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4 - 64.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 (5)
가까이 다가가자.
안드레 주교는 그런 수신호를 보냈다. 마지막 사람이 양조장에 들어가고, 양조장의 문은 굳게 닫혔다. 양조장은 비교적 트인 평야에 자리했다. 근처에 숨을 곳이라고는 무너진 곡물 저장소 정도밖에 없었다. 주교는 쓰러진 벽면에 기대어 양조장을 바라보았다.
끼이익.
양조장의 뒷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손에 책을 든 누군가가 양조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 종말 숭배자이자 저들의 설교자.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 여인이 말해주었던 ‘선생님’. 뒷문은 그가 들어오는 때에 맞춰 천천히 닫혔고, 중구난방이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가 되어 설교자에게로 쏠렸다.
“오늘도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제, 자매님들.”
설교자는 단상에 서서 양조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지난 모임 때보다 형제들이 늘어났군요. 아주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의 가족, 친구들에게 꾸준히 가르침을 전파하고 있는 거 같아 기쁩니다.”
텅.
설교자가 단상 위로 들고 온 책을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오신 분들을 위해 오늘은 처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파라락. 책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종말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막을 수도 없고, 거부할 수도 없지요.”
설교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숭배자들은 촛불 하나 없이 새카만 어둠에 잠긴 양조장의 바닥에 줄을 맞춰 앉아있었다. 안드레 주교는 눈을 좁혔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으로도 설교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둠, 그 자체의 비호를 받는 듯 설교자의 얼굴 위로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우리는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으로 돌아갑니다. 그 또한 하나의 종말입니다. 모든 것에는 그 끝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가 결국 그리될 테니까요. 끝은 결코 부정적이지 않습니다. 무섭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언제든지, 종말을 마주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설교자의 목소리는 진중하고 설득력이 있었다. 좌중을 아우르는 듯한 위압감. 설교자는 고저가 없는,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우린 그것을 순리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종말은 사람들이 재앙이라고 부르는 형태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재앙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종말의 사도이자, 우리가 마음을 열고 받아 들어야 할 운명인 겁니다.”
설교자는 손을 쫙 펼치며 활짝 가슴을 열어젖히듯 내밀었다. 대단한 논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투와 연기하는 듯한 움직임, 집중하는 사람들의 군중심리가 설교자의 말을 주민들의 머릿속에 박아넣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밖의 빛의 신도라고 하는 자들은 우리의 운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소리를 지껄이면서요. 그 기도가 그래서, 무슨 상황을 나아지게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사라진 여러분들의 땅을 다시 물 위로 올라오게 하기라도 했습니까?”
그러면서 설교자는 주민 중 한 사람을 척, 하고 가리켰다. 지목된 주민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맞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돌아온 건 퇴거 명령과 에버노드가 재앙을 회피했다는 소식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우리만이 이렇게 되어야 했을까요? 왜 우리만이, 고향 땅을 잃고 가족을 잃고 남겨졌어야 했을까요?”
쿵. 설교자가 단상 위를 손으로 내리찍었다. 점점 높아지는 언성 속에 모종의 희열과 같은 것이 깃들었다.
“그건 우리가 선택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된 빛의 신과 교회를 부정하고, 이 세상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할 사도로 선택받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을 경험하고, 종말이 닥쳐온 세상의 민낯을 알리기 위해!”
죽일까.
안드레 주교는 망토 속에 숨겨놓은 암기를 쥐며 눈빛을 번득였다. 지금 죽이려면 죽일 수도 있을 거다. 가장 앞자리에서 놈에게 동조하는 이들도 함께 죽여버릴 수 있을 거다. 혹은 잡아놓은 후 차라리 죽여달라며 울부짖게 할 정도의 고통을 선사하는 방법도 있다. 주교의 귓가를 설교자의 헛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세상은 이토록 어지럽습니다. 인간은 더러운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의 더러움을 놓아버려야만 합니다. 분노, 슬픔, 짜증! 우리를 더러운 존재로 만드는 그 모든 것을 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열어, 마지막을 포용해야 합니다.”
당장 행동하는 것의 변수. 저들의 전력은 알 수 없다.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저들 중 악신 숭배자들이 몇 명이나 숨어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종말과 함께 영원할 겁니다. 종말을 피한 자들은 결국 다시 더 끔찍한 끝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이 사라질 거고, 세상이 우리의 고통을 함께 알고, 겪을 겁니다.”
다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기다립시다. 오각성 아래, 기다리면서 기도합시다.”
사람들이 손을 모았다. 주교는 중얼거리며 기도문을 외었다. 그건, 사람의 언어라고 부를 수 없는 삿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기도라기보다는 사악한 주문. 안드레 주교는 뇌리를 헤집는 것만 같은 소리를 떨쳐내기 위해 머리를 저으며 털어냈다.
“어떻게 할까요.”
안드레 주교는 심문관의 질문을 받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밤에 정면승부는 위험하다. 놈이 이길 수는 없어도, 지천의 어둠은 놈이 도망가기에 너무 유리한 환경이다.
“우리는 놈들의 뿌리로 향하는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한순간의 분노로 이 모든 일을 수포로 만들어버릴 수는 없어. 오늘 수집한 정보를 정리하고, 내일 아이시스와 함께 본격적인 조사에 돌입하도록 하지.”
사람들이 해산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조금씩 개며 달빛을 드리웠다. 사람들은 꿈에 젖은 듯한 표정으로 양조장을 나섰다. 설교자는 어느새 그림자 속에 녹아들 듯 사라져버렸다.
“청교회에 대한 적개심이 더 심해지기 전에.”
저놈들을 잡아 죽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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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교회의 낡은 침대를 삐걱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게오르그는 곤히 잠들어있었다. 나는 침대 옆에 기대어놓은 성검을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더냐.]”
“그냥, 잠이 안 와서.”
나는 성검을 비끄러매고 침실의 문을 열었다. 복도를 지나 신랑으로 나오니, 공기가 텁텁하다. 교회의 문은 한쪽이 부서져 있었다. 바람은 부서진 문을 통해 드나들었다. 이곳의 바람은 새벽에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달빛이 없어 밤은 아주 어두웠다.
“[요새 통 잠을 못 이루는 모습이구나. 몸은 좀 어떠냐.]”
“괜찮아. 멀쩡해. 원래 많이 자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루 정도는 밤을 지새워도 괜찮을 거다. 나는 신랑의 끝에 서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장 끝 의자에, 아이시스가 가만히 앉아있었다. 멍하니, 십자가의 부조를 바라보는 아이시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일로이.”
아이시스는 내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신랑의 복도를 사이로 두고, 옆의 의자에 앉았다. 아이시스가 나를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
“잠이 안 오더라.”
“…그랬나요.”
의자가 차가웠다. 나는 성검을 무릎 위에 올리고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교회의 천장은 높다. 천장은 어둠에 가려 밤하늘과 같았다.
“저도, 잠이 안 왔어요.”
나는 아이시스를 보았다. 아이시스는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바라는 말을 들려줄 수 없다. 나는 일로이가 아니었으니까.
“부락의 주민들 말인데.”
나는 화제를 바꾸었다.
“아마 종말 신앙이 주민들에게 깊이 파고든 거 같아. 아직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부락의 사내를 떠올리며 그리 말했다.
“조심해.”
그녀가 바란 말은 아닐 거다. 아이시스는 황망하게 내게 손을 뻗어오다가, 다시 손을 무릎 위로 올려놓으며 고개를 파묻었다. 나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위로의 말도 들려주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위로가 아니었다. 위로는 결국 죄책감을 후벼 파는 행위였으니까.
“…네.”
아이시스는 한참이 지난 후에, 내 조심하라는 말에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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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바크틴스의 날씨는 항상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아이시스는 아침의 축축한 공기를 느끼며 옷자락을 여미었다. 오늘은 그녀와 아르옌이 안드레 주교와 함께 마을의 본격적인 조사를 나설 차례였다.
“주민들이 아직 아이시스, 당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여전히 감사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죠.”
주교는 아이시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이시스는 주먹을 꾹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다잡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해야 했다.
“서둘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부락의 사람들을 전부 잡아들여야 할 수밖에 없게 되기 전에 종말 숭배의 꼬리를 잡아야 할 테니까요.”
부락의 규모는 아이시스가 방문했을 때보다는 줄어있었다. 아이시스는 그녀가 치유해준 사람의 얼굴을 대부분 기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시스의 손을 거쳐 간 사람은 많이 남지 않았다. 성녀를 알아보는 이들이 이따금 와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질 뿐이었다.
악취는 전보다 심했다. 하지만 귀는 이전만큼 괴롭지 않았다. 울음과 비탄이 전혀 들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깊이 빠져든 것 같군.”
아르옌이 중얼거렸다. 비정상적인 평화는 아비규환보다 무서웠다. 풍경은 그대로였는데, 사람들의 표정만이 바뀐 채로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면 어떻게….”
그때, 아이시스를 향해서 누군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안드레 주교가 그녀를 알아보고는 미간을 좁혔다. 지난번 방문 때 그들을 안내해주었던 여인이었다.
“성녀님.”
아이시스가 그녀를 마주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이시스는 여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팔이 잘려 환통을 느끼던 아이를 데리고 자신을 찾아왔던 여인이었다.
“…부인.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여인은 아이시스의 인사에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렇게 제 다리를 치료해주신 성녀님을 다시 만나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여기는 어쩐 일이신가요? 그것도 지방관님이랑 함께….”
여인이 안드레 주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교는 어꺠를 으쓱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이 평화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찾아오셨다고 하더군요.”
“아아, 그러셨구나.”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텅 빈 감탄을 내뱉었다.
“네. 이제 우리 아이도 괜찮아졌어요. 성녀님께서도 다 나은 우리 애를 보면 참 좋을 텐데.”
아이가, 다 나았다고? 아이시스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시스의 옆에서는 아르옌이 인상을 무섭게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잘린 부위에 느끼는 환통은 성녀의 마법으로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고통을 덜어내는 마법만을 쏟아부을 뿐이었는데.
“아, 안 그래도 성녀님께 보답을 해드리고 싶었으니, 집으로 함께 갈까요? 우리 애한테 인사도 시킬 겸해서.”
아이시스는 안드레 주교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주교는 당연히 가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성녀님?”
“…예. 기꺼이.”
감이 좋지 않았다. 아이시스는 여인의 아이를 보아서는 안 될 것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불길함 예감과는 별개로, 그녀의 발걸음은 이미 여인의 뒤를 따라 부락의 깊은 골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골목 깊숙이 들어갈수록 악취는 더욱 강해졌다. 여인은 길을 앞서가면서도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한 판잣집 앞에서 멈추었다. 문패도, 아니, 사실 문도 없었다. 여인은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 손짓했고, 아이시스와 주교, 아르옌은 네 명이 겨우 들어갈 크기의 집을 바라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얘, 성녀님이 오셨단다. 어서 나와서 인사라도 드려야지.”
여인이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시스의 심장이 긴장감에 널뛰기를 시작했다.
터벅 터벅.
걸어오는 발소리는 둘이었다. 이상했다. 여인은 옆에서 몇 번이고 말을 걸고 있었는데, 정작 아이가 대답하는 소리는 한 번도 들을 수 없었다. 모두가 그 위화감에 시선을 교환하던 찰나, 여인이 아이와 함꼐 문가에 다가섰다.
“어때요, 성녀님. 다 말끔하게 나았죠?”
아이시스의 널뛰던 심장이 쿵, 하고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살려달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소년의 얼굴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소년의 잘려 나간 오른팔도 기억했다.
“….”
소년은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입도 열지 않았다. 아니, 입을 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시스는 그 변해버린 모습에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팔. 소년의 잘린 오른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를 대신하는 ‘무언가’가 붙어있었다. 그 ‘무언가’로부터, 아주 서서히. 검은 살점과 같은 것이 자라나 소년의 오른쪽 반신을 좀먹어가고 있었다. 얼굴의 반을 뒤덮고, 입마저 막아버린 채로.
“지금은 조금 어색한 모습이지만, 조금만 있으면 완전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거라고 하더라고요! 나비가 되기 전의 번데기와 같은 모습이라고요. 놀랍지 않나요?”
일행의 반응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여인은 신나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모두 ‘선생님’ 덕분이에요.”
아이시스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은 어젯밤의 하늘처럼 텅 비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