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71화 (72/158)

Chapter 71 - 71. 성녀와 용사 (3)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냐.”

악신 숭배자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타르처럼 검고 끈적한 피를 쏟아내는, 잘려버린 팔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저 미친 검사에게는 적당히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있어 상성이 좋지 않았다. 적이라고 판단하면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는 자들. 파고들 마음의 틈새가 보이지 않는 자들.

“정말 혼자서 이 괴물들을 죄다 썰어버렸군요.”

안드레 주교의 발밑에는 무수한 비수가 박힌 채 버둥거리는 악신 숭배자가 있었다. 주교는 그것의 머리를 마치 발판이라도 되는 것처럼 콰직, 짓밟고는 태연자약하게 아르옌을 바라보았다. 아르옌의 앞에는 잘린 촉수의 무더기, 그리고 피 웅덩이 속에 잠긴, 토막난 악신 숭배자들의 신체 부위들.

“꺼림칙한 힘을 거리낌 없이 쓰는 놈들이더군. 덕분에 생각보다 오래 걸렸어.”

아르옌은 그리 내뱉으며 거슬린다는 듯 악신 숭배자들이 남긴 촉수를 걷어찼다. 놈들을 붙잡아서 뒷배를 캐내야 하니, 단숨에 죽여버릴 수는 없었다. 힘 조절을 하며 싸우는 건 이따금 전력으로 싸우는 것보다 힘들었다.

재앙의 힘은 만만치 않았다. 촉수는 베어내도 베어내도 재생했다. 오러를 사용하면 놈들을 죽여버릴 것 같고, 안 그러자니 놈들을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르옌은 그들을 계속 붙들었다. 한 번에 대여섯씩 달려드는 놈들의 촉수와 공격을 막아내는 것을 넘어 베어내고 잘라냈다. 놈들이 더 재생할 수 없을 때까지.

“지독한… 놈.”

악신 숭배자가 그리 중얼거리며 아르옌을 바라보았다. 아르옌은 증오 어린 얼굴로 숭배자들을 내려다보았다.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촉수를 더 만들어낼 수 있다면 만들어봐라. 얼마든지 상대해줄 테니까.”

촉수는 아르옌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주기는커녕 스치지도 못했다. 아르옌은 지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재앙 숭배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다가, 이내 머리를 뒤로 젖히며 쓰러졌다. 아르옌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렇게까지 미쳐있는 놈들은 본 적이 없어. 악신을 숭배하다 보니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이런 놈들이었기에 악신을 숭배하는 건지는.”

“그건 우리도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궁금하면, 이제 직접 물어보아야겠죠.”

주교는 마지막으로 숭배자의 머리를 바닥에 뭉개버리고 우두머리 숭배자에게로 다가갔다. 아직 망토 안에 비수가 많이 남았다. 놈에게 밤새도록 질문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심문 과정을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당신은 바깥 상황 돌아가는 게 전혀 걱정도 되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그야, 용사님이 있는데 걱정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겠습니까.”

안드레 주교는 망토에 손을 집어넣고 뒤적거리며 알맞은 암기를 고르기 시작했다.

“용사님이 계시는 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겁니다.”

“…그 녀석을 상당히 신뢰하나보군.”

“신뢰라기보다는, 믿음이라고 해두겠습니다. 종교적 신앙과 비슷한 종류의.”

주교는 품속에서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단검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날이 날카롭게 가다듬어졌는지 주교는 검신을 문질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역수로 틀어쥐었다.

“제 예상을 벗어나고, 어느덧 제가 제시할 수 있던 것보다도 훨씬 이상에 가까운 결과를 완성한 사람을 위한 경의입니다.”

안드레 주교는 악신 숭배자의 잘린 팔을 밟고서 무릎을 굽혔다. 싱글벙글 웃는 표정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주교는 그리고서 비수를 악신 숭배자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자, 그럼 간단한 맛보기를 시작해볼까요? 이것도 일이니까요.”

“우리가… 네놈이 그런다고 입이나 열 것 같더냐.”

결의를 다지는 듯한 악신 숭배자의 말에 안드레 주교는 큭큭 웃음을 내뱉었다.

“내 손에 걸린 놈들은 다 그렇게 말하더군요. 말하지 않겠다고. 그놈들 중에서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은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안드레 주교가 단검의 검신을 쓸어내리자 금빛 성법기가 그를 따라 피어올랐다. 주교의 성법기는 마치 동굴 속에서 타오르는 불과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당신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한 번 봅시다. 명색이 악신 숭배자이니, 조금은 더 버텨줄 수 있겠죠?”

안드레 주교가 내비치는 미소에 악신 숭배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안드레 주교는 내친김에 아예 악신 숭배자의 몸을 깔고 앉아버렸다.

“부러뜨리고 잘라낼 만한 게 없으니, 가볍게 살갗을 벗겨내는 것부터 시작해볼까요. 얼굴은 제일 마지막에 건드리는 게 좋겠죠. 이를 지금 다 뽑았다가는 대답도 하지 못할 테니.”

악신 숭배자는 코웃음이라도 칠 기세로 안드레 주교를 노려보았으나, 성법기가 감싼 단검의 검날이 그 살갗에 와닿자, 금세 얼어붙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팔다리의 절단면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안드레 주교의 눈에 희열의 빛이 일렁였고, 악신 숭배자는 질겁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자…잠깐. 끄으으윽!”

안드레 주교는 포를 뜨듯 악신 숭배자의 살에 칼날을 얕게 집어넣었다. 칼날은 촉수의 저항을 뚫으며 힘겹게 들어갔지만, 되려 그리 천천히 살을 잘라내는 감각이 더 고통스러운 듯했다. 안드레 주교는 비명이 배경음악이라도 되는 것처럼 즐기며 고개를 돌려 아르엔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의 일은 얼추 끝난 것 같으니, 밖의 상황을 확인하러 가시겠습니까? 슬슬 해가 뜰 때가 되었는데도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이시스가 아무래도 정말 성공한 것 같군요.”

끄아아아아악.

아르옌은 다시 비명을 토해내는 악신 숭배자를 보고는 발걸음을 돌려 양조장 밖으로 나섰다. 하늘이 어슴푸레한 남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양조장 끝으로 펼쳐진 대로 위에, 아까 전까지 종말 숭배를 하던 사람들이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깨 너머로는 악신 숭배자로 보이는 이들이 손발이 묶인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게오르그.”

아르옌은 악신 숭배자들을 감시하고 있던 게오르그에게로 다가갔다. 작정하고 노려보는 기사단장의 일그러진 얼굴은 여느 마수의 그것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게오르그는 고개를 들어 아르옌을 바라보더니 눈썹을 까닥였다.

“아르옌. 다른 놈들은 다 붙잡은 건가?”

“그래. 지금 안드레 주교가 양조장 안에서 놈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거다.”

멀쩡한 대화는 아니겠군. 게오르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시스는?”

게오르그는 그때야 생각이 났다는 듯 아, 하고 손바닥을 쳤다.

“아이시스가 성공했어. 그 아이를 완벽하게 치유했다고. 치유 마법이 성장한 건지, 아이의 잘렸던 손까지 자라게 했더군.”

게오르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아이시스가 말한 대로 계획이 실행되었는데도 기쁨 보다는 다른 곳에 눈치가 팔려있는 것 같았다.

“성공했군.”

“그래. 덕분에 아이시스의 치유 능력도 성장할 수 있었고.”

게오르그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아이시스에게 도움을 받은 주민 하나가 열심히 설득하고 있어.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은 대체로 종말 숭배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아직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지.”

그런가.

아르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시스는 무사한 거겠지?”

“그래. 마력을 좀 많이 써서 탈진하긴 했지만, 상처 하나 안 입고 무사했어. 일로이가 데리고 교회로 돌아갔지.”

상처 하나 없이. 라는 말에 아르옌이 안도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주민들이 물불 가리지 않겠다는 듯 양조장을 나섰을 때는, 바깥의 일이 잘못될 줄 알았는데.

“…그래. 일로이가 이번에도 지켜냈어.”

게오르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르옌은 무표정하게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떼었다. 계속 미뤄왔지만, 더 미룰 수는 없었다.

대화가 필요했다. 용사와의 대화가.

아르옌은 그리 마음을 다잡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여태 애써 피해왔던 어떤 형태의 진실을, 혹은 변화를 마주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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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읽으면서 몰랐던 사실 하나. 아이시스는 울보였다.

“미안해요.”

내가 안고 있을 때도 계속 훌쩍거리고 있었는데, 교회에 도착해서 침실에 앉혀놓으니 또 울기 시작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뭐 잘못 먹었나. 나는 뻘쭘하게 아이시스가 앉은 침상의 맞은편 바닥에 정좌했다.

“내가 잘못한 건데, 그때는 그냥 단지 무서워서…. 이곳의 사람들도 생각하지 못하고.”

훌쩍.

아이시스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손으로 슥슥 눈가를 닦으니까, 눈물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 서럽게 우니까 내가 다 무안해지잖아.

“[위로라도 해주는 게 어떠냐? 그냥 놓아두는 것도 좀 그런 모양새니까.]”

미안. 위로에는 재주가 없는 데다가 내가 위로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걸.

나는 한숨을 내쉬며 조금 편하게 자세를 바꿔 앉았다. 내 한숨에 아이시스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렇게 보니, 아이시스가 아직 어리다는 게 참 실감이 되었다. 아이시스는 혼자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다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동자는 파란데, 눈시울은 새빨갰다. 머리카락이 얼굴 군데군데 달라붙어 있었다. 엉망이로군.

“아이시스.”

내가 이름을 부르자, 아이시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우선, 수고했어. 덕분에 이곳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어. 악신 숭배자들의 꼬리를 잡는 것도 아마 성공했을 거고. 다친 사람들을 더 보살필 기회도 있을 거니까.”

아이시스는 눈을 깜박였다. 눈물방울이 눈을 깜박일 때 조금씩 튀었다.

“그때 생각하지 못한 걸 조금이나마 갚은 거일 뿐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보살펴야겠죠. 아픈 사람을,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찾아서요.”

아이시스의 말은 훨씬 성숙해졌다. 나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다행이네.”

“…당신이 나를 이곳에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한 덕분이에요.”

그리 말하는 아이시스의 목소리가 쥐구멍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걸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냥, 그때는 그저 당신이 미워서…. 홧김에 그런 말을 하고 뛰쳐나왔는데. 당신은 나를 탓하지도 않고.”

내가 저지른 잘못이 많네요. 아이시스는 메마른 웃음을 지으며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는 내가 파티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지 못한 거지. 용사라는 직함을 단 주제에.”

“아뇨. 내가…우리가 잘못한 점이 너무 커요. 당신이 그저께 나를 믿어주었던 것처럼, 내가 그때 당신을 믿어주었더라면.”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과거의 잘못을 생각하고 상기하는 건 좋지만, 가정으로 흘러가는 건 좋지 않았다.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지, 가정은 과거에 머무르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마력이 조금 회복됐어요. 바로 치료해줄게요.”

아이시스는 그리 말하며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내게 조금 가까이 다가왔다. 아이시스의 손이 내 머리, 상처가 있는 곳에 가 닿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렸고, 내 손에 휑하니 뚫린 구멍을 본 아이시스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많이…아팠죠.”

아이시스는 아주 조심스럽게 내 다친 손으로 그녀의 손을 가져갔다.

“나… 나 대신. 흑.”

아이시스가 그 사실을 밝히게 둘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믿음이 종말 숭배자들의 논리에서 아이시스의 헌신으로 기울어지던 때, 아이시스가 그녀의 잘못을 실토해버린다면 그대로 판이 엎어지고, 종말 숭배를 부정하던 이들마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괜찮아.”

그래. 그렇게 분노를 사고 원망받으며, 겨우 날아오는 돌 따위를 맞아서 그들을 구할 수 있었다면, 그걸로 된 거다. 거인의 주먹도 맞아봤는데 돌이 대수일까.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의 깊이가 깊었다. 아마 저 미안하다는 말은, 내게만 하는 말은 아닐 거다. 음, 또 눈물보가 터진 건가. 아이시스는 내 손을 주물럭거리다가, 다시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빛의 따스한 힘이 머리에서부터 나를 천천히 감쌌다. 지끈거리던 감각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치료됐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시스가 손을 떼며 말했다. 상처는 말 그대로 씻은 듯이 나았다. 이런 치유사가 우리 파티에도 한 명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나는 쓰게 웃었다.

“이 힘으로 이제 다른 사람을 더 도우면 돼.”

“네. 그렇게 할 거예요.”

아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엉망이 된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히로인은 역시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군.

“[너는 아무나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게 취미더냐.]”

…아니야. 아니라고.

성검이 애먼 오해를 하려 했다. 나는 난데없이 고개를 휙휙 내저을 뻔한 걸 간신히 붙들며 성검의 검자루를 꾹 쥐었다.

“…전 세수 좀 하고 올게요.”

아이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세수를 할 필요가 있긴 했다. 눈물도 좀 닦고. 코도 좀 풀고. 머리카락도 좀 정리하고. 아이시스는 터덜터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이야기는 다 끝났나보군.”

그리고, 문가에 선 사람을 마주하고는 아이시스가 토끼 눈을 뜨고 멈추었다. 어딘가 피로한 기색의 아르옌이었다. 아이시스를 찾으러 온 건가? 악신 숭배자들은 잘 잡았나 보네.

내 예상과는 달리 아르옌은 문으로 쏙 빠져나가는 아이시스를 곁눈으로 바라보고 다시 방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정확히 응시하면서 말이다.

“이야기 좀 하지.”

나는 그리 말해오는 아르옌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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