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8 - 58. 무엇을 위한 검인가 (1)
“[새로 검을 하나 장만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성검이 문득 그리 말했다. 검을 수련하던 중이었다. 최근 들어 성검이 툭툭 던지는 말을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까지 경지가 상승했다. 성검은 부쩍 날 가르치는 데에 재미를 붙인 듯했고, 나 또한 검을 휘두르며 성검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데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성검의 제안을 듣고도 검식을 마무리하는 것을 우선했다.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종단베기. 검날이 허공을 베어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검을 새로?”
나는 성검을 갈무리하고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되물었다. 늦여름. 8월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여름의 해는 마지막 인사라도 남기려는 듯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타오르며 땅을 달구었고, 나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올라오는 열기에 고개를 저었다.
“[위기일 때마다 쌍검을 꺼내 드는데, 그때마다 네 번째 재앙 때처럼 누군가에게 검을 빌려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느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쌍검은 확실히 전력을 아주 큰 폭으로 상승시켜 주었다. 평소에는 성검 한 자루만 사용하더라도 언제나 쌍검을 꺼내 들 준비는 되어있어야 할 거다. 내 옆에 누군가가 항상 있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왼손을 쥐락펴락하며 북부에서 퀘노어 대공이 빌려주었던 보검의 감촉을 떠올렸다. 성검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많이 뒤처지지는 않을 정도로 좋고 강한 검이었다.
“[그런 무기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지는 줄 아느냐.]”
성검이 타박하듯, 조금 뾰족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기 보는 기준이 높아진 게 누구 때문인데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아무튼, 그런 무기는 만들어질 때부터 좋은 금속을 쓴 명장(名匠)이 만들었겠지만, 세월과 역사, 그리고 마력이 쌓이며 탄생한다. 당장 그 무기나 나와 같은 이를 찾기보다는, 네 손에 잘 맞고 튼튼한 검을 찾는 게 우선이겠지.]”
성검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금방 누그러졌다. 나는 검의 자루 끝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구점, 대장간이라….”
나는 머릿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아는 대장간을 하나 떠올렸다. 원작에서 아르옌이 아이시스를 구해낸 후, 부서진 무기를 대체하기 위해 찾은 대장간. 줄글로만 읽어 어디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는데, 그냥 대장장이 길드 쪽을 어슬렁거리면서 둘러보기나 할까.
“[정 잘 모르겠다면 내가 보는 걸 도와주마. 네가 실패하지 않을 정도로는 조언해줄 수 있을 거 같으니 말이다.]”
하긴, 검 보는 눈은 사람보다는 성검이 훨씬 낫겠지. 나는 화관 모양 음각이 파인 검자루를 바라보았다. 검을 만들 때는 시간이 오래 걸리려나? 빨리 만들어 놓아서 나쁠 건 없으니 한 번 대장장이 길드가 있는 쪽으로 가봐야겠다. 마리안느는 오늘 교회에 있을 거고, 게오르그는 기사단, 다프네는, 에버노드에서 발전한 마법과 마나를 갈무리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럼, 한 번 가볼까.”
간단하게 외출 준비만을 하고 나는 사무실을 나섰다. 간단한 준비라 하면, 이 더운 여름에 뒤집어써야 하는 짙은 녹색 후드를 말한다. 거인을 물리치고 난 이후로는 알아보는 사람이 더욱 많아져서 잠시 밖에 나갈 때도 항상 후드를 써야 했다. 마나를 돌려 어느 정도 더위를 떨쳐낼 수 있으니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나가자마자 온몸이 땀에 절어버렸을 거다. 게다가 지금 향하는 곳은 용광로의 열기가 들끓는 대장장이 길드 인근. 살이 익어버려도 이상하지 않다.
“장인들이 괜히 장인이라 불리는 건 아니겠지.”
좋은 검과 평범한 검은 잡을 때의 느낌부터 달랐다. 무게감. 검날의 무게가 배분되어있는 방식, 경도와 강도. 내가 마나를 흘려보냈을 때 반응하는 정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한 자루 정도 더 장만하면 되지 않느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이왕 하는 거 한 번에 잘 만드는 게 좋잖아.
왕도의 골목 지리가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왕궁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도로가 펼쳐져 있고, 도로와 도로 사이로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대장장이 골목은 여기서 왼쪽으로 들어서면 나왔었지.
쇠를 두드리는 소리는 시끄럽다. 골목 인근으로 들어섰을 뿐인데, 벌써 망치질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연마사들이 돗자리 장사하듯 골목 여기저기에 자리하고 앉아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허리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낡거나 날이 무뎌진 검을 찬 사람을 찾으려는 눈빛이었다.
“[잘못 걸리면 나도 뽑아서 보여달라고 하겠구나.]”
방금 대장장이 골목에 들어오던 사람이 하나 연마사에게 붙잡혔다. 낡은 검을 멘 사람이었는데, 연마사는 반쯤 그를 잡아끌다시피 하며 제 돗자리 맞은편에 앉혀놓고는, 검을 보여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그가 어리숙하게 검을 뽑아 보여주자, 연마사가 혀를 끌끌 차며, 에잉! 지금 당장 날을 갈아야 쓰겠구만, 이걸 왜 지금까지 방치해뒀나! 라며 칼 주인을 야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다들 너도 슬쩍슬쩍 바라보고 있구나.]”
연마를 하러 온 사람들은 티가 나니까. 연마사들을 흘긋흘긋 바라보잖아. 수산 시장 처음 온 사람같이 말이야. 나처럼 눈은 마주치지 말았어야지.
“[…신기한 광경이구나.]”
그렇지. 정신이 하나도 없군.
용광로의 열기가 이미 거리를 한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쇠를 두드리는 데 열중하는 대장장이들을 지나가다가, 방금 검을 다 만들고 벽면에 걸어둔 대장장이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손님은 안 받수다.”
대장장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주문이 아니라, 대장장이를 하나 찾고 있습니다. 혹시 조르주씨의 대장간은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까?”
대장장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조르주? 그 양반 오늘은 쉬는 날인데? 아마 내일이면 다시 나올 거요. 왜, 그 사람한테 의뢰하려 그러우?”
“예. 위치는 어디인지 가르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대장장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골목 안쪽 깊은 곳을 가리켰다.
“저기, 안에서 세 번째, 왼쪽에 있는 대장간이 조르주의 대장간이외다.”
“…감사합니다.”
나는 대장장이에게 인사하고는 돌아섰다. 대장장이들은 여전히 쇠를 두드리고 불씨를 키우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떡할 거냐? 따로 찾는 대장장이가 있었던 거라면 그냥 돌아갈 거냐?]”
흠,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래도 성검이 검을 보는 걸 도와준다고 했으니, 주위 대장간을 더 돌아다닌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거 같았다.
“도와줄래?”
“[괜찮아 보이는 검을 만드는 대장간이 있다면 귀띔해주마. 일단 방금 대장간은 아니었다.]”
성검은 검을 평가하는 데는 제법 신랄했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는 골목 깊이 걸어 들어갔다.
“[저 대장장이는 나쁘지 않지만, 네게 맞는 검을 만들 것 같지는 않구나.]”
“[이 대장장이는 아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검을 만드는군.]”
성검의 눈은 까다로웠다. 애초에 용사가 쓸 무기. 타협안을 찾아서 적당히 좋은 검을 사용하는 건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군말 없이 성검의 말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오히려, 내 검을 직접 만든다는 생각에 난 조금 들떠 있었다.
“[정 없거든, 내일 네가 생각해둔 대장장이에게 가보도록 하자. 네게 걸맞는 검을 만들어줄 사람이 이렇게 없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몇 군데만 더 둘러보고 가자.”
나는 그리 말하며 비교적 소규모의 대장간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경력이 오래되지 않은 야장이나 일감을 많이 받지 않는 고집스러운 장인들이 모여있는 것 같았다. 정신없이 쇠 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큰 골목과는 달리, 산발적으로 이따금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도 그렇게 다를 건 없는 것 같구나.]”
성검은 첫 두 대장간을 보더니 그리 평했다. 좋은 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맞나 보다. 성검뿐만이 아닌, 나 역시도 여기저기 눈을 돌리며 좋은 검을 찾았지만, 내 눈에 차는 검도 잘 없었다.
“결국 내일 오는 수밖에 없는 건가….”
뭐, 그게 제일 안정적이겠지만.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골목의 끝자락에서 돌아서다가, 한 대장장이를 보았다. 칼 한 자루가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었다. 검은 아니었고, 무기로 쓰는 칼도 아닌 것 같았다. 아마 평범한 식칼. 그러나, 부식액에 담가졌다가 바깥으로 꺼내지는 칼날은, 오늘 보았던 그 어떤 무구보다도 강렬하게 내 눈을 사로잡았다.
“[…너도 보았느냐.]”
“응.”
저기다.
강하게, 확신에 가까운 감이 들었다. 나는 홀린 듯 헝겊으로 식칼을 닦은 대장장이 앞으로 다가갔다. 키가 크고, 과하지 않은 근육이 잡힌 여자 대장장이였다. 쇠를 칠 때 방해받지 않기 위해 머리를 한데 올려 묶고 있었고, 여름과 용광로의 열기에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식칼을 만드는 작업을 계속하다가, 문득 입을 열어 나를 맞이했다.
“자기는 무슨 일로 왔어?”
“검 제작을 의뢰하고 싶습니다.”
대장장이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여느 기사 못지않은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주황색 머리에 초록색 눈. 대장장이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굳은살과 화상으로 엉망이 된 손이었다.
“검 제작이라면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널렸어. 당장 여기까지 올 필요 없이, 저기 큰 골목 쪽으로 가서 아무 대장간이나 들어가면 좋은 검을 만들어줄 거야.”
“다 둘러보고 왔습니다. 영 성에 차지가 않더군요.”
나는 대로를 향해 슬쩍 턱짓하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장장이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철가루와 검댕이 묻어 더러워진 그녀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그게 성이 차지 않으면, 내 대장간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는걸.”
“보는 눈을 속일 수는 없죠.”
나는 그리 말하며 방금 대장장이가 완성한 식칼을 보았다. 대장장이는 그 칼날을 내려다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검을 만들지 않아. 손님, 미안하지만 다른 곳을 알아봐 줬으면 좋겠어.”
나는 대장장이를 바라보았다. 대장장이의 눈은 단호하게 내 말을 거부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이 대장장이가 만드는 것보다 좋은 검을 만들기는 힘들 거다.]”
성검의 말이 들려왔다. 타협은 할 수 없다. 재앙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타협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안 되겠습니까.”
나는 주머니를 뒤져 카운터 위로 검을 만들 때 투자하려고 했던 수표 한 장을 꺼내 가격을 휘갈겨 적은 후 올려놓았다. 50만 골드. 검 한 자루를 만들기에 부족한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파티에 할당된 예산을 이때가 아니면 언제 써먹냐.
수표에 적힌 금액을 바라본 대장장이의 눈이 크게 뜨이다가, 이내 다시 가늘어졌다. 대장장이는 수표 위로 손을 올려놓고, 주저하다가 이내 떼었다.
“이렇게 큰돈이라면, 내가 아니더라도 이 왕국에서 제일 좋은 대장간에서 손님이 원하는 대로 검을 만들 수 있어.”
“금속을 구하는 데 들어가는 작업비용은 따로 내드리겠습니다.”
“미안. 나는 검을 만들지 않아. 그게 누구의 부탁이라도 말이지. 설령 용사님이나 여왕님이라도 와서 부탁한다고 해도…말이…야.”
나는 바로 후드를 끄집어 내렸다. 대장장이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눈을 깜박거렸다.
“왜 당신이 거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