게오르그는 익숙하게 여왕과 인사했고, 마리안느는 늘 한결같은 태도였다. 다프네만이 나처럼 얼어붙은 채로 여왕에게 인사했다. 저 모습에 동질감과 친숙함을 느끼며,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지위를 그렇게 활용하겠다 이거지.]”

어쩐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성검의 소리가 들려왔다. 인사와 축하의 말을 전달한 여왕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문이 닫히며 여왕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우리는 폭풍이 쓸고 지나간 듯한 기분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 침묵이 지속되던 때, 게오르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방금 게임은 누가 이겼나?”

“…모르겠는데요.”

다프네가 이미 정리해버린 카드 뭉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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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정식으로부터 석 달이 가까이 지났다. 왕도의 주민들은 알음알음 들려오는 소문으로부터 용사가 기어코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리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이래저래 잡음이 많았는데, 결국 또 성공했군.”

“잘 모르겠어. 지난번에도 들려오는 소문들이 있었는데, 정말 용사가 해낸 게 맞을까?”

“쓰러트렸으면 그만이지, 안 그렇나? 아무리 말이 나와도, 결국 재앙을 쓰러트린 건 맞잖아.”

반응은 또 다양했다. 의심의 시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희망의 불씨는 지펴지고 있었고, 환호와 믿음 또한 함께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그들을 거리로 이끌었다. 용사가 성문을 열고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이미 거리는 사람으로 꽉 메워져 있었다.

영웅의 귀환을 보기 위해, 혹은 의혹을 찾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성문을 바라보았다.

덜컹.

문이 열렸다. 들어오는 건 용사 일행을 호위하는 왕도의 위병들이었다. 위병들의 너머, 말을 타고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철갑을 두른 기사들 너머로 – 방금 전투를 끝내고 돌아온 듯한 모습의 용사가 있었다. 지쳐 보이지만 강철같이 굳센 표정을 짓고서, 용사가 들어오고 있었다.

“…모습이 좀 달라진 거 같지 않아?”

“그러고 보니, 분위기도….”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어리숙함은 지워졌다. 용사가 다가오면서, 사람들을 아우르는 마력을 뿜어내었다. 사람들은 그에 경도되어 멍하니 용사를 바라보았다. 싸웠노라. 싸워 이겼노라. 온몸으로 그리 말하는 용사는 관중을 돌아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용사의 회색 머리 위로 빛나는 훈륜(暈輪)이 떠올랐다. 가시 돋친 훈륜은 광휘를 발하며 용사를 빛으로 감싸 안는 듯했다. 툭. 툭. 여기저기서 무릎을 꿇는 사람들이 나왔다. 청교회의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용사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다.

“저게… 용사의 모습.”

사람들은 홀린 듯 용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영웅. 용사의 모습. 누군가는 용사를 연호하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용사는 출정식 때처럼 하늘 높이 자신의 성검을 치켜들었다.

승리했다고.

성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거리를 찬란하게 비추었다.

의심하는 이들을 믿는 이들로. 어둠 속에 갇힌 이들에게는 빛을. 공포에 떠는 이에게는 용기를. 용사의 행진은 그렇게 왕도 전체에 새로운 빛을 비추며 왕궁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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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랜만에 용사의 방에서 눈을 뜬 나는 아침 식사를 하며 마리안느가 전해준 편지를 받았다. 발신인은 안드레 자빈 주교. 나는 편지를 뜯어 읽어보았다.

편지의 내용은 아주 간략했다.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린 걸 축하드립니다. 조만간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마리안느와 함께 잠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고, 마리안느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작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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