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6 - 56. 필요에 의한 (2)
이 아저씨는 카이로스 왕국을 무슨 제집인 양 자주 드나들어.
아무리 활동 범위가 넓고 비교적 자유로운 이단심문관의 수장이라고는 해도, 너무 자유로운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편지를 접어 다시 봉투에 넣어놓았다. 나는 열린 창문 너머로 펼쳐진 왕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침의 거리에서는 빵 굽는 냄새가 났다.
마리안느는 내 옆에서 조용히 커피를 따라주고 있었다. 함께 지내는 게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슬슬 그녀에게도 따로 살 집을 하나 구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본인도 계속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게 불편할 수도 있었으니까.
“여기서 지내는 건 안 불편해?”
마리안느가 커피를 따르다가 말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을 받는 마리안느의 묵주가 조용히 흔들렸다. 마리안느는 그 금색 눈동자로 나를 계속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내 질문에 대답을 들려주었다.
“불편하지 않습니다.”
“따로 필요한 건 없어? 여기가 넓지만, 실속이 있는 게 아니라서 부족한 점이 많을 건데.”
“성국에서 금전적으로 따로 충분한 지원을 해주고 있습니다.”
마리안느는 평소보다 조금 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그녀에게 익숙해지면서 어떤 미세한 변화를 더 잘 눈치채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나와 함께 지내는 동안 성격이 조금씩 바뀌어 감정의 변화를 더 많이 드러내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마리안느는 내게 커피잔을 건네고는 건너편으로 가서 앉았다.
“불편한 건 전혀 없습니다.”
“…네가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정말 불편한 점이 없어서 저렇게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불만이 있어서 저런 태도를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직 그녀에 대해 알아야 할 점이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나는 본론으로 들어가려 짐짓 목을 가다듬고는 이야기를 꺼냈다.
“집을 따로 알아봐 줄까? 네가 우리 파티에 속해 있는 한 계속 왕도에서 지내야 할 건데.”
마리안느는 내 질문을 받더니, 제 가슴께에 걸린 묵주를 내려다보며 살짝 눈을 깔았다.
“혹여 제가 이 집에 있는 것이 용사님께 방해가 되는지요.”
…이건 또 곤란한 질문이었다. 나는 구차하게 변명을 붙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방해는커녕 도움만 잔뜩 받고 있잖아.”
“그렇다면, 제가 여기를 나갈 이유도 없습니다.”
마리안느는 다시 내 눈을 바라보며 그리 대답했다. 마리안느는 그리 단정하고는 단정한 자세로 제 커피를 마셨다. 미묘해진 분위기. 나는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안드레 주교의 편지를 끌어다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안드레 주교께서는 왜 다시 만나자는 걸까.”
아이시스가 우리 파티를 탈퇴한 건도 잘 해결되었고, 다른 사건도 없을 텐데. 마리안느와 함께 만나자고 언급한 것을 보면, 그녀를 보는 김에 나까지 만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마….”
마리안느는 나를 바라보며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확히는, 내 얼굴이 아니라 얼굴보다 위쪽, 내 머리를 바라보며 말이다. 머리? 머리와 안드레 주교? 내 머릿속에 잠깐 잊고 있던 사실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 면류관….”
“예. 아마 성유물도 주교께서 이곳으로 넘어오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버터 바른 식빵을 입으로 집어넣었다. 바삭거리며 입 안에서 빵이 부서졌다. 나는 빵을 으적으적 씹으며 부서진 면류관을 떠올려 보았다. 그냥 가시덩굴이 되어버린 면류관 조각은 원래 들어있던 목함 안에 고이 넣어두었다.
“파편이라도 가져다 드리는 게 맞겠지.”
내 말에 마리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교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다. 단순하게 면류관이 부서졌다는 사실에 분노할 정도로 단순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어디까지나 면류관은 내게 증여하는 것이 아닌, 대여해주는 것이었으니까.
“그 자체의 힘이 아닌, 역사적 가치가 큰 유물이니까요.”
그렇게 역사적 가치가 큰 유물을 부숴버렸군. 나는 착잡해진 심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네게도 용무가 있어서 함께 보자고 하는 거겠지?”
“예. 저로서도 정확히 무슨 일일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은.”
막연히 이단심문관의 일이 아닐까 생각할 뿐이었다. 마리안느는 성기사이기도 했지만, 이단심문관의 일원이기도 했으니까. 오랜만에 원작을 떠올리며 청교회와 관련된 사건을 하나둘씩 떠올려 보았다.
“뭐, 만나보면 알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정리하고는 접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장 고민해봤자 해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안드레 주교가 나나 마리안느를 해치려 들려는 것도 아닐 테니까. 접시를 개수대에 담그고 물을 받으려 할 때, 문득 마리안느의 시선이 느껴져 뒤로 돌아보았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리안느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물끄러미,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마리안느의 은빛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늦여름의 아침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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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다시 만난 안드레 주교는 전에 보았던 것과 똑같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덥지도 않은 건지, 늦여름인데도 긴팔 검은 사제복 차림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용사님.”
반갑게 인사한 주교는, 내게 다가오고는 내 손을 덥석 쥐었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강한 안드레 주교의 아귀힘에 놀라며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네 번째 재앙을 격퇴하신 걸 정말 축하드립니다. 아니,”
나는 그 힘에 이끌려 거의 반강제로 주교와 악수했다. 주교의 실눈 사이로 회색 눈빛이 미세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좀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네 번째 재앙을 물리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내 손을 내려놓은 주교는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두 손을 모으며 마리안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안느는 주교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인사했다. 주교는 부드러운 미소로 마리안느에게도 인사를 건네었다.
“마리안느, 용사를 도와 훌륭하게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렸군. 자네가 정말 자랑스럽네.”
“과찬이십니다.”
안드레 주교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우리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까닥하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뭐, 공짜로 밥을 얻어먹는 걸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주교는 저번에도 먹었던 병아리콩 샐러드를 주문한 뒤, 두 손을 가볍게 마주치며 식탁 위로 올려놓았다.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리면서 입은 부상이 상당하다고 들었는데, 회복은 잘 되고 있는지요?”
“순조롭습니다. 지금은 간단한 수련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어요.”
안드레 주교의 가는 눈이 나를 살폈다. 주교는 그러더니 작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부상이 심각하긴 했나 보군요. 살피니, 그 여파가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세상의 멸망을 막아선 대가치고는 싸게 먹혔죠.”
회복할 수 있는 게 어디입니까. 나는 그리 말하며 쓰게 웃었다.
“싸게 먹혔다라.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리가 나왔다. 주교는 달가운 눈빛으로 제 샐러드 접시를 바라보았다.
“아직 다섯 번째 재앙은 관측되지 않았으니, 이번에는 천천히 대비하는 게 좋을 겁니다. 중간에 해결해야 할 일들도 있고…. 뭐, 용사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만요.”
“…아뇨. 말씀을 더 들려주시지요. 재앙에 관한 의견을 더 듣고 싶습니다.”
한 명의 의견이라도 더 참고하는 게 좋을 거다. 안드레 주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세계의 종말을 불러올 일곱 재앙. 그들은 신화시대에 만들어진, 악신들의 안배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빛에 패배한다면, 일곱 재앙이 깨어나 그들이 하지 못했던 일.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나설 것이라고요.”
주교는 식사용 나이프의 끝을 슥슥 문지르고 있었다.
“신화시대의 끝과 함께 신들의 안배는 하나둘씩 깨어나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은 인간들은, 신화시대의 유산과 함께 재앙에 맞서고 있지요. 사실상, 지금 시대는 신화시대의 연장선상에 놓인 셈이지요.”
‘뱀’, ‘메뚜기’, ‘크라켄’, ‘거인’, ‘안개’, ‘혜성’, 그리고 ‘근원’.
“뱀, 메뚜기, 크라켄, 그리고 거인은 용사께서도 아주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애초에 이름부터 이들의 정체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뱀은 세상을 한 바퀴 휘감아버릴 정도로 거대한 뱀. 메뚜기는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어버리고 모든 곡식을 먹어 치울 규모의 군단. 크라켄은 물의 마물과 함께 인간을 물에서 영원히 몰아낼 괴물. 거인은 온 세상을 얼어붙게 하고, 얼어붙은 세상을 평평하게 짓밟아버릴 순례자.
“다섯 번째 재앙, ‘안개’부터는 재앙의 개념이 생명에서 현상으로 전환됩니다. 그렇기에 관측이 더욱 어렵지요.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디에 있는지, 언제 닥쳐올지는 마법을 통해서 어렴풋이 예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 세계의 마탑에서 자료를 공유해가며 흔적을 찾고 있을 거다. 원작의 묘사에 따르면 성국에서도 따로 재앙을 추적하는 조직을 꾸렸다고 하니, 성국도 여타 국가들과 공조하고 있을 거다.
“어쩌면, 다섯 번째 재앙이 우리 대에, 용사님의 대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건 우리의 뒷세대에게는 아주 무책임한 발언이 되겠지만요.”
아니, 그렇게는 안 된다. 나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원작의 묘사에 따르면 겨울, 성탄일이 다가오는 때에 ‘안개’는 갑작스럽게 성국의 국경에 나타날 거다.
“재앙을 너무 쉽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 내뱉는 목소리가 생각보다도 더 굳어있었다. 안드레 주교는 내 어조에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재앙은 언제,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아요. 그들은 인간의 편의 따위를 봐주지 않으니까요. 아닌 말로, 당장 왕도 밖의 숲에 안개가 튀어나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혹은,”
안드레 주교는 물론 알고 있다며, 반박하려 입을 열다가, 내 표정을 보고는 무언가 깨달은 듯 입을 도로 다물고 눈썹을 까닥해 보였다. 하려던 말을 계속하라는 것 같았다.
“…성국의 어느 겨울날에 갑자기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겁니다.”
안드레 주교가 표정을 굳히고는 포크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무언가 아는 바가 있는 겁니까.”
“…조금이지만요.”
안드레 주교는 내 눈치를 보며 물었고, 나는 마찬가지로 그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마침 상황을 잘 넘길 만한 좋은 변명거리가 생각났기에, 재빨리 함께 가져온 면류관의 목함을 내밀었다. 마리안느가 옆에서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또 뭔가 이상한 계책이 떠오른 거냐.]”
성검이 팝콘이라도 튀기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주교는 어째서 내가 갑자기 이걸 들이미는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목함을 받았다.
“아, 그렇지. 감사합니다. 빌려드렸던 가시 면류관은 잘 사용하셨는지요? 네 번째 재앙을 격퇴하셨던 만큼, 성국의 선물이 도움이 되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예. 어떻게든.”
잘 사용한 정도가 아니죠. 나는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목함을 바라보았다. 안드레 주교는 내 표정을 수상쩍기 그지없다는 눈길로 지켜보다가, 목함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목함의 뚜껑을 쥔 주교의 손이 망설임을 담고 뚜껑의 접합부를 문질렀다. 안드레 주교가 눈썹을 구부렸다.
“그럼 면류관의 시험을 통과하신 겁니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말씀을 하신 건지….”
벌컥.
주교는 목함의 뚜껑을 열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가 열어본 목함 속에는 산산조각이 나버린 면류관의 껍데기만이 붉은 천 위에 올려져 있을 거다. 주교의 실눈이 전에 없이 크게 뜨이다, 이내 망연자실하게 그 안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이게, 대체… 무슨.”
어지간히도 당황한 건지. 안드레 주교는 말을 더듬으며 면류관의 파편을 집어 올렸다. 주교가 집어 올린 파편은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형태를 무너뜨리며 세 조각으로 다시 부서졌다. 주교는 당황스러움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용사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내 머리 위로 띄워진 훈륜을 마주한 안드레 주교의 눈이 튀어나오려는 듯 크게 벌어졌다.
까, 라고 말을 끝낸 입은 다물어지지 않고 미약한 침음성을 내보냈다.
“오, 신이시여….”
나를 바라보는 안드레 주교의 목소리가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