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0 - 70. 성녀와 용사 (2)
“용사다.”
누군가의 말이 그곳의 모든 사람을 돌아보게 했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늘어났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다섯, 다섯에서 스물. 때려 부수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고함마저 사라졌다. 청교도 신자를 찾아 죽여버릴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던 이들이 무표정이 되었다. 시선을 끌 생각으로 후드를 벗어 던지기는 했지만, 효과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진짜 용사다.”
“왜 여기 온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나를 마치 조각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듯했다. 수런거리는 구경꾼들의 소음으로 주민들이 천천히 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골목에서 마리안느와 게오르그를 뒤쫓던 사람들의 소란도 잦아들었다. 종말 숭배자든, 일반적인 주민이든, 바크틴스의 사람이었던 이들이 모조리 모여들고 있었다.
“[일로이]”
성검이 나를 불렀다. 나는 성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녀에게 의존할 때가 아니었다. 머리 위의 훈륜이 내뿜는 빛 너머로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몰려들었다. 빛이 없을 때 보이지 않았던 이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벌겋게 눈을 물들인 광자(狂者)들. 눈물을 울먹거리는 어린아이들, 경계하는 눈초리의 젊은 남자들, 얼룩덜룩한 앞치마를 꾹 붙든 여자들.
“…여긴 왜 다시 온 거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내게 물었다. 나는 그 말에 당신들을 구해주러 왔다며 대답을 들려줄 수 없었다. 일로이는, 용사 파티는 세계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어도 바크틴스를 지키는 건 실패했으니. 바크틴스가 곧 세계인 이 사람들에게는 세계를 지키는 데 실패한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거다.
“용사님, 당신도 저 청교회의 교도들과 함께 우리를, 선생님을 잡아가려 온 겁니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당신들을 잡아가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선생님이라면 모를까.”
“선생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오. 우리들을 보듬어주고, 우리가 왜 이런 일을 당했는지도 말해주었소. 이제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도 말해주고 말이오.”
노인의 목소리는 다 쉬어있었다.
“그 선생님이라는 사람의 치료를 받은 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흥미를 잃어가고 있어요. 지금도 여러분들의 행동에, 무서워 떠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잘못되었다고, 나는 확실하게 주민들에게 말했다. 내 말이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타인의 죽음을 고대하는 이들입니다. 결코 그들을 믿어서는 안 돼요.”
“…이제 우리가 마음을 기댈 곳마저 없애려고 하는 거요.”
“선생님과 그 가르침은 잘못되었습니다. 사람을 해하라는 건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는 주민들이 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천천히 말을 했다.
“그게 설령 당신들이 유일하게 마음을 기댈 곳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러분들을 끌어내려고 할 겁니다.”
“…우리에게 현실은, 이 세상은.”
노인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미 그날 사라졌소. 그 울분과 분노는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소이다. 세상은 이걸 축하하더이다. 그리고 다시 재앙이 이 세상을 덮쳤을 때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생기지 않았지요.”
노인이 허허, 하고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폐부의 깊은 곳을 사포로 긁어내는 것처럼 거칠고 매마른 웃음이었다.
“우리만 미치광이가 되었소. 북부는, 용사님, 당신이 너무 훌륭하게 지켜냈소. 그렇게 온 세상이 재앙을 쓰러트린 것을 기뻐하고 축하할 때, 바크틴스와 우리는 기억 속에서 사라진 채, 그 과거에 머무르며, 고통 속에서 세상을 원망하는 정신병자가 되었다는 말이오…!!”
노인은 당장이라도 끊어져 버릴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토해내며 휘청거리는 노인을 누군가가 옆에서 붙들었다.
“간사하다고 욕하시오. 속이 좁고 치졸하다고 매도하시오. 우리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테니 말이오. 다만 어설프고 막연하게 희망을 바라보라고 하는 무책임한 말보다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했던 이 결말이, 언젠가는 모두에게 닥쳐야 했을 일이라 하는 말이 우리를 더 위로해주었다는 사실도 아셔야 할 거요.”
노인은 색색거리며 숨을 내뱉었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는 노인을 따라 고개를 내렸다.
“…이젠 아무래도 상관이 없소. 용사, 그대가 이곳의 사람을 몰살하든, 내버려 두든 말이오.”
알지 못하는 일이다. 알지 못하는 고통이다. 하지만 모른다고 하여 귀를 막고 물러갈 수 없었다. 일로이의 죄도 아니고, 아르옌이나 아이시스의 죄도 아니다. 하지만 무죄가 곧 무책임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바크틴스의 주민들과 눈싸움하듯 한참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아마 저들이 절대 원하지 않았을 말을, 나는 입 밖으로 내었다.
“미안합니다.”
사람들의 눈이 흔들렸다. 대놓고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가 부족해서 이곳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발아래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여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악신 숭배자였다. 그는 입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장관이군, 장관이야!! 이 장소를 이 꼴로 몰아가 놓고, 돌아와 고작 한다는 게 말뿐인 사과라니. 우습기 그지없어.”
나는 그를 무시했다. 숭배자는 꺽꺽대며 피거품을 입에 물고 계속 웃었다.
“아주 추한 모습이구나, 용사여!”
하지만 숭배자의 말은 주민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았다. 주민들은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었다. 주로 느껴지는 건 분노와 원망, 그리고 허무함.
“…당신이 그렇게 사과해버리면.”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파괴된 집은, 땅은, 죽은 가족은. 사과로 돌아오지 않잖아. 그리고 사과, 뻔뻔하게 고개를 숙이는 건 우리를 바보 취급하는 거야? 너만 선한 사람이 되고, 우리는 사과하는 사람에게 욕설을 던지는 추한 집단으로 만들려고? 좋아. 어디까지 우리가 추해질 수 있는지, 보여줄게.”
휙.
여인이 손에 들고 있던 양동이를 내게 던졌다. 가녀린 팔로 던진 양동이는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고 내 팔에 맞고는 힘없이 튕겨 나가 바닥을 퉁퉁 굴렀다. 저들도 아마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알고 있을 거다. 정말 누구 하나의 잘못으로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사과한다고… 사과한다고… 나는.”
여인은 그러고서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이어,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표정을 다양하게 바꾸며 나를 노려보았다. 수십, 수백. 천에 달하는 원망이 나를 화살과 창날처럼 꿰뚫었다. 나는 작게 숨을 쉬며 그들의 감정을 하나하나 보았다.
“…왜 우리가 이러고 있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내 발치로 작은 돌이 툭, 떨어졌다.
“왜 우리만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데!!”
내게로 날아오는 물건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돌덩이. 나무판자, 양동이, 파이프. 나는 날아오는 물건들을 방어하지 않고 고스란히 맞았다. 신체는 강화하지 않았다. 머리 위의 띄운 훈륜을 지우지도 않았다.
퍽. 퍽. 내 몸을 때리는 물건들이 점차 늘어났다. 옷이 찢어졌다. 팔에 멍이 들었다. 어깨의 살갖이 찢어지고 이마에 양동이가 날아들었다. 돌이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어떻게 거기는 지켰는데. 왜 우리는 지키지 못했는데.”
퍽. 퍽. 날아드는 물건만큼 아픈 건 그들의 말이었다. 내 일이 아니었던 것을 내 일로 받아들이는 건 기만이었고, 어쩌면 저들에게도 다른 죄를 씌워버리는 셈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사과조차 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부정하는 이들의 말이 정당화된다. 이곳이 저버려졌다는 말들이 사실이 되어버린다. 나는, 그렇게 둘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이들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을 테니까.
“내 가족은. 내 고향은…!”
퍽. 퍽. 내 몸에 상처가 늘어갈수록 사람들의 분노도 함께 커졌다. 날아오는 물건은 원망과 분노였다. 아프다. 저들이 입은 상처는 이토록 아프다.
“누가 돌려주는 건데….”
이마가 찢어지고 멍이 늘어났다. 맞은 곳에 또 물건이 날아들면 더 아팠다.
“왜…. 왜!! 우리는 이렇게 됐어야 하는 건데!!”
주먹만한 돌이 머리로 날아들었다. 이마가 찢어진 곳을 돌이 한 번 더 찍었다. 상처가 터지며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아팠다. 나는 한 발짝을 주춤거렸다.
“어째서. 어째서.”
왜냐고 묻는 공허한 질문들이 허공에 맴돌았다. 분노가 하나둘씩 울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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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이가 무수히 쏟아지는 잡동사니의 세례를 받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일로이는 신체를 보호하려 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이시스는 그대로 얼어붙은 채 군중 사이에서 일로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로는 빛나는 훈륜을 띄운 채로, 눈은 가만히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무토막을, 쇠 파이프를, 돌멩이를 맞고 있었다.
“일로이….”
다프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력을 소진해버린 그녀는 걸을 힘조차 없이 무력하게 일로이를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분노한 다프네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그녀의 살을 파고들며 피가 흘러내렸다.
아이시스는 숨을 내쉬려 했지만, 숨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구멍이 막혀 무언가를 내뿜는 것을 막아버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감정과 생각이 머릿속에 갇혀 맴돌았다.
“왜 이곳은 부서졌어야 하냐고!”
저 원망을 받아야 하는 건 일로이가 아니었다. 그의 선택이었다면 이곳을 정말 구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저곳에 서서 돌을 맞아 마땅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아이시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프다. 저 말들이 일로이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프다. 직접 저 말을 맞는다면 마음은 더욱 아프겠지. 그는 끝까지 이 도시를 지키고자 했으니까.
퍽.
일로이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옷은 반쯤 넝마가 되었고 머리는 깨진 채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시스는 저도 모르게 사람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사람들을 옆으로 밀면서, 앞으로 나섰다. 일로이의 고개가 아이시스를 향해 돌아갔다. 경악한 일로이의 표정. 아이시스는 그를 막아서기 위해 달려갔고, 군중 속에서 이질적인 외침이 들려왔다.
“죽어!!”
그건, 사람들의 원망과 분노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종류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아이시스는 무언가 반짝이는 물체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물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이시스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거구나. 내가 이렇게 벌을 받는 거구나. 아이시스는 눈을 감았다.
퍽.
고통은 없었다. 아이시스는 그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눈을 떴다. 눈앞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시스, 그녀의 피는 아니었다. 아이시스는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등을 받치는 누군가의 손길이 또 느껴졌다.
“아무래도 아직 숨어있는 놈이 있는 모양이군.”
일로이의 손을 단검이 꿰뚫고 있었다. 아이시스는 단검의 검자루에 새겨진 역오각성을 보고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일로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군중 속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게오르그, 마리안느!”
일로이의 외침에 두 그림자가 골목에서 뛰쳐나왔다. 사람들을 헤치고 뛰어나가려는 누군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달려오는 게오르그와 마리안느에게 붙잡히고는 꼴사나운 비명을 내뱉었다. 일로이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그곳을 응시하다가, 다시 사람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결코 성녀님을 해하려던 건….”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들도 알고 있었을 거다. 용사가 마음만 먹으면 눈감고도 그들 전부를 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일로이는 그러지 않는다. 그는 이내 표정을 풀고는 손에 박힌 단검을 뽑아 허리띠에 찼다. 일로이의 왼손을 타고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알고 있습니다.”
어색한 침묵의 순간이 이어졌다. 아이시스는 일로이에게 부축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잡아야 했다. 그들은 그날, 크라켄과의 일전이 있던 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여러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이시스는 입을 열었고, 사람들은 아이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일로이는 재빠르게 아이시스의 입을 막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시스는 일로이의 손을 밀어내려 했으나, 일로이는 완강했다.
어째서. 내가 당신의 오해를 풀어줄 기회를 주지 않는 거야. 당신이 감당할 아픔이 아니잖아. 당신이 받아야 할 원망이, 분노가 아니잖아.
“부탁이야.”
아이시스는 그리 짧게 말하는 일로이의 말을 듣고는 그의 팔을 부여잡고 무릎을 꿇었다. 아이시스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일로이는 아이시스가 입을 열게 놔두지 않았다. 그때, 골목 한구석에서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곳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함께 들렸다.
“성녀님!!”
최악의,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사내가 제 아들을 데리고 군중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는 졸린 듯 눈을 비비적거리다가, 수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광경을 보고는 놀라 눈을 홉떴다.
“어디를 갑자기 나가시나 했더니, 이런 일에….”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멀쩡한 사내의 아이를 보았다.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네 아들은….”
사내가 고개를 젓고는 아이시스를 향해 고갯짓했다.
“성녀님께서 방금 고쳐주셨어. 자네들이 떠들던, 그 망할 ‘선생님’의 사이비 주술을 벗기고, 이렇게 멀쩡히 치료해주셨다는 말일세.”
사내는 사람들을 향해 호소하듯 말했다.
“제발, 눈을 똑바로 뜨고 보게. 그들은 우리를 이용하려고 하고 있을 뿐이야. 정신을 현혹하는 말 따위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누가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려고 하는지 봐달라는 말일세.”
소란이 일었다. 아이시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논쟁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신의 이야기는 잊어버린 듯했다. 사람들은 두 패로 나뉘어 격렬하게 논쟁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말이 옳다며 끝까지 주장하는 사람들과 사내가 하나둘씩 설득하기 시작한 사람들. 이단에 대한 믿음은 차츰 부서지기 시작했지만, 아이시스가 말하려던 진실은 그럴수록 더욱 묻혀갔다.
“말하지 마.”
일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로이의 팔을 붙잡은 아이시스의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이미 이런 상황이다. 아이시스도 더는 진실을 말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이시스가 손에서 힘을 빼자, 일로이는 그때야 아이시스로부터 손을 떼었다. 몸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아이시스는 탈진한 채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잠시 실례할게.”
일로이가 아이시스를 안아 들었다. 아이시스는 무력하게 일로이의 팔에 들려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 풍경이 다시 아이시스의 가슴을 할퀴는 것 같았다.
“용사님.”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 그를 도와주었던 사람의 정체가 용사라는 사실에 적잖이 동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는 복잡한 눈으로 일로이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님과 함께 가시지요.”
일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이시스를 안아 든 채로 군중 속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의 물결이 갈라지며 일로이에게 길을 터주었지만, 그 시선은 곱지 않았다. 여전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아이시스를 향한 일부 동정. 아이시스는 차마 그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틀어 일로이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았다.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마.”
“우리는 이 일을 잊지 않을 거니까. 당신도 이곳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살아.”
사람들이 말을 던졌다. 일로이는 그들이 말을 던지는 대로 다 맞고 있었다. 아이시스는 부들거리며 일로이의 옷깃을 붙잡다가, 힘겹게 손을 들어 올려 일로이의 귀 위로 올렸다.
“내가 들어야 할 말이에요. 당신이 들을 필요가 없잖아요.”
일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며, 팔을 내리라는 듯 눈짓했다.
“내가 들어야 할 말이지.”
일로이는 그리 말하며 묵묵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비난은 계속 날아들었다. 아이시스는 다시 일로이의 옷깃을 잡으며 얼굴을 숙였다. 피투성이가 된 용사는, 마음이 아플 정도로 덤덤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꾹.
아이시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참으려 했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죄책감, 회한, 후회. 아이시스는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간절하게 일로이를 붙들었다.
“잘못했어요….”
울먹임과 함께 아이시스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죄를 고백하듯, 아이시스는 울면서 잘못을 토하고 용서를 빌었다.
“미안해요….”
어두운 하늘에 개벽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용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걸어갈 뿐이었고, 성녀는 그런 용사의 품에서 울며 끝없이 사과의 말을 되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