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7 - 57. 필요에 의한 (3)
나는 얼어붙은 안드레 주교를 내버려 두고는 재빨리 머리 위의 빛무리를 해제했다. 안드레 주교는 훈륜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내 머리 위의 허공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응시하고 있었다. 깜박, 깜박. 안드레 주교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내 앞에 놓인 수프가 식어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제가 헛것을 본 건 아니겠지요.”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안드레 주교의 말을 부정했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저는 면류관의 시련을 통과했고, 면류관의 힘 또한 얻게 되었어요. 물론 면류관의 그릇은 부서지고, 제 머리 위로 그 증표가 남았지만 말입니다.”
나는 지금은 텅 빈 내 머리 위를 검지로 톡톡 가리켰다. 안드레 주교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탄성과 침음성이 섞인 소리를 흘리며 양손을 맞잡았다.
“굉장히, 거룩한 모습이었습니다. 청교회의 독실한 신자라면 누구나 같은 반응을 보이겠죠. 마치, 옛 기록에 등장하던 신의 사도와 같은 모습 같았다고 말하겠습니다. 변한 건 비단 용사님의 머리 위로 떠오른 훈륜뿐만이 아니었으니까요.”
주교는 목함을 덮고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이제 면류관이 부서졌다는 사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안드레 주교의 관심사는 오로지 내 머리 위에 쏠려있었다.
“용사님께서 재앙에 관해 무언가 아는 바가 있다고 하신 것도, 설마 면류관의 힘을 받은 것과 관련이 있는 건지요.”
그리고 주교가 던진 질문은 내가 변명을 늘어놓기에는 딱 적절한 질문이었다.
“예. 완전히 보인 것은 아니었지만, 어렴풋이 재앙이 현현하는 모습들을 예지처럼 스쳐 지나가듯 볼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면류관은 나 이전까지는 개방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면류관이 내게 가져다준 기능 중 일부를 부풀려 말한다고 해도 문제가 되진 않을 터. 오히려 내 말을 경계하지 않고, 더 귀를 기울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머리를 잘 굴렸구나.]”
성검이 감탄하는 건지, 얄밉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면류관이 내게 거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건 사실이니까. 재앙이 현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니게 되는 게 아닐까. 그 와중에, 주교의 이마에 고민이 깃든 주름살이 잡혔다.
“그렇다고 해도, 면류관이 부서진 건 조금 곤란하게 되었군요. 어디까지나 성국 교황청에서도 용사님께 성유물을 수여하는 것이 아닌 대여하는 것이라 딱 잘라 말했기에….”
안드레 주교는 흠, 하고 숨을 내쉬며 턱을 괴었다. 툭툭, 주교의 울퉁불퉁한 손가락이 그의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생각을 뽑아내려는 듯했다.
“성유물의 힘을 돌려받을 방도는 없어 보이는군요. 사실 성국 측도 면류관 자체의 힘보다는 그 역사적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고 있었으니까요. 면류관의 본체만 무사했더라면 아무 말 없이 넘어갈 수 있었을 테지만, 이건 그냥 변명으로만 넘어가기는 힘들어 보이네요.”
안드레 주교가 목함 위로 손을 올려놓으며 자세를 바르게 고쳤다.
“이 문제는 당장 상의하기는 힘들 것 같으니, 일단은 다음 주제로 넘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교는 물을 마시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마 이번에 주교가 꺼낼 대화 주제가 오늘의 본제가 될 거다. 내가 흥미 반, 걱정 반으로 안드레 주교의 말을 기다리고 있자, 주교는 마리안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마리안느를 잠시 복귀시키고 싶습니다.”
의외의 부탁이었다. 나는 눈을 깜박이며 옆의 마리안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안느는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움찔하긴 했지만, 그 후로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리안느를 말인가요? 어째서?”
이단심문관의 일임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되물었다.
“청교회에게는 꽤 거슬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번 건은 비단 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긴 하지만요.”
“청교회에게 거슬리는 일이라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안드레 주교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 주교가 내뿜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무(無)에 가까웠던 기세가 짙어지더니, 무겁게 가라앉았다. 전투하려는 사람의 투기는 아니었고, 살기도 아니었다. 아마, 이게 본래 안드레 자빈의 기세겠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하기 전에, 제 본래 소속을 밝힐 필요가 있겠군요.”
안드레 주교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더니, 자신의 마력을 확 방출했다. 아마 소리와 기척을 차단하는 기능을 하는 방벽을 형성한 듯했다.
“청교회가 뿌리가 깊긴 하지만, 오로지 한 종류의 신앙만이 존재할 수는 없죠. 신은 더 이상 인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따라서, 신과 성인(聖人)이 남긴 가르침을 해석하는 방향에 따라, 청교회 내에서도 교파가 여러 갈래로 갈립니다.”
주교는 손가락을 뻗어 식탁 위로 나무줄기가 뻗어가는 듯한 모양을 그렸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꼭 이상한 곳으로 빠지는 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지요. 배교(背敎)는 처벌의 대상이 아닙니다만…, 이단(異端)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리 말하는 안드레 주교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청교회 본산의 공인을 받지 못한 교파를 주창한 이들, 그를 따르며 괴상한 신앙을 설파하려는 이들. 순진한 이들을 꼬드겨 타락의 길로 이끄는 이들. 신과 신화를 부정하고, 세상의 눈을 가리려 하는 이들.”
이단의 죄를 하나씩 말할 때마다, 공간의 온도가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저와 마리안느는 그들을 처분하는 이단심문관이라는 직책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 이름은 들어보셨을 테지요. 우리는 아주 은밀하게, 청교회를 위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처분…이라 하면.”
“이단의 꾐에 넘어가 그들을 따르는 이들을 잡아서 심문하고 성국의 재판에 회부하는 게 우리의 주 임무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면.”
이단들을 직접 처단하기도 하지요.
그리 말하는 안드레 주교에게서는 피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나는 주교의 눈을 바라보았다. 웃음기 있던 얼굴은 그 자리에 없었다. 본연의 임무를 설명하는 주교는 한 자루 칼같이 서늘한 예기(銳氣)를 두르고 있었다.
“이단과 관련한 사건이 생겼다는 소리입니까?”
“예. 제법 골치가 아픈 일이네요. 그간 놈들의 싹을 없애보려고 열심히 노력해봤습니다만, 부엌의 바퀴벌레도 아니고, 잡아내고 또 잡아내도 어디선가 기어 나오는 놈들이지요.”
안드레 주교는 포크로 샐러드를 콱. 찍었다. 양배추가 포크 끝에서 으스러졌다.
“용사님, 종말 숭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종말 숭배라니. 그런 꺼림칙한 말은 원작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르옌이 청교회와 척을 졌기에 원작에 나올 틈이 없었던 걸까.
“하긴, 그들은 아주 은밀하고 조용히 활동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는 것이 이상하겠죠.”
주교는 포크를 접시 위로 걸쳐 놓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청교회가 다양한 교파로 갈라지듯, 종말 숭배 또한 다양한 이유로 종말과 재앙을 숭배하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교는 왼손을 펼치고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세상의 종말을 원하는 이들, 순전히 재앙의 무시무시한 힘에 홀린 이들, 청교회를 증오하는 이들, 아무런 생각이 없는 범죄자들… 그러나 그들 중 가장 질이 나쁜 건,”
주교가 새끼손가락을 접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손바닥 속에 벌레라도 들었다는 듯이.
“신화시대의 악신을 숭배하는 이들이지요.”
안드레 주교의 목소리는 차가운 분노에 감싸여 있었다.
“그들이 신화를 응시하는 방식은 우리와 전혀 다릅니다. 세상을 멸하고, 혼란한 어둠으로 뒤덮고자 한 악신의 시야에서 신화를 해석하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신화시대에서부터 존재해온 그들은 아주 오래되고 사악한 이들이지요. 전에 언급했던, 재앙의 힘에 홀린 이들이나 범죄자들을 꼬드겨 종말 숭배에 편입하는 이들이 바로 악신 숭배자들입니다.”
나는 마리안느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안드레 주교와 마찬가지로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악신들은 신화시대에 모두 죽어 사라졌는데도, 그들의 미련은 여전히 이 세상에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싹을 보인 형태가 바로 종말 숭배입니다.”
안드레 주교는 묵주를 꾹 쥐다가 놓았다. 주교의 기색이 조금은 침착하게 바뀌었다.
“종말 숭배자들의 움직임을 이번에 포착했습니다. 교황께서는 가만히 주시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고요. 저는 곧 이단심문관들의 수장으로서, 대대적인 소탕 활동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그리고는 마리안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리안느의 실력을 직접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녀는 아주 강한 이단심문관 중 한 명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큰 전력이며, 이단들을 검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요.”
나는 마리안느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굳어있는 동시에 흔들리고 있었다. 입매는 딱딱했지만, 눈은 차갑고 혼란스럽다.
“그러니, 잠시만 그녀의 복귀를 허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용사님.”
나는 미간을 좁혔다. 물론, 저런 일이라면야 허가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주교의 복귀 요청을 들은 마리안느의 표정이 내가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읽을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있었기에, 그녀의 작은 변화도 눈치챌 수 있었다.
“…쉽게 대답해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그녀는 현재 우리 파티 소속이고, 말씀드렸다시피 언제, 어디서 우리가 필요하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우선 유보적인 대답을 들려주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는 끝날 겁니다. 그들이 포착되었다고 하는 곳도 카이로스 왕국 내니, 그녀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신속하게 복귀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당장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정보가 너무나 부족하니까요. 생각할 시간이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대답을 들려드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복잡했다. 만약, 정말 마리안느의 힘이 필요한 시점이고, 세상에 큰 해악을 끼친다면 나는 아마 마리안느를 보내줄 수밖에 없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최후의 방도를 쓰던가. 안드레 주교 역시 내 대답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리안느,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괜찮습니다. 용사님께서 허가해주신다면, 당장 도우러 가겠습니다.”
마리안느가 평정을 가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옆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마리안느의 손 위로 내 손을 올렸다. 마리안느의 손은 놀란 듯 흠칫하더니, 이내 떨림이 잦아들었다. 안드레 주교는 침묵 속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안드레 주교의 실눈 사이로 회색 눈이 번득였고, 나는 곤란함과는 다른 빛이 주교의 눈에 깃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주 미세한 호기심.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안드레 주교가 탁자 위로 손을 턱 올리며 말했다.
“정식으로 용사 파티에게 이번 일에 공조를 부탁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카이로스 왕국에서도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언질을 받았지만, 왕도와도, 성국과도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지요. 용사 파티가 하나로 움직일 수 있고, 재앙과 관련된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안드레 주교는 제 옆자리의 목함을 향해 슬쩍 눈길을 주었다.
“면류관의 일도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최후의 방도로 생각하고 있던 방안을 먼저 제시해올 줄은.
“어떻습니까, 용사님?”
안드레 주교가 다시 얼굴 위로 평소의 미소를 띠며 물었다. 나는 미세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안드레 주교의 시선을 받았다. 마리안느의 금색 시선이 나를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대답을 들려주었지만, 그것이 긍정의 표시로 들린 건지 안드레 주교는 우선 왕실과 대화를 한 번 나눠보겠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달리 방법이 있지는 않았으니, 어쨌든 나도 수긍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어째서 저를 보내는 것을 주저하신 겁니까.”
나와 마리안느는 천천히 왕도의 시내를 걸어 본부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옆을 돌아보았고, 마리안느는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닌 눈빛. 나는 마리안느의 금색 눈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 고집이야. 네가 우리 파티에 필요하니까.”
마리안느는 그걸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듯,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잠시 다녀올 일일 뿐입니다.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말했듯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잖아. 그 종말 숭배라는 게 신경 쓰이기도 하고, 재앙과 관련해 어떤 정보를 얻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뭐, 저것 말고도 단순히 마리안느의 반응이 걱정되어 그런 말을 한 것도 있지만. 마리안느는 나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마리안느는 계속 나를 바라보며 따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