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62화 (63/158)

Chapter 62 - 62.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 (3)

“성녀님도 계셨군요. 이쪽으로 모두 와서 앉으시지요.”

지방관은 지친 목소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2층짜리 임시 집무실은 좁았다. 우리 파티 넷과 주교, 아이시스와 아르옌까지 모두 들어가기가 힘들어, 결국 나와 주교, 아이시스만이 2층에 남기로 했다. 지방관은 작은 테이블 앞으로 자신이 앉을 의자를 가져오며 허리를 두드렸다.

“복구 현장을 감독하면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어야 할 일이 많다 보니…. 허허. 조금 추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안드레 주교가 빙그레 웃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지역의 복구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어찌 추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가혹한 시기니까요.”

주교의 말에 지방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주름진 얼굴에 깊이 음영이 파고들었다.

“폐하께 연락받았다고 하셨지요.”

“예. 주교께서 일대에 퍼지고 있는 이단들을 잡아내는 데에 힘을 써주시겠다고.”

안드레 주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아이시스를 바라보았다.

“혹세무민의 무리를 벌하는 일입니다. 다행히 용사께서도 이렇게 흔쾌히 제 요청을 받아들여 이단의 무리를 솎아내는 데 도움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군요… 용사께서도.”

지방관은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그에게 나는 좋은 사람이나 구원자 따위로 보이지 않을 거다.

“네 번째 재앙을 물리친 지 얼마 되지 않았죠? 아직 피로가 좀 쌓여있을 텐데도, 기꺼이 우리 지방을 도와주러 오셨다니. 감사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방관이 고개를 숙였고, 나 역시 황급하게 고개를 마주 숙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악의는 없다. 비꼬아 말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되려 그것이 내게는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꽂혔다.

“성녀께서도 용사 파티를 나오시게 된 후, 즉각 바크틴스를 도우러 오셨지요. 그때도 참 많은 도움을 받았었는데, 이렇게 일찍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난 물끄러미 그녀의 창백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이시스는 무심코 내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리다가, 잽싸게 떨구었다. 그녀의 새파란 눈동자는 재회하고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저는 복구 현장의 감독 때문에, 이번 수사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군요. 이따금 수사 진행 회의를 빼면 제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을 겁니다. 혹여 필요한 게 있다면….”

안드레 주교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직 활동중인 교회가 있다면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하고자 합니다.”

“…예. 아마 부락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낡은 교회가 하나 있을 겁니다. 아직 신자들이 교회를 열심히 찾는다고 알고 있어요. 성녀님께서 치유 활동을 벌였던 것이, 신앙심을 굳히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좋아요. 우리가 반드시 이 지역을 좀먹는 이단들을 쫓아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안드레 주교가 아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아이시스, 다른 사제들과 함께 이곳의 신자들을 잘 다독여줄 수 있도록 하세요.”

지금 다독임이 필요할 것 같은 건 오히려 아이시스이긴 한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이시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내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조차 피하고 싶었는지, 얼굴을 슬금슬금 돌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사는 언제부터 시작하실 예정입니까?”

안드레 주교는 손바닥을 가볍게 마주치고는 천천히 비볐다.

“교회에 본부가 꾸려지는 대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종말 숭배자들의 주요 활동 구역이 분명, 피난민들을 수용한 부락 쪽이라고 하셨던가요.”

“…예. 철수령이 떨어졌기에 많은 사람이 떠났지만, 여전히 나가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위병들을 동원해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그 이상은 충돌이 심해질 것 같았기에.”

“알겠습니다. 저희도 조심하긴 하겠지만, 이단들의 저항이 강하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주교의 눈이 비수처럼 지방관의 눈을 꿰뚫어 보았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거친 방법’을 좀 동원해야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두시길.”

“…물론, 인지하고 있습니다.”

지방관은 표정을 굳힌 채로 고개를 끄덕였고, 주교는 인자한 미소와 함께 일어섰다. 나와 아이시스 또한 엉겁결에 함께 몸을 일으키며 주교를 따라 나섰다. 지방관은 그런 우리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문득 나를 불러 세웠다.

“용사님.”

지방관의 시선은 무어라 정의하기 복잡한 감정을 내포하고 있었다. 원망, 안타까움, 분노, 혹은 체념. 나는 그들 중 체념이 가장 무섭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주민들이 용사님을 아주 환영하지는 않을 겁니다. 몇몇 주민들은 아예 원망하기도 하겠지요. 특히 북부, 에버노드의 소식이 여기 퍼지고 나서 더 그렇습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이 찢어지고, 피비린내는 혀를 타고 목구멍으로, 콧속으로 들어온다.

“…무어라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지만, 부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옆에서 아이시스가 입을 벙긋거렸지만, 그녀는 머릿속에 있는 것을 말로 토해내지 못한 채 이내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주교는 문가에 서서 우리를 재촉하듯 바라보았고, 나는 아이시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돌아가자.”

아이시스는 내 손이 어깨에 닿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제야 아이시스의 눈을 마주볼 수 있었다. 이곳에 빙의된 이후로는 처음인가. 아이시스는 그때 분노로 활활 불타는 눈동자를 내게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를 파티에서 내보낸 것인지. 제정신인지 따져 물으며, 격하고 감정적인. 그러면서도 자신감이 있는 눈이었는데.

“….”

지금은 그저 두려움에 떠는 아이와 같은 눈을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그 괴로움의 깊이는 그녀가 감당하기 힘들어 보였다.

“아이시스.”

나는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시스를 타일렀다. 아이시스는 그때야 정신이 든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주교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주교는 아이시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서둘러 가지요.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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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관이 가르쳐준 교회는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비교적 다른 폐허에 비해서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가을비는 오후가 되어서도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다프네가 마법으로 간단히 교회의 내부를 정돈하자, 주교는 곧장 우리를 불러 모았다.

“우선, 조사에 앞서 주의할 점을 몇 가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학교로도 쓰인 모양인지, 교회의 벽면에는 칠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주교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새끼손가락 마디만 한 분필을 주워 들고 교사처럼 설명을 시작했다.

“조를 둘로 나누어 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낮에 대대적인 조사를 벌이는 조, 밤에 몰래 그들을 감시하는 조. 물론 말씀드렸다시피, 밤은 위험한 시간이기에 감시 일은 이단심문관이 맡게 될 겁니다. 여기서 경고하는데….”

쿡. 주교는 칠판을 분필로 찍었다.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밤에는 부락에서의 단독활동을 엄금합니다. 어둠은 악신들의 속성이며,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는 숭배자들의 활동 시간입니다. 밤이 되면 그들의 힘은 특히나 강해져요. 아무리 우리라도, 설령 용병 아르옌, 당신이라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밤 X’라고 칠판에 적어놓은 주교는 그 옆으로 손을 가져갔다.

“종말 숭배의 상징 – 그러니까, 악신 숭배의 상징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주교는 칠판 위로 오각성을 그렸다.

“별…?”

“직접 그리기에는 너무나 삿된 모양이라, 이렇게밖에 보여드릴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해주십시오. 그들의 상징은 머리를 땅으로 돌린 오각성입니다. 그러니까,”

주교는 별표의 꼭대기 부분을 짚었다.

“이 오각성을 거꾸로 돌린 모양새라고 생각하시면 되겠군요. 이를 역(逆)오각성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들은 이 상징을 몸 어딘가에 지니고 있을 겁니다. 문신으로든, 상징물로든 말이죠.”

안드레 주교는 매서운 눈초리로 별을 바라보다가, 이내 불쾌하다는 듯이 별표를 지워버렸다.

“또 하나. 성급한 행동은 금기사항입니다. 우리는 인원이 부족해요. 이단이 눈에 보인다고 무작정 잡아간다면, 저들의 머리를 치기도 전에 내빼거나 역으로 우리가 당할 겁니다.”

‘밤 X’의 옆에 ‘성급 X’라는 글이 적혔다.

“우리의 목적은 차근차근 저들에게 접근해, 재앙 숭배자들의 우두머리를 알아내고, 그들을 잡아내 일망타진하는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안드레 주교는 분필을 내려놓으며 손을 털었다.

“그럼 우선 탐문 수사를 시작하도록 합시다. 역할은 각자 배정해드린 대로. 용사님은 우선은 갑갑하시겠지만, 투구까지 확실히 착용해주세요. 대충 절 수행하는 병사 역할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투구라.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저 주교 놈은 자신을 수행하는 병사 역할을 내게 시키는 것에 미묘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긴 했지만.

“아이시스, 당신은 추후 함께하도록 하죠. 분위기를 살피고, 어떻게 수사를 해야 할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당신이 개입된다면 괜한 경계심을 살 수 있으니까요. 부디 이곳에서 이단심문관들과 함께 대기해주시길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주교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나를 바라보았다.

“자, 갑시다. 용사님.”

사이코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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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시스.”

아이시스는 그녀를 부르는 주교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섰다. 교회 밖으로 조사 인원들이 나가는 중이었다. 다프네는 내무관으로 변장한 주교의 보좌 역할, 게오르그는 기사 역할, 일로이와 마리안느는 호위 역할. 내리던 비는 부슬비로 바뀌어 그들의 우비와 갑옷 위로 가볍게 떨어지고 있었다.

“주교님.”

안드레 주교의 표정과 목소리는 엄하기가 그지없었다.

“언제까지 그런 상태로 계실 겁니까.”

아이시스는 눈을 깜박거리며 주교를 바라보았다. 말할 수 없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떨고 있는지를 입밖으로 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당신이 이곳의 복구 활동을 지원하면서 많은 일을 겪었다는 건 알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곳의 주민들은 당신을 신뢰하고 있을 테니까요.”

신뢰라는 말에 아이시스의 눈동자에 다시 파문이 일었다. 주교는 그 모습을 똑똑히 목격했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하루빨리 마음을 다잡아주시길 바랍니다. 간단한 탐문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고, 조만간 성녀가 나설 차례가 올 테니 말이죠.”

“…예, 알겠습니다.”

안드레 주교는 아이시스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르옌이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시스를 잘 지켜주세요, 용병.”

주교는 그리고서 용사 일행을 향해 다가갔다. 아이시스는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교회로 돌아와 의자 위에 다리를 웅크리고서 앉았다. 용사 파티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니, 들려오는 건 부슬비가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뿐이었다.

“있죠, 아르옌.”

아르옌이 아이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짙은 그림자와 옅은 빛이 아르옌의 얼굴에 드리웠다. 그는 이럴 때도 평소와 같았다. 그것을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는, 아이시스 그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당신을 만류했더라면, 일로이의 의견대로 하자고 했다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을 건가요?”

아르옌은 그 질문을 듣고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변함이 없다. 나는 내 의견을 고수했을 거다. 우리 파티의 의견이 그쪽으로 기울었어도, 총사령관에게 찾아가 마음을 바꾸라고 설득했겠지.”

“…어째서 그랬을 거라 확신하나요.”

아르옌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렇게 싸웠더라면, 우리 파티원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었을 거다. 게오르그가 될 수도 있었을 거고, 넬라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네가 될 수도 있었겠지. 용사는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르옌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해서도 크라켄을 막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리고 거기서 파티가 당하면, 다음은 존재하지 않아.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지.”

아이시스는 얼굴을 무릎에 묻었다. 아르옌의 목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이 모든 게 일어난 후에는, 선택을 후회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

마지막은 아르옌의 혼잣말이었다. 아르옌은 아이시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내 방식이다. 사람의 목숨으로 가능성을 재는 게 내 평생 해오던 일이었으니까.”

아이시스는 교회 안에서 홀로 남겨진 채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멀리 부락을 향해 내려가고 있을 용사의 발걸음 소리를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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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끔찍하리라 생각했는데.”

다프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바이저의 창살 사이로 비치는 부락의 풍경을 바라보며 내심 침음성을 내뱉었다.

“…이건.”

부락의 풍경은 빈말로도 깨끗하고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판자로 덕지덕지 이어 붙여 만든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미로와 같은 골목을 형성하는 가운데, 공기 중에는 악취가 감돌았다. 배수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으니, 배설물 냄새는 물론이고 씻지 못한 사람들의 악취나 썩어가는 살점의 냄새까지 났다. 하지만, 그 속의 사람들이 내비치는 모습에서는 굉장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기묘하군요."

안드레 주교가 중얼거렸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 눈에 보이는 부락 사람들은, 하나같이 편안한 미소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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