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7 - 67.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들 (3)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군요.”
안드레 주교가 아르옌의 얼굴을 엿보며 말했다. 아르옌은 문득 제 입가를 더듬어보더니 혀를 내찼다. 주교는 그런 아르옌의 모습을 보다가, 관심이 식었다는 듯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틀린 선택지는 없습니다. 용사님과 아이시스의 계책이 성공한다면, 그것이 이상적인 선택지가 될 수는 있어도 말이에요. 뭐, 세상만사에 그리 흥미가 없다는 듯 행동하는 당신이니, 지금 일조차도 시큰둥하게 생각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아르옌은 허리에 찬 검의 자루를 문질렀다.
“그럼 내 선택이 상대적으로 비겁한 것이 되어버리겠지.”
“용사님의 앞에서 그 비겁함을 부정하려 하면 안 되겠죠. 용사님은 우리처럼 비겁하지 않고, 결국 모두가 바라고 마지않던 이상을 한 번 이뤄낸 사람이니까요. 홀로 이 상황을 곱씹어보며 자기 위로를 하는 거라면 모를까.”
안드레 주교는 품속에 비수와 암기를 갈무리했다. 칼날이 살에 맞닿는 느낌이 주교의 머리에 시동을 걸었다. 오늘의 몇 번째 담배인지도 모를 꽁초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주교는 눈살을 찌푸리며 꽁초를 주워들었다. 희미한 주황 불꽃이 남아있었다.
“우리는 최악이 아닌 차악을 바라보고 있고, 용사님은 차선이 아닌 최선을 이뤄내려 하고 있습니다. 차악이라 해서 악이 없는 건 아닙니다.”
“세상을 구할 임무를 짊어질 사람이 어째서 그렇게 무책임한 최선을 바라는지 모르겠군.”
“당신은 아직도 착각하고 있어요, 아르옌.”
주교가 고개를 내저으며 아르옌의 말을 부정했다.
“무책임한 건 용사님이 아니라 우리 쪽입니다. 대를 위해 소를 잘라내고, 또 끝없이 잘라내는 우리가 무책임한 것이죠. 그 소의 무게를 이해하려 하는 자는 절대 잘라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 한 번이라도 잘라내지 않으려 한 적이 있나요?”
안드레 주교의 입가에는 비틀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저와 당신이야 언제나 잘라낼 수밖에 없었으니, 그리고 앞으로도 잘라낼 예정일 테니 영원히 알 수 없겠죠.”
주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지고, 땅거미가 배를 끌고 수평선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에 남아있던 푸르름이 검은 그림자에 묻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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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크틴스의 밤은 지독했다.
하늘은 없었다. 하늘이 있어야 할 허공에 존재하는 건 어둠뿐이었다. 달빛이 바다를 비추고 일렁이는 검은 물결에 떠오르는 빛과 같은 낭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뒤로 돌아보았다. 아이시스와 우리 파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시스는 게오르그에게 업히는 편이 나을 거야. 빠른 속도로 이동해야 할 테니까.”
아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러면서 다프네에게 다가오라 고갯짓했다. 그녀도 우리만큼 빠르고 은밀하게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에, 저도요?”
“너는 내가 직접 들고 갈 거야.”
“사람한테 들고 갈 거라는 말이 뭐예요.”
나는 입을 비죽 내민 다프네를 업었다. 다프네는 당황한 듯 공중에서 손을 붕붕 돌리다가, 이내 내 어깨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아이시스 쪽을 돌아보니, 널찍한 게오르그의 등판에 아이시스가 장판 위에 누운 것처럼 올라가 있었다.
“위치는 기억하겠지?”
“당연하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려보니, 마리안느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다프네가 얌전히 업혀있는 내 등을.
“왜?”
“….”
마리안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슥 돌렸다. 그리고는 먼저 길을 앞서 출발했다. 나는 천천히 멀어지는 마리안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이 거리에서 나와 양조장으로 출발할 겁니다.”
안드레 주교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교는 허름한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한 시간. 그 내에 끝내야 한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그새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용사께 대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드레 주교는 그리고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남은 건 마리안느를 제외한 우리 파티뿐이었다. 나는 등을 한 번 들썩이며 다프네를 편하게 자리시켰다. 내 어깨를 쥔 다프네의 손에 불만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우리도 출발하자.”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밤은 내 몸을 숨겨준다기보다는 빨아들이려 하는 것 같았다. 빛이 없으니 그림자마저 생기지 않는다. 디디는 땅이 평소보다 무거운 기분이었다. 나는 그 기분 나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발을 굴러 부락이 내려다보이는 무너진 잔해 위에 착지했다.
“움직이기 시작했군.”
게오르그가 꿈틀거리며 모이기 시작한 사람의 무리를 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부락의 판잣집에서 문을 열고 거리로 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걸음걸이에는 생기가 없었다. 썩은 나무토막들이 팔다리를 달고 걷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저들을 보며 측은해할 시간은 없었다.
“서두르자.”
군말은 필요없었다. 나와 게오르그는 동시에 잔해를 박차고 부락으로 뛰어 내려갔다. 바람이 없으니 뛰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워야 했다. 우리는 좀도둑처럼 건물의 지붕을 뛰어넘으며 거리에 안착했다.
“이제 내려주세요.”
아이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오르그가 손을 풀어주자, 아이시스가 바닥에 발을 디디며 눈앞의 문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마음을 다잡은 듯, 문가로 다가가자마자 판잣집의 문이 벌컥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성녀님? 그리고….”
여인의 남편, 처음 만났던 사내였다. 사내는 우리를 바라보더니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허, 벌렸다. 아이시스는 사내를 올려다보고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당신을 도와주려, 아드님을 치료하러 왔습니다.”
사내는 문을 잡고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문을 재빨리 활짝 열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빨리! 들어오시오.”
덜컹. 우리의 뒤로 문이 닫혔고, 사내는 재빠르게 집의 창문을 모두 닫고는 촛불을 하나 꺼내어 불을 붙였다. 집 안에서 나는 사람의 악취와 정체 모를 것의 냄새가 우리의 비강을 잔인하리만치 찔러댔다.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냄새가 서로 뒤섞이며 새롭게 풍겼다.
착.
초에 불이 붙고,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사내가 우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표정에는 일말의 불신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빛을 싫어하오. 밤에 빛을 비추면 득달같이 어디선가 나타나 불을 끄라고 아우성치지. 이곳의 밤에 빛을 찾아볼 수 없는지 이미 한 달은 되었소. 어느새 달도 잘 뜨지 않더군.”
사내는 불을 붙여놓고는 초를 들고는 방 안쪽을 비추었다. 그리고 나는 이불을 덮고 간이 침상 위에 누워있는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아들은 저기 있소.”
사내가 초로 안쪽을 비추었다. 악취가 대부분 어디서 나오는지 나는 그때 알 수 있었다. 이불에 덮인 침상의 왼쪽이 기괴할 정도로 부풀어있었다. 아마 아이가 이식받았다는 그 오른팔이 있는 곳이겠지. 사내는 아이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잡아 들추었다.
“세상에.”
“…미쳤군.”
다프네와 게오르그가 동시에 중얼거렸다. 아이의 목을 타고 살점과 촉수가 덮여있었다. 그건 아이의 생명을 양분 삼아 크기를 키워가는 종양과 같았다. 아이는 의식이 있는지, 호흡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저 촉수를 키워내는 흙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시스는 담담한 얼굴을 하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소. 이제는 저것들이 시간 단위로 자라나고 있는 것 같소. 아내는 아이의 모습이 기괴해질수록 좋아하며 정신이 이상해지고 있소.”
사내가 초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갑자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를 도와주시겠다면 무엇이든 하겠소. 성녀님, 부디 우리 아들을 구해주시오.”
아이시스는 손을 들었다. 금빛 빛무리가 아이시스의 손바닥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마력과 성질과 형태가 같았지만, 사람들이 성녀의 마력을 부르는 이름은 따로 있었다.
신성력(神聖力). 그 거룩하고 성스러운 힘.
“일로이.”
아이시스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시스의 파란 눈이 촛불의 빛과 신성력의 빛에 비치며 빛났다. 아직은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눈이었다.
“밖을 지켜주세요.”
하지만, 다시 후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이의 눈이기도 했다.
“…물론이지.”
아이시스는 몸을 돌리고는 곧장 아이의 몸에 돋아난 촉수 위로 손을 올리고 힘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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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 주교가 데려온 이단 심문관의 수는 많지 않았다. 실력을 충족한다고 판단한 네 사람. 아르옌, 마리안느, 자신, 그리고 이단심문관들의 부(副)대장. 주교는 텅 빈 미소로 자신을 안내하는 여인의 뒤를 따라 양조장에 줄을 섰다.
“정말 와주셨군요, 내무관님.”
안드레 주교는 고개를 끄덕였고, 여인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어둠과 인파 속을 걸어 양조장에 들어서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했다. 양조장이 벌컥 그 아가리를 벌렸다. 사람들은 줄지어 꾸역꾸역, 양조장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집중해라. 항상 나를 의식하고 있어라.
안드레 주교는 그리 신호를 보내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소리가 빠져나갈 구멍 없이 들어오는 사람들의 발소리 메아리로 바꾸었다.
덜컹.
양조장의 문이 굳게 닫혔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털썩털썩 주저앉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양조장의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선생님’이 들어왔다. 안드레 주교는 저도 모르게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바라보려 했으나, 주민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푹 숙이기 시작했기에, 덩달아 머리를 낮추었다. 들려오는 건 두꺼운 책을 단상 위로 올려놓는 소리.
“오늘도 이렇게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제자매님들.”
팔락 팔락. ‘선생님’은 인사말만을 남기고 책을 뒤적거리더니, 갑자기 텅, 하고 책을 덮었다.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설교회를 해보려 합니다.”
저벅, 저벅.
‘선생님’이 단상을 벗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주민들을 쭉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이 마을에 외부인이 방문했다고 하더군요.”
‘선생님’의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뒷짐을 진 것 같았다. 그리고서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어 나갔다.
“특히 어제, 이 마을에 빛의 신을 믿는 이들, 청교회의 신자들이 방문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아주 높은 지위에 있는 ‘성녀’가 말이지요.”
목소리는 서늘하고 무거웠다. 안드레 주교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직감했다.
“오늘은 여러분들이 우리의 믿음을, 제 가르침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한 번 직접 물어보려고 합니다.”
저벅, 저벅. 뒷짐을 지고 걷던 ‘선생님’이 갑자기 발을 멈추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자, 이 중에서 성녀가 구호 활동을 위해 마을을 찾았을 때, 직접 그녀에게 치유를 받은 적이 있는 형제들은 고개를 들어 저를 봐주세요.”
정적이 일었다. 그건 사람들 사이에서 일말의 망설임과 같았다. 그리고 ‘선생님’은 정적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주민들이 고개를 들 때까지,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서서 침묵을 유지했다. 정적은 길어질수록 무거워지고 적나라해진다. 사람들은 서로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경까지 오자,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윽.
한 명이 고개를 들었다. 안드레 주교의 앞자리에 앉아있던,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정직한 모습이 아주 보기 좋군요.”
말과는 달리, 전혀 보기 좋다는 듯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앞으로 나와서 줄을 서주세요. 그리고 다른 형제들은 고개를 들어, 저와 이 형제들을 봐주세요.”
안드레 주교는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선 줄 앞에,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은 여인의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더니, 여인의 어깨를 잡으며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어디를 치료받았는지 기억합니까.”
‘선생님’의 목소리는 속을 헤집는 것 같은 울림이 있었다. 여인은 멍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왼쪽 다리가 부러졌었는데, 성녀님께서 치료해주셨어요.”
“그렇습니까?”
‘선생님’은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가 그 힘은 결국 기만이고, 우리의 적이라고 누누이 말씀을 드렸거늘. 어찌 깨닫지를 못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선생님’의 손에는 어디서 꺼내 들었는지도 모를 쇠망치가 하나 쥐여 있었다.
“부러뜨리세요.”
여인은 망치를 받았다.
“그 힘이 당신의 다리를 더럽히기 전의 상태로 만들어놓으세요.”
침묵이 일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망치를 들어 올렸다. 안드레 주교는 그녀의 눈에 도사리는 두려움과 결심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두려우십니까.”
“…아니요.”
“그럼, 제가 직접 도와드리도록 하지요.”
쾅.
망치가 여인의 왼쪽 다리를 내려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