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 - 60.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 (1)
일주일 후, 나는 왕궁의 소집령을 받았다. 안드레 주교가 카이로스 왕국과 새로 협의를 맺는 데 성공한 듯했다. 그 공조과 함께, 면류관 파손 건은 성국에서도 구태여 꼬투리를 잡지 않고 그냥 넘기기로 한 듯하다. 나는 찝찝한 마음을 한구석에 품은 채로 왕궁 근위병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소집령이라, 오랜만에 받아보는군. 행사 이외의 일로 소집되는 건 거의 반년만인가.”
게오르그가 중얼거렸다.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었던지라, 최소한의 예의만을 갖춘 복장이었다. 다프네는 그동안 마나를 갈무리하는 데 성공했는지, 훨씬 성숙해진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아마 5서클의 끝자락에 다다라, 6서클의 문을 두드리는 중일 거다. 앞을 가로막던 벽이 부서지니, 다프네의 성장은 거칠 것이 없었다. 나는 뿌듯하게 그 정갈한 마나를 느껴보았다.
“종말 숭배라고 했던가. 소문으로만 알음알음 들어봤는데 실존할 줄은.”
“저는 처음 들어봐요. 종말과 재앙을 숭배하는 자들이라니.”
게오르그의 말에 다프네가 아리송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리안느는 둘의 옆에서 언제나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그 침묵은 평소와 궤가 달랐다. 나는 마리안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바로 하며 걸어갔다.
“감시의 시선을 피해 몰래 활동하던 자들의 활동이 포착되었다는 건, 이미 그들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겠지.”
게오르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프네는 팔을 문지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은 재앙을 본 적이 없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죠?”
“보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나는 그리 말했다. 재앙의 힘에 매료된 사람일지, 처음부터 악신을 숭배하는 사람일지, 되려 재앙 때문에 사람들에게 분노하게 된 무리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마 전혀 다른 싸움이 되겠지.”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리안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마리안느만을 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잘 선택하셨어요, 일로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쨌든 찢어지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기도 하고. 그런 놈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우리가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하니까.”
마리안느는 평소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 미안하다 할 거면 일로이가 미안하다고 해야지. 우리 모두를 끌고 가는 건 어찌 되었건 저 용사님의 결정이니 말이야. 안 그러냐, 일로이?”
게오르그는 장난스럽게 마리안느의 사과를 받아치며 나를 보았다. 나는 그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주었다.
“난 별로 안 미안한데.”
“건방지고 양심도 없는 악덕 파티장 새끼.”
게오르그는 툴툴거리며 보폭을 더 넓혀 나를 앞지르며 걸어갔다. 나와 게오르그의 만담을 지켜보던 다프네가 웃음을 내뱉으며 마리안느에게로 다가갔다.
“동료끼리 미안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이럴 때는 같이 와줘서 고맙다는 말만 하면 돼요.”
마리안느는 금빛 눈을 깜박이며 다프네를 바라보았다. 평소에 워낙 말이 적으니, 어른스러워 보였는데 이렇게 보니, 마리안느가 우리 파티의 막내라는 게 조금은 느껴졌다.
“네… 감사합니다.”
물론, 그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리는 근위병의 안내를 따라 넓은 왕궁의 복도를 걸어 지나갔다. 이따금 지나가다 마주치는 대신들은 슬금슬금 내 눈을 피하거나, 아예 겸손한 자세로 인사를 하거나,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였다. 더 잡아먹으려고 들지 않는 게 어디야.
“안에 폐하께서 주교와 함께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번에 공조를 위해 찾아온 인원을 주교께서 또 찾아오셨다고 하던데….”
회의실 앞에 멈춰선 근위병이 굳게 닫힌 문을 흘긋 바라보았다.
“자세한 건 안에 들어가시면 알게 될 겁니다.”
근위병이 문을 크게 세 번 두드리자,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회의실의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여왕이었다.
“용사 일로이가 여왕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우선 여왕에게 예를 갖춘 후, 시선만을 슬쩍 돌려 회의실 안의 풍경을 확인했다. 여왕의 맞은편에 앉은 안드레 주교. 물론 있어야 하겠고, 처음 보는 사제복 차림의 사람이 몇. 아마 안드레 주교의 부하 격인 이단심문관들이겠지.
그리고, 나는 이단심문관들과 주교 사이에 앉은 인물들을 보고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저 녀석들이 왜 여기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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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에버노드에서 겨울이라고 하면 10월부터 4월 중순까지를 칭한다. 물론 사람들이 칭하기에는 그렇다는 것이지, 8월의 끝자락이 다가오면 더위라고 할 만한 온기는 남아있지 않고, 공기 중에 쌀쌀한 냉기가 감돌기 시작한다.
“솜씨가 좋군. 역시 용병 출신이라 그런가.”
아르옌은 기사의 칭찬에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의 기사와 병사들은 아르옌과 아이시스를 달갑게 여기지 않다고 해야 할까, 여전히 경계하고 대하기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경계하든 말든, 아르옌은 크게 개의치 않았지만, 그의 신경을 조금 거슬리게 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뭐, 하긴. 용사님께서도 처음 순찰에 나섰을 때 굉장한 활약상을 보여주셨지.”
그 경계심이 전부 용사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
“당신도 참 안타깝게 되었군. 용사 파티에 남아있었더라면 살아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을 누려보았을 텐데.”
아르옌은 용사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짜증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가 해냈든, 아니면 퀘노어 대공의 도움을 받아 해냈든. 그가 이전에 크라켄 전에서 말했던 이상론을 이뤄버렸다는 사실이,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희생시키지 않았어도 되었다는 사실이 용병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바크틴스의 아우성은 없었다. 아르옌은 그들의 고통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리하지 않았더라면 다 같이 죽어버렸을 테니까. 용사도, 성녀도, 용병도, 다쳐서 아우성을 치는 바크틴스의 주민들도 말이다.
“정말 궁금한 게, 당신처럼 강한 사람을 용사께서는 어째서 내보냈던 거냐?”
기사들이 쉬쉬하려 넘어가기에는 아르옌이 너무나 강했다. 게오르그나 마리안느와 비슷한 정도라면 납득하고 넘어갔겠지만, 아르옌의 무위는 이미 대공의 아래 단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다. 내분이 있었다고는 해도 그냥 내보내기에는 아까운 무력일 텐데.
“당신들이 알 건 없다. 나는 내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녀석이 날 내보내지 않았더라면 언젠가는 내가 그 파티를 그만두게 되었을 거다.”
아르옌은 저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아르옌과 동행하던 기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옌은 이를 부득, 갈고는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 녀석은 나를 인정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 녀석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게 다다.”
“…그래. 알겠다.”
영웅은 없다. 모든 사람을 구한다는 건, 결국 꿈결에서나 하는 말이다.
용병, 아르옌은 검을 집어넣었다. 한없이 냉정한 얼굴로, 사지로 향해야 한다며 말하던 광인(狂人)의 얼굴이 떠올랐다. 굳이 불구덩이 속으로 장작을 지고 들어가야 한다며 말하는 놈의 눈빛이 생각났다. 자기희생은 기만이다. 자신은 그 방식을 용납할 수 없었다. 누군가의 삶의 방식은 누군가에게는 독이었다.
“…웃기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지.”
아르옌은 외성의 출입문에 서서 에버노드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고통도, 비탄도, 없다. 누군가가 슬퍼할지도 몰라도 슬프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은 없었다.
“빌어먹을.”
아르옌은 욕설을 뇌까리고는 말을 마구간에 돌려놓았다. 이곳에 그다지 오래 남아있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세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그를 받아들이기에는 용병이 아는 세상은 그렇게까지 따뜻하지 않았다. 입안이 썼다. 결국 용사가 이뤄낸 풍경은, 용병이 이뤄낼 수 없었던 모습이니까. 코끝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아르옌님.”
마구간에서 나온 아르옌을 기다리고 있던 건 성국의 수행단원 중 한 사람이었다. 아르옌은 한숨을 내쉬어 잡생각을 모두 털어버리고는 사제를 맞이했다.
“무슨 일입니까.”
“에버노드를 떠나는 게 결정되었습니다. 성녀님과 대공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르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전후의 복구랄 게 없어서, 빨리 떠나겠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조금 갑작스럽다는 느낌은 없잖아 있었다.
“급하게 결정된 사안 같은데.”
“성국 측에서 호출이 있었습니다. 이곳의 복구보다 급한 사안이 생긴 듯합니다.”
급한 사안? 아르옌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시스에게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 건가.
“자세한 사항은 들어가서 함께 이야기하시지요.”
사제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 저택 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아르옌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아이시스는 진중했지만, 반 사색이 되어버린 얼굴로 무어라 말하고 있었고, 늘상 심드렁하고, 무표정했던 대공 또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려 아르옌을 바라보았다.
“…용병인가. 우선 앉아보게.”
아르옌이 자리에 앉자, 대공과 아이시스의 사이에서 대화를 주도하던 사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구 지원 수행 인원의 대장 격인, 중년의 사제였다.
“이렇게 되면, 처음부터 이야기를 정리해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사제는 코에 반쯤 걸치고 있던 안경을 올려 쓰고는 용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종말 숭배자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아르옌님.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르옌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칼밥으로 십수 년이나 먹고 산 건 아니었다. 종말 숭배라는 단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시름시름 죽어가는 단체라고 생각했는데.”
“아뇨. 이번에 그들이 갑작스럽게 기지개를 켜게 되었습니다. 카이로스 왕국과 성국의 눈을 피해, 세상의 뒷골목과 지하에서 암약하다가, 이번 세 번째 재앙과 네 번째 재앙의 준동으로 인해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고 하더군요.”
아르옌이 눈살을 찌푸렸다. 재앙의 등장은 그들이 활동하기 시작하기에 딱 알맞은 시기인 건 맞다. 하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감시망에 걸릴 정도로 세력을 늘렸다니.
“카이로스 왕국 내에서 활동을 재개했다고는 하지만, 성국 또한 이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잡아내는 일은 성국 측에서 주도적으로 진행하기로 했죠. 카이로스 왕국에서는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해줄 수 있는 지원은 모두 해주겠다고 말하기도 했고요.”
사제가 짤막하게 상황을 요약해주었고, 아르옌은 어느새 방 안의 사람들과 같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종말 숭배자들이 얼마나 질 나쁜 놈들인지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용병 생활을 할 때 전해 들은 악행들은, 피깨나 본 용병으로서도 치가 떨리게 만드는 것들이었으니까.
“성국의 일이니, 성녀가 빠질 수는 없다는 말인가.”
아르옌의 물음에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마 이단심문관들과 동행해 종말 숭배자들이 나타났다는 지역을 수사하게 될 겁니다. 더러운 일들은 그들이 알아서 처리하게 될 테니, 성녀님께서는 주변 민심을 달래고, 인근 청교회 지부와 협업해 피해자들을 돌보게 되겠죠.”
이단심문관. 그 광신도들. 아르옌은 얼굴을 슬쩍 찌푸렸고, 이야기를 경청하던 퀘노어 대공이 한숨을 내쉬었다.
“착잡하군. 에버노드에도 그들이 혹여 손을 뻗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겠어.”
“…이곳은 아마 괜찮을 거예요.”
아이시스의 대답에 퀘노어 대공이 쓰게 웃었다.
“씁쓸하군. 물론 괜히 주민들을 불안하게 할 필요는 없겠지만, 순찰 인력을 알게 모르게 증원하긴 할거야. 우리의 눈이 평소에 잘 닿지 않는 뒷골목이라든가. 당분간은 그쪽을 중심으로 꼼꼼하게 살펴야겠지. 우선 귀중한 정보를 전달해줘 고맙네.”
대공은 사제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아르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쪽은 계속 성녀와 동행할 건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굳이 그쪽이 계속 함께할 의무는 없다고 하던데.”
“…아니. 고용된 입장이니, 끝까지 호위할 겁니다.”
아르옌은 그리 말하며 아이시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유독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저렇게까지 불안에 떨 이유가 있는 걸까.
“…그래. 잘 해보게.”
대공은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에버노드에서 우리를 지원해줘 고마웠어. 앞으로의 여정에 행운이 함께하기를 바라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힘든 와중에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아이시스의 얼굴 위로 강한 죄책감이 떠올랐다. 에버노드에 도달하고 몇 주간, 아이시스의 표정은 늘 저런 모습이었다.
스트로프 저택을 나서고, 짐을 정리하러 걸어가던 와중이었다. 사제가 앞서 터덜터덜 걸어가는 아이시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겠지만, 힘든 여정이 되겠군요.”
아르옌이 사제를 돌아보자, 사제는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다른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것이..."
아르옌이 조바심이 담긴 목소리로 묻자, 사제는 흘긋 아이시스의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번에 나타난 종말 숭배자들, 활동 반경이 바크틴스 일대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