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3 - 63.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 (4)
“오늘은 새로 물자가 들어올까요?”
“좋은 물건이 들어왔으면 좋겠는데요.”
우리는 부락의 초입을 천천히 걸으며 주민들의 대화를 귀담아들었다. 수상한 대화는 없었다. 그들은 지극히 그들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이상했다. 비관도 없고 고통도 없다. 그럼에도 내 눈이 바라보는 세상은 상처로 가득 차 있었다.
“너무….”
“평화롭군요. 원래 이랬었던 건 아니었다고 알고 있는데.”
안드레 주교는 차가운 목소리로 다프네의 감상을 받았다. 주민들은 우리를 흘긋흘긋 돌아보다가 이내 자기들의 대화에 다시 집중한다. 주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민 중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주민들은 우리를 경계하는 듯하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요.”
한 장년의 사내가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이곳의 주민들이 모두 그렇듯, 꾀죄죄한 차림새에 산발이 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억세지만 순박한 인상이었는데, 두꺼운 팔과 살갗이 벗겨진 거친 손을 보니, 뱃일을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왕궁 내무관 소속, 안드레 융이라고 합니다. 여왕 폐하의 명을 받아 바크틴스 일대의 복구 진척도와 생활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왔습니다만….”
안드레 주교는 성만 바꾼 가명을 대면서 침착하게 나섰지만, 사내는 주교를 향해 손을 내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일 없소. 더 무엇을 알아보겠다고 하는 거요. 안 그래도 그쪽에서 우리에게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라며 정신 사나운데, 괜히 사람들 성질머리 건드리지 말고 돌아가시오. 보다시피, 우리는 이곳에서 나름 만족하면서 잘 살아가고 있소.”
사내는 상당히 적대적인 태도로 나서고 있었다. 주교는 그 태도에 휘말리지 않고 침착하라는 듯 손바닥을 땅으로 향하며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떠나는 일 때문에 재촉하려 온 건 아닙니다. 혹시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거나, 따로 수송해드려야 할 물자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이죠. 이주 건은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사내는 입가를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성마른 모습에 또 다른 위화감을 느꼈다. 몇몇 주민들은 우리를 향해 고개를 흘긋 돌리기만 할 뿐이고, 몇몇 주민들은 그마저 신경 쓰지 않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상했다. 비단 폐허가 된 마을뿐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마을에서도 이런 반응은 나오지 않는다. 적어도 마을의 누군가가 관리로 보이는 사람과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면,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괜찮소. 우리 마을은 그런 거 없어도 잘 살아가고 있소. 정기 물자도 잘 공급받고 있고. 당신들이 이 마을에서 더 찾아볼 건 아무것도 없단 말이오.”
안드레 주교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인지, 사내에게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내는 그런 주교의 반응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그 시선을 따라 눈을 미친 듯이 굴렸다. 그러다가, 이내 주교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이보시오, 여기에 관심을 가져주는 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정말 우리 마을이 필요로 하는 건 아무것도 없소. 부디 돌아가 주시오.”
성을 내고 있던 사내의 태도가 갑작스럽게 부탁하는 어조로 바뀌었다. 사내에게 손을 붙들린 주교의 눈이 번득였다. 나는 사내의 눈이 진동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본 걸 주교가 놓쳤을 리가 없을 거다.
“저희도 폐하의 명령으로 이곳에 온지라, 무언가를 얻어가야만 합니다. 상황은 우리도 고려해보겠지만, 그렇다고 아예 조사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주교는 병사로 분장한 나와 마리안느를 향해 고개를 슥 돌렸다. 조사에 불응하고 계속 방해할 것이라면, 체포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정말 이러기요?”
“조사가 이상할 건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민들을 해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주교는 진정하라는 듯 침착하게 받아쳤지만, 사내의 불안함은 증폭될 뿐이었다.
“그게 아니요. 그게 아니라….”
“여보, 여기서 뭐해요?”
사내가 얼어붙었다. 그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나는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아내인 듯한 여인은 그의 팔에 살포시 팔짱을 끼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마찬가지로 행색이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이분들은… 누구시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당신은 먼저 돌아가 있어.”
그때, 주교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부인. 왕궁 내무관, 안드레 융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피해 지역의 조사차 나오게 되었는데, 혹시 협조해주실 수 있을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사내의 표정은 사색으로 변했고, 여인은 주교의 말에 놀란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주교의 눈은 그들의 변화를 한시도 쉬지 않고 포착해내고 있었다.
“어머, 멀리서 오셨군요. 네네, 얼마든지 협조해드릴 수 있죠.”
“당신! 내가 먼저 들어가 있으라고 말을 했는데!”
사내가 기겁을 하면서 제 아내를 밀어냈다. 여인이 멀뚱멀뚱하게 제 남편을 바라보았지만,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내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몇 번이나 말해! 당신 다리 부러진 것도 나은지 얼마 안 됐는데, 함부로 나와서 걸어 다니면 안 된다고! 어서 들어가.”
여인은 그녀의 어깨 위로 올라오는 사내의 손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는, 사내의 두꺼운 손을 향해 그녀의 손을 올리며, 한없이 가볍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여보. 내가 말했죠. 화를 내는 건 다 무의미하다고.”
사내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사내의 눈이 공포에 물들었다가, 이내 원래 색을 되찾았다. 여인은 부드럽게 사내를 밀어내고는 주교에게로 다가가 눈웃음을 지었다. 동그랗게 한데 묶인 머리카락 옆으로 잔머리가 비죽비죽 튀어나왔다.
“내무관님, 무엇을 도와드리면 될까요?”
다프네의 표정은 창백해지고 있었지만, 그 앞에 선 안드레 주교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을을 한 바퀴만 둘러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아직 조사단이 전부 도착한 게 아니라, 당분간 이 일대에서 머물며 천천히 살펴볼 예정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남편과 함께 안내해드릴게요.”
여인은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사내는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급작스럽게 변한 사내의 태도도 태도였지만, 너무나 태연한 아내의 태도 또한 신경이 쓰였다. 마치, 남편의 감정이 전혀 여인에게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마을이 평화롭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기 환자들, 부상자들이 많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주교가 넌지시 묻자, 여인은 후후, 하고 작게 웃음을 내뱉었다.
“성녀님이 한 번 다녀가신 이후로는 부상자도 많이 없어졌어요. 제 부러진 다리도 그렇게 치료됐어요.”
꿈을 꾸는 것 같은 목소리. 여인의 발걸음은 아주 느렸다.
“몸의 상처는 성녀님께서 치유해주셨지만,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해주실 수는 없었죠. 이게 전부 얼마 전에 마을을 찾아오신 선생님….”
“여보!!”
사내가 귀청이 떨어지도록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다프네는 깜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고, 안드레 주교는 눈을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인은 사내의 고함에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서 웃음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실수할 뻔했네요. 마을을 안내해야 하는데, 자꾸 다른 말을 하게 되네요.”
“괜찮습니다.”
안드레 주교는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세하게 살기를 풍겼다. 여인이 무의식중에 한 말을 하나씩 정리하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듯했다. 그 ‘선생님’이라는 사람에 대해 더 캐묻지 않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가 아이들의 학교로 사용되는 건물이고….”
여인은 하나씩 판자로 만들어진 건물을 가리켰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은 마을의 초입과 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이따금 여인에게 말을 걸어올 뿐, 우리에게는 그저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만을 향하고 있었다.
“자.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우리 마을의 구조랍니다.”
“친절하게 안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인.”
다시 도달한 마을 입구. 여인은 사내와 함께 우리를 배웅하고 있었다. 사내는 여인에게 한 번 버럭 소리를 지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고, 줄곧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 모습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안드레 주교는 그런 사내를 흘긋 바라보더니, 다시 여인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나중에 또 방문하시면, 그때는 다른 마을 사람들도 친절하게 맞아줄 거예요. 다들 처음 보시는 분이라….”
“이해합니다. 그럼,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안드레 주교는 뒤로 돌아서 갔고, 우리는 앞서가는 주교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걸어가다가 고개만을 슬쩍 돌려 마을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우리를 안내해준 여인은, 그 자리에 같은 자세로 계속 서서 우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이게 도대체.’
순간, 여인과 눈을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황급하게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갑옷이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따라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내 등을 따라 여인의 텅 빈 시선이 계속 따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건 밤에 면밀한 조사를 해봐야겠군요.”
주교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이상해요. 표정을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게 이상한 거겠지. 온 마을이 저런 상태인데 말이야.”
게오르그 역시 이상하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인의 눈빛을 지워내려 하며, 입을 열었다.
“게다가, 맨 처음의 아저씨랑은 달리, 그 아저씨의 아내라는 사람은 우리가 누구인지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어.”
“그렇군. 사내는 퇴거 명령을 내리니 뭐니 하면서 실랑이를 벌였는데 말이야.”
굳이 이렇게 말로 하지 않아도, 우리는 저 부락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바이저를 들어올린 마리안느가 무표정하게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마리안느?”
“예. 문제없습니다.”
마리안느의 눈에는 안드레 주교의 그것과 같은 미세한 살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가 그 창백한 뺨에 걱정스럽게 미간을 좁히고 있자, 안드레 주교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수확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 다행입니다.”
“그 부인이 말한 ‘선생님’이라는 사람 말인가요?”
주교가 섬뜩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람일지 아닐지는 저도 모르겠지만요. 아마 그 ‘선생님’이라는 작자가 바로 악신 숭배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놈들의 우두머리는 아니겠지만….”
주교는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그러자, 그 손아귀에 힘줄이 불쑥 돋아났다.
“그놈을 잡아서 놈들의 뿌리에 도달할 수 있게 해봐야죠. 오랜만에 놈들이 대대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 말하는 주교의 묵주가 흔들렸다. 안드레 주교는 너무 화난 모습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는지, 작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밤에 어떤 형태의 숭배 활동을 포착할 수 있다면, 어떤 식으로 활동하는지도 알 수 있다면. 그들을 일망타진하기도 쉽겠죠.”
주교가 흔들리는 묵주를 잡아 문질렀다.
“밤이 기대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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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마리안느는 위장용 망토를 둘러쓴 채 안드레 주교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이단심문관들은 그림자보다 은밀하게 움직였다. 잔디 위를 걸어도 풀잎이 스치는 소리는 나지 않았고, 빠르게 달려가도 망토 자락이 펄럭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빛이 전혀 보이지 않는군.”
주교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마리안느가 아는 안드레 주교의 평소 모습이었다. 마치 고드름을 깎아 만든 창날과 같은 목소리.
“놈들이 아주 좋아하는 환경이지.”
비는 그쳤다. 하지만 하늘은 개지 않았다. 별도, 달도 없는 검은 장막이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동공처럼 가만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을에도 불은 켜져 있지 않았다. 모닥불도, 양철통에 담아 피우는 불도, 램프도 호롱불도 없었다. 아직 자정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인기척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안드레 주교가 손을 뻗어 심문관들에게 수신호를 보내었다. 물안개가 허공으로 사라지듯, 이단심문관들은 자연스럽게 흩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리안느는 안드레 주교의 뒤에 서서 부락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불도 기척도 없는 부락은 밖의 폐허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안드레 주교가 품속에서 시계를 꺼냈다. 자정 5분 전. 주교의 눈이 번득였고, 그와 동시에 부락에 변화가 일어났다.
끼이익.
끼이익.
터벅, 터벅, 터벅, 터벅.
부락의 문이 하나둘씩 열리고, 사람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침묵으로. 부락의 사람들은 하수구로 흘러 들어가는 구정물처럼 모여 한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부락의 가장 끝자락에 있던 반쯤 부서진 양조장.
양조장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더니, 그 속의 어둠이 사람들을 하나둘씩 삼키기 시작했다. 안드레 주교가 시계를 품속으로 집어넣고는 양조장을 바라보았다.
저곳이로군.
아주 희미하지만, 지극히 삿되고 불길한 기운이 양조장의 문틈 사이로 연기처럼 빠져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