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2 - 72. 기억 속에 (1)
나는 다 찢어진 옷을 갈아입고서 어색한 모양새로 아르엔을 만났다. 밤새 한숨도 못 잤지만, 아직 피로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아르옌은 악신 숭배자들을 잡으러 갈 때의 복장 그대로, 교회 뒤뜰의 의자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가 새벽하늘을 가르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는 아르옌을 바라보며 바로 물었다. 잡담이나 편하게 나눌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구했더군.”
아르옌은 앞뒤 맥락 없이 그리 말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서 굳이 앞뒤 설명을 붙이라며 시비를 걸고 싶지는 않았다.
“그야, 구할 수 있었으니까.”
“너는 원래 그렇게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말할 줄 아는 녀석이 아니었다.”
아르옌은 나를 바라보았다. 저 녀석이 나를 볼 때면 항상 눈살을 찌푸리거나 곁눈질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고 정면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변했을지도 모르지. 내가 어떻게 그걸 내 입으로 말할 수 있겠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르옌은 내 말투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정원의 풀밭을 향해 고개를 떨구었다. 언덕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아르옌의 너저분한 검은 머리가 흩날렸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얼마든지.”
그간 속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질문을 정돈하고 있었던 건가. 나는 아르옌이 앉은 벤치와 떨어진 벤치로 가 앉았다. 멀리서 보면 남정네 둘이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다른 곳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장면으로 보일 거다.
“어떻게 막았던 거냐.”
“뭘 말이야.”
앞뒤 잘라먹고 말한 다음 부연 설명을 붙이는 건 얘 특징인가. 아르옌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저 눈은 이렇게 말했으면 알아들어야지,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긴 했다. 참, 내가 빙의하기 전의 일로이도 일로이지만, 아르옌도 화법을 좀 고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종말 숭배자들.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혼자 막아낸 거지.”
아르옌의 목소리는 어딘가 서늘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불신과 혼란이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치는 아르옌의 눈동자가 나를 포착했다. 답을 구하는 건지, 나를 옭아매려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주민들이 생각보다 용사에 관심이 많더라고.”
너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아르옌을 보았다. 아이를 죽였더라면 이 마을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아이의 아버지, 정신을 멀쩡하게 차리고 있던 사내라도 미쳐버렸을 거다. 외부인이 부락의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만으로 이곳의 사람들과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겠지. 물론 저 녀석의 능력이라면 그렇게 되어도 악신 숭배자들 정도는 손쉽게 잡아냈겠지만, 희생은 불가피했을 거다.
그리고, 결국 결말은 아이를 치료하려 시도한 것만 못하게 되었을 것이고.
“용사에 관심이 많았다니. 네가 나서서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라도 한 거냐?”
“대충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되겠네.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고. 자세히 말하고 싶지도 않아.”
아르옌은 내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한동안 말없이 허공을 바라보았다.
“원망이 있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때의 용사 파티가 원망받아 마땅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후의 처리는 왕국의 몫이었지만, 왕국은 크라켄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쿡. 아르옌의 발끝이 잔디를 파고들었다.
“다음 재앙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곳에 쏟아부을 힘을 아껴 에버노드에 투입해야 했겠지. 그런 점에서 왕국은 최선을 다했어. 지금도 복구는 조금씩 진척되고 있다.”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냉정했다.
“저들의 원망을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땅을 옮기지 않고 종말 숭배라는 몰락을 선택한 건 저들의 몫이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기계적이고, 이성적인 말이었다. 나는 하지만 그 말에 분노하지 않았다. 내가 아는 이야기는 용병 아르옌의 이야기. 그가 어째서 저렇게까지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분노하지 않는다고 해서 저 말에 내가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이 사람들을 구하는 방법이 원망을 받아들이는 거라면, 기꺼이. 뭐, 사람들을 구해낸 건 내가 아니라, 아이시스였지만 말이지.”
나는 일부러 이번 일에 최소한으로 개입했다. 내가 나타났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도 모르고, 괜히 설치고 다녔다가는 반발만 샀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원성을 받아내는 것밖에는 없었다.
“내게 원망을 돌리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을 텐데.”
“그런 유치한 짓 따위 할까 보냐.”
나는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아르옌의 말에 대답했다.
“구원은 너무도 달콤한 말이다.”
아르옌이 쓰고 공허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어둠에서 빠져나갈 출구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허상이라는 걸 깨달아버린다면 사람은 한순간에 절망하지. 그리고 깨닫는다. 그런 편리한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난 구할 거다. 언젠가 그런 때가 온다는 걸 만약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게 잘못은 아니잖아.”
아르옌은 손을 머리에 짚고는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다. 높은 하늘 속에 구름이 조각처럼 떠내려가고 있었다.
“…역시 나는 네놈과 맞지 않아.”
“그러냐.”
아르엔의 목소리에 분노는 없었다. 나는 하늘에서 서서히 시선을 내려가며 아르옌이 고개를 숙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게 중요한 건 내 사람뿐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의 세계를 지키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겠지. 이곳의 주민들도 그렇기에 종말 숭배자들에게 빠지고, 세계가 멸망할 날만을 기다리며 악신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그들의 세계는 그때 끝났을 테니까.”
아르옌은 고개를 돌려 교회를, 교회 너머로 있을 내리막길을, 그리고 그 내리막길 끝에 있을 부락의 광경을 바라보려 했다.
“만약 아이시스가 그 와중에 다치기라도 했으면, 나는 검을 뽑았을 거다. 그리고 아이시스를 다치게 만든 무리를 쓸어버렸겠지. 안드레 주교가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그들이 그들의 세계를 잃었을 때처럼, 나도 그들을 원망하고 증오할 테니까.”
다시금 나와 아르옌이 눈을 마주쳤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아마 너희 두 사람을 막아섰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으려 했겠지.”
“세상에 베푸는 온정은 내 세계를 지키고 나서 남는 것으로 하는 거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말이지.”
아르옌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손에 담긴 것조차 불안한 상황에서 남의 세계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건 멀쩡하게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설령 그것이 용사라고 해도 말이야.”
아르옌이 고개를 내저었다.
“못한다. 나는 그렇게 단정할 수 있어. 내 목에 칼을 들이민다 해도 이 대답은 바뀌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일로이, 내가 바라보는 네 방식은 그만큼 위태로웠다.”
아르엔이 말을 이어갔다. 조금씩, 그 말에 아르옌의 감정이 담기고 있었다.
“그때 우리가 네 말에 따랐더라면 크라켄을 막을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어. 하지만 분명, 우리 파티 중 누군가는 죽었어야 할 거다.”
아르옌은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나는 선하지 않아. 그렇기에 내 것과 남의 것을 확실히 구분하고, 내 것을 지키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항상 선(善)만이 정답이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르옌은 자신으로 하여 세상에 선(線)을 긋고 있었다.
“구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순간이 파멸의 순간이라고 생각해. 누군가는 그를 믿고, 누군가는 그걸 행해야만 우리가 종말에 먹히지 않을 테니. 누군가는 바보같이 모든 걸 지키고 싶다고 바라고 생각해야만 하니까.”
나는 아르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세상에는 네가 말한 자신의 세계마저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 있거든."
“말 그대로 바보 같은 생각이로군.”
챙-!!
우리의 검은 동시에 부딪쳤다. 나는 튀는 불꽃 너머로 아르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결국 난 널 도울 수 없을 거 같군.”
“너를 쫓아낸 건 나니까. 네 도움을 바라지 않는 건 내 쪽이지.”
뿌드득. 아르옌은 내 상승한 기량에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이내 모으며 일그러뜨렸다. 답답함, 혼란. 나는 아르옌의 눈에서 그런 감정을 읽어냈다. 우리는 한동안 검을 겨누며 대치했고, 아르옌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괜히 네 번째 재앙을 쓰러트린 게 아니라는 거군.”
“대련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야.”
아르옌은 다시 내게로 달려왔다. 아르옌의 검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고 정교하고, 교묘했다. 막아내자니 무거웠고, 피하면 주도권을 빼앗길 거다. 나는 아르옌의 검끝에 검끝을 맞추며 공격을 짓이겨 들어갔다.
“…!”
카각.
검들이 뱀처럼 얽히며 날카로운 울음을 토해냈다. 나는 무표정이었고, 아르옌의 입가는 조금 일그러져있었다. 나는 두 손으로 성검의 검자루를 잡고 아래로 쓸어내리듯 검을 그었다. 아르옌은 검격에 저항하지 않고 성검의 검날을 타고 검을 아래로 내리고는 자루 끝으로 내 머리를 노렸다.
후웅.
숙이면 동작이 커진다. 나는 몸을 반대편으로 돌려 아르옌의 공격을 흘렸다. 아르옌의 몸은 비어있었지만, 크게 돌아간 팔은 언제든 회수될 준비가 되어있었다. 나는 팔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어깨를 들이밀며 아르옌의 균형을 무너뜨리려 했다.
“아직.”
콰직.
팔에 느껴지는 둔탁한 통증. 아르옌은 그대로 무릎을 들어 올려 내 몸을 찍었다. 하지만,
“-!”
그걸로 물러나기에는 내 몸이 아르옌의 생각보다 좀 더 튼튼해진 것 같았다.
텅.
아르옌이 뒤로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나는 오른쪽으로 젖혀두었던 양팔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려 그었다. 아르옌은 균형이 흐트러진 와중에도 내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해냈다. 그리고, 오러를 사용하지도 않고 마나를 사용하지도 않은, 순수한 검과 검의 싸움이 이어졌다.
밀린다.
마물을 썰어대는 일이라면 모를까, 사람과의 싸움에서 나는 저 녀석을 절대 이길 수 없다. 기량, 경험, 순간 판단. 완력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나는 아르옌에게 잡아먹히듯 밀리고 있었다. 대등하게 겨루던 초반의 기세에서 점차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콰광-!!
아르옌의 검과 내 검이 허공에서 충돌하고는 멈추었다. 이마에서 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르옌의 얼굴 위에 떠오른 일그러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르옌은 내 표정을 확인하더니 이내 대치 상황에서 팔에 힘을 쭉 빼버리고는 검을 내려놓았다.
“…?”
왜 그러냐고, 눈으로 물었지만 아르옌은 제멋대로 검을 검집으로 회수하며 내 눈길을 무시했다.
“너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도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아르옌은 내뱉듯이 말하고는 이내 교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르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과는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또 부딪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저놈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진 말아라, 일로이.]”
성검이 멍하게 서 있는 나를 위로하듯 말해주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성검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있는데 뭐. 나는 피식 웃고는 검자루를 쓰다듬었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있지 않느냐.]”
성검은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쓰게 웃으며 뒤뜰의 의자에 다시 주저앉았다. 사람들의 원성, 아이시스의 일. 지난 이틀 동안 에버노드에서와는 다른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나는 눈을 감았다 뜨고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흘러가던 조각구름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 보이지 않고 쾌청한 하늘만이 보였다.
아무래도 오늘 아르옌과의 대화는, 당분간 잊히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