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61화 (62/158)

Chapter 61 - 61.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 (2)

왕도로 돌아가는 동안 아르옌과 아이시스 사이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아르옌은 평소에 마차보다 앞선 속도로 나아갔지만, 돌아가는 길에는 마차와 속도를 맞추었다. 진창과 빗물로 더러워진 마차를 두고 새것으로 바꾼 마차는 창문이 컸다. 아르옌은 그 창문 너머로 비치는 아이시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우리가 그 부락에 있었을 때는 종말 숭배자들의 활동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함께 말을 타고 가던 왕도의 기사가 물었다.

“…오히려 그들을 보았는데도 아무것도 모른 채 넘어갔을 수도 있지.”

“그 가능성이 가장 생각하기 싫습니다.”

기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바크틴스. 아르옌의 머릿속에 파괴되어 사라져버린 항구의 풍경이 떠올랐다. 복구할 수 없다고, 주민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지방관의 말도.

“진심으로 이 세상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뇨. 그런 미치광이들이 이 세상을 멀쩡히 활보하고 있다니, 그리고 우리가 눈치를 채지도 못했다니. 누구는 재앙과 맞서 싸우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누구는 그들을 숭배하고. 장난하는 거도 아니고 뭡니까.”

기사가 치를 떨며 말했다. 아르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 머릿속에 떠오른 광경은 크라켄과의 전투였다. 밀려오는 해일. 바다에 잠기던 도시. 산과 숲을 부수던 움직임. 왕국 굴지의 기사단이 달라붙어야 겨우 막을 수 있던 크라켄의 촉수.

“아무튼, 그들을 체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무조건 참여하겠습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그리 말하는 기사는 재앙을 실제로 본 적이 있던가. 아르옌은 기사의 말을 흘려넘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공활하다. 불길할 정도로 깊고 푸른 하늘 속에서 조막만 한 달이 흐릿하게 태양의 맞은편에 떠올랐다.

왕도에 도착하자마자 아르옌과 아이시스를 맞아준 건, 익숙한 얼굴이었다.

“예상한 것보다 이르게 도착하셨군요. 오기 전에 이야기는 얼추 전해들으셨겠죠?”

안드레 주교의 물음에 아이시스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끄덕여졌다. 눈 아래로 그림자가 퀭했다. 태양처럼 빛나던 금발은 퍼석퍼석했고, 호수처럼 푸르게 반짝이던 눈동자는 하늘처럼 텅 비어버렸다. 안드레 주교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아이시스. 몸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군요. 무리하지 말고 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뇨. 그럴 생각은 없어요.”

아이시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저는, 제 눈으로 확인해야겠어요. 여기서 도망치면 전….”

원래라면 그녀를 만류했을 아르옌도, 이번만큼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 지금의 아이시스를 억지로 말린다면, 그녀는 더욱 무너질 테니까. 성녀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세상은, 너무나 가혹했다. 그녀를 당장 망가뜨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럼, 가죠. 용병, 당신은….”

안드레 주교는 가는 눈으로 아르옌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따라오셔도 좋습니다. 아이시스에게 고용되었을 뿐인 신분이지만, 이런 일에는 당신이 도움이 될 것 같으니 말입니다.”

“마치 내가 당신의 명령을 따라야 할 것처럼 말하는군.”

“그럴 리가요. 저는 당신을 아래에 두려 할 만큼 오만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안드레 주교는 헛웃음을 뱉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아서 손을 거들어줄 솜씨 좋은 사람들이 꽤 필요할 것 같으니까요.”

주교는 아르옌과 아이시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사제복 차림의 사람 몇과 함께 왕궁에 도착했다. 주교는 제 옆에 아이시스와 아르옌을 앉히더니, 가만히 문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기색을 내비쳤다.

“…또 누가 오는 건가.”

“예. 공조니까요. 카이로스 왕궁 측의 사람들도 와야죠.”

저벅 저벅.

아르옌은 가까워지는 발소리와 기척에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강하다. 아르옌이 제대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경계해야 할 정도로. 아르옌이 그것이 누구의 기척인지 완전히 파악하기도 전, 회의장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문가에 선 인물의 얼굴을 본 아르옌의 표정이 굳었다. 옆의 아이시스의 동공에는 파문이 일어났다.

“용사 일로이가 여왕 폐하를 뵙습니다.”

용사의 인사에 여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왕에게서 슬쩍 시선만을 돌린 용사가, 아르옌과 아이시스를 목격하고는 미세하게 눈썹을 움찔거렸다.

“네게 너무 많은 일을 맡기는 게 아닌가 싶군.”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용사의 목소리는 굳어있었다. 아르옌은 내심 혀를 차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단의 일. 거기다 재앙을 숭배하는 사람들. 용사가 관련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하겠지. 용사는 여왕과 짧게 인사를 나눈 후, 성녀와 용병, 주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주교는 용사의 반 썩은 표정을 보더니 슬쩍 입꼬리를 올려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드레 주교, 그리고….”

용사는 자신의 옛 동료들을 마주하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비웃음의 의미가 아니라 당황함에서 우러나오는 반사작용인 듯했다.

“아이시스, 아르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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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주교가 불러모은 건가? 나는 순간 망치로 한 대 맞은 듯 멍해진 머리를 애써 굴려보았다. 이 와중에, 주교가 수상쩍은 미소를 내게 지어 보이는 게 짜증이 났다. 성녀. 그래. 이단과 관련된 일이니, 아이시스를 대동하면 민심을 되돌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아르옌, 저 녀석은 왜 앉아있는 거야? 아이시스가 데려오기라도 한 건가.

‘제 발로 이런 일에 끼어들 녀석은 아니니.’

그들만의 사정이 있겠지.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돕기로 한 건 돕기로 한 거고, 중요한 건 저 녀석들이 나와 다시 일하려 할까인데….

“앉으시지요, 용사님. 마침 이야기를 더 나누려고 하던 차였으니까요.”

멍하게 서있던 나를 안드레 주교가 불렀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게오르그 역시 꽤나 당황한 표정으로 주교 옆의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시스는 게오르그가 함께 온 줄도 모르는 것 같았고, 아르옌은 고개를 슬쩍 끄덕여 게오르그와 인사했다.

“자, 기초적인 이야기는 다 아실 테니 넘어가고, 자세한 사항을 말씀드리도록 하죠.”

안드레 주교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종말 숭배자들은 현재 바크틴스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머리에서부터 피가 싹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의자의 팔걸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크틴스. 내가 이 세상에 들어오기 이전의 일. 용병의 방식으로 쓰러트린 재앙. 그곳의 상황이 어떤지는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숭배자들이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간접적으로 내게 말해주었다.

“아시다시피, 현재 바크틴스는 사실상 없는 도시나 마찬가지입니다. 임시 부락을 지어놓고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있었지만, 도시 재건에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아, 다른 도시로 이동령이 떨어진 상태지요.”

여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드레 주교의 말을 받았다.

“임시 부락이니 위생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 환자들의 회복 속도도 너무 더뎠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전염병이라도 돌기 시작한다면, 건강한 주민들의 생존마저 장담할 수 없었다.”

“예. 폐하의 판단은 분명 옳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주민들은 그 해산령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몇 있었다고 하더군요.”

안드레 주교는 열 손가락을 마주치며 담담하게 말했다.

“땅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어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도 곤란했겠지. 하루빨리 복구를 진행해야 할 텐데, 그 종말 숭배자들이 방해되는군.”

여왕은 한숨과 함께 그리 말했다. 평정을 유지하는 얼굴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누구보다도 심경이 복잡할 것이다.

“무시하고 그들을 밀어내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민심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악화하겠지. 이번에 성국의 도움이 반가운 이유야.”

“아닙니다. 저희도 그동안 추적하던 사이한 이들의 꼬리를 잡게 되어 오히려 기쁘군요.”

주교는 고개를 저으며 주먹을 꾹 쥐었다.

“이단…. 종말 숭배자들은 마음의 틈을 귀신같이 파고듭니다. 사람의 마음에 벌어진 틈새. 금이 가 조각조각 떨어지는 무너지는 마음. 숭배자들은 그 빈틈을 어둠으로 하나씩 채워 넣죠.”

안드레 주교의 목소리에 희미한 분노가 담겼다.

“약 삼천 명.”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숫자에 사람들의 표정이 굳었다.

“우리 측에서 추산한, 바크틴스에서 종말 숭배자들이 장악하고 세뇌한 인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단 신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겠죠.”

“성국 측에서는 그들을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주동자를 체포해, 카이로스 왕국과 공동 재판을 여는 것이지요. 사살하면 더욱 좋겠지만.”

안드레 주교의 눈이 번득였다.

“남은 삼천 명의 사람…. 그들에 관한 건 폐하의 처분에 무조건 따르도록 하지요.”

“바크틴스의 지방관에게는 연락을 넣어두었다. 다른 지역으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일을 끝마쳤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예. 그리하겠습니다.”

주교는 여왕과의 대화를 마친 후, 우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단심문관들이 있다는 사실은 감추고, 카이로스 왕국에서 조사 차원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수사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주교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신의 빛을 배신한 자들에게 천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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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복이 아닌 마리안느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다. 마리안느는 여기사와 같은 복장에 성창을 거머쥐고 있었다. 안드레 주교의 모습은 더 가관이었는데, 그는 카이로스 왕국의 궁정 귀족과 같은 차림새에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새로 부임한 내무관이라는 설정인 듯했다.

“종말 숭배의 핵심은 인신공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용사님?”

주교는 서늘한 비웃음과 함께 그리 말했다.

“종말 숭배의 지도자, 악신 숭배자들은 결코 강제로 사람을 바치지 않습니다. 신도들이 스스로 제 몸을 갖다 바치도록 유도하고 세뇌합니다. 사람을 제물로 하여 악신과 연결되고, 그들의 힘을 나눠 받고. 그들의 신앙을 증빙합니다.”

안드레 주교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결국 일반 신도들이 개심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겠지만….”

어떨지.

주교는 그리 말하며 앞을 바라보았다. 바크틴스에 도달했을 때는,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완전히 전후의 폐허로 전락해버린 바크틴스의 길목을 바라보며 눈동자를 떨었다.

“[그 종말 숭배자들이 판치는 데에는 전부 이유가 있었군.]”

성검이 끔찍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바로 옆에, 부서져 버린 교회의 첨탑이 창끝처럼 땅에 처박혀 있었다.

“일로이.”

게오르그가 나를 불렀다. 그 역시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나를 다그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내 어깨 위로 손을 얹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은 옛 일을 생각할 때가 아니다. 그때의 선택은, 너를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 잘못이 있어. 네가 그 일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

나는 게오르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풍경을 눈에 담았다. 지켰어야 했던. 그러나 지키지 못했던. 이 몸의 주인에게 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그때는 대체 어떤 기분이었냐고. 이 세상을 지킬 운명을 받아, 세상을 결국 지키지 못하고 굴복했어야 했을 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원작에서 떠올릴 수 있는 활자는 몇 없었다. 생각해보면, 원작의 일로이는 언제나 후회하고 분노하고 있었기에.

“끔찍하네.”

나는 중얼거리며 말했다. 게오르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내가….”

“그만. 내가 약했고, 내가 지키지 못한 거야. 의미 없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아.”

나는 그리 일축하며 고개를 저었다. 크라켄과의 전투를 이야기해도, 이곳의 주민들이 한 번 입은 상처는 나아지지 않을 거다. 문득,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아이시스와 아르옌이 보였다. 아이시스는 도통 나와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아르옌은 이따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와서 말을 걸려 하지는 않았다.

“…가자.”

나는 그들로부터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바크틴스의 지방관이 기다리는 2층짜리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변 폐허 속에서 그나마 멀쩡한 건물이었지만, 건물의 1층은 다른 곳의 폐허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교님, 그리고….”

지방관은 나를 보더니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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