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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74화 (75/158)

Chapter 74 - 74. 기억 속에 (3)

“우리는 수리 용병대야.”

여인은 캐러밴 속에서 아르옌에게 그리 말했다. 아르옌은 흐리멍텅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구릿빛에 가까운 피부에 안대, 짧게 자른 검은 머리. 여인은 캐러밴에 함께 타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턱짓을 하며 한 명씩 이름을 불렀다.

“찰리, 돈, 브렛, 맥, 히니.”

여인이 이름을 한 번씩 부를 때마다 험상궂은 남자들이 아르옌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내 별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쪽잠을 취하기 시작하거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으적으적 먹기 시작했다. 여인은 그런 동료들을 바라보며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말을 몰고 있는 놈은 발터. 그라고 나는 칼라라고 해.”

아르옌은 노려봄과 바라봄. 그 어딘가에 있는 시선으로 칼라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감각은 아직 그 피바다에 잠겨있는데, 몸만 덩그러니 남겨져 이송되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들은 나를 데려가서 어떻게 하려는 걸까. 죽거나 팔려가는 걸까.

“이름을 말했으면 너도 이름을 말해주는 게 예의다, 꼬마.”

남자. 찰리라고 불린 대머리 용병이 굵직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아르옌은 별 관심 없다는 듯 남자의 말을 흘려들었다. 딱. 소리가 나며 아르옌의 머리를 칼라의 손가락이 때렸다. 아르옌은 눈빛을 사납게 바꾸며 칼라를 향한 눈빛을 적개심으로 바꾸었다.

“이름, 뭐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는 아르옌의 입을 열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아르옌 엘미온.”

엘미온은 아주 먼 옛날 부여받은 성이라고 했다. 그리 의미는 없었지만. 아르옌은 그게 괜히 이름을 늘릴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름을 내뱉는 혀가 거칠었다. 아르엔은 혀를 짓씹었다.

“아르옌이구나. 잘 부탁해, 아르옌.”

아르옌은 고개를 휙 돌렸다. 칼라는 그런 아르옌이 귀엽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손을 슥 내렸다. 동료 용병들이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피식거리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당신들, 크롬의 편이잖아.”

크롬은 적국. 아르옌은 그리 되뇌며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르옌의 말에 칼라가 큭큭거리면서 웃었다. 아르옌은 그녀가 어째서 그리 웃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린 돈 주는 놈들 편이야. 이번에는 그 녀석들이 돈을 줬을 뿐이고. 카이로스가 돈을 줬으면 우린 카이로스 편이었겠지.”

칼라는 그리 말하며 만지작거리던 큼지막한 단도로 캐러밴의 바닥을 긁었다. 이미 그녀가 몇 번이고 긁어댔던 건지, 캐러밴의 바닥은 칼에 긁힌 상처가 한가득했다.

“그렇다고 당신들이 우리 사람들을 죽인 건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죽었을 거다. 어머니도. 아르옌은 울 수 없었다. 충격은 눈물샘마저 갈가리 찢어버린 것 같았다. 지금 거울을 본다면, 아마 그 허연 시체들과 같은 눈을 하고 있겠지.

“사과하진 않을 거야. 그럼 내가 여태 죽인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이상해지는 거니까. 애초에, 우리는 다른 나라에 고용되어 크롬의 사람들을 죽인 적도 있어.”

칼라는 그리 말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르옌은 그녀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사과를 바라는 게 아냐. 나는 왜 안 죽이고 내버려 둔 거야?”

질책하듯, 격해진 목소리로 묻는 아르옌에게 칼라는 쓰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꼬맹이. 노예 같은 거로 팔아넘길 생각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

혼란스러웠다. 더 말을 섞기도 싫었다. 아르옌은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로 눈을 감았다.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캐러밴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상은 가혹한 곳이야, 아르옌. 가혹하고 잔인하고, 사정을 봐주지 않아. 자비는 없어. 구원을 찾아 돌아다니는 이는 버림받고, 그를 부정하고 남을 잡아먹는 이들은 살아남지.”

칼라의 목소리가 나긋해졌다. 아르옌은 동화를 읽어주듯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엉망이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누가 뇌를 빼내서 공중에 둥둥 띄워놓은 것 같았다.

“그러니 살아야 해. 살아서 세상보다 가혹해져야 해. 세상이 너를 잡아먹지 못하도록. 죽음이라는 길로 너를 인도하지 않도록.”

칼라의 말은 기도문을 외는 것 같기도 했다. 아르옌은 의식이 멀어져가고 있음을 느꼈다. 피로가 쏟아졌다. 아르옌은 흔들리는 캐러밴의 박자에 맞춰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었다. 잠결에 누군가가 자신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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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옌은 팔려 가지 않았다. 노예가 되지도 않았다. 수리 용병대의 용병들은 아르옌을 입양한 아이처럼 키웠다. 아르옌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마을을 불태우고 마을 사람들을 죽인 건 그들이 아니었으니까.

수리 용병대는 적국에 고용된 국적 없는 떠돌이 용병대였다.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 곧 그들의 나라이고 고향이었으며, 집이었다. 용병대는 지형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다. 바다, 고산, 평야, 숲. 아르옌은 수리 용병대에서 용병들과 부대끼며 성장했다. 거친 용병들은 아버지는 되지 못했지만, 스승은 될 수 있었다.

아르옌은 그들에게서 검을 배웠다. 싸움을 배우고, 전술을 배우고 전략을 배우고 전쟁을 배웠다. 돈을 배우고, 술과 사람을 배웠다. 죽음은 그리 배우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아르옌에게 가르치려 들었다.

돈이 죽고, 브렛이 죽고, 맥은 떠나고, 히니는 검을 어느 날 내려놓았다.

아르옌은 자랐다. 어렸을 적 작은 편이었던 키는 어느덧 아버지보다 훌쩍 커져 버렸고, 찰리와도 비슷한 정도까지 자랐다. 아르옌의 성장은 빨랐다. 검을 쓰는 실력은 이미 용병대의 사람들이 가르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아르옌은 강하고, 죽이는 데 능숙했다. 새로운 단원이 생기고, 아르옌은 어린 나이에 고참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미 넌 나보다 강한 것 같군.”

찰리는 검을 늘어뜨리며 말했다. 아르옌은 무표정하게 검을 회수했다. 발밑에는 쓰러진 병사와 기사들의 시체가 널려있었다. 아군조차 그 실력에 경악한 듯 거리를 두며 아르옌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르옌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병사들은 아르옌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아르옌은 무감정하게 전장을 정리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미 아저씨보다 강해진 지는 오래된 거 같은데.”

“한 번 추켜세워주니까 기어오르는구나, 아르옌. 그래도 해보기 전까지는 모르지.”

아르옌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찰리는 그런 아르옌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게 부단장 자리를 조만간 넘겨도 괜찮겠어.”

“사람을 다루는 자리는 아직 멀었지. 난 그런 귀찮은 짓은 나서서 안 맡아. 아저씨가 은퇴하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어야지.”

아르옌은 피웅덩이와 시체를 바라보았다. 아르옌이 죽인 이들은 어렸을 적 보던 시체처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르옌은 무릎을 굽혀 죽은 기사의 눈을 감겨 주었다.

“수고 많았어, 아르옌.”

그런 아르옌에게로, 칼라가 스스럼없이 다가오며 팔을 쭉 벌려 아르옌을 덥석 안았다. 아르옌은 칼라의 품에서 얼굴을 붉힌 채 버둥거렸다.

“자, 잠깐.”

“뭐야, 부끄러워하는 거야? 새삼스럽게.”

칼라는 웃으며 아르옌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고, 아르옌은 칼라를 밀어내지도 못한 채로 팔만을 버둥거릴 뿐이었다.

“피, 피 묻어.”

“뭐래. 나도 이미 묻을 대로 다 묻었는데.”

칼라는 그리 말하고는 아르옌을 떼어냈다. 아르옌의 얼굴은 피만큼이나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런 아르옌을 보고는 칼라는 히죽 웃음을 지었다.

“웃긴다, 너. 역시 아직은 꼬맹이 같네.”

“시끄러워. 진짜.”

아르옌은 고개를 휙휙 저으며 일어났다. 용병대의 다른 용병들은 아버지는커녕 서툰 삼촌조차 되지 못하는 존재들이었지만, 칼라는 달랐다. 칼라는 아르옌에게 많은 것이 되고자 했다. 서투른 어머니, 혹은 누나, 친구 혹은 연인. 용병들이 가르쳐주지 못한 모든 걸 칼라는 아르옌에게 가르쳐주었다. 삶. 아르옌이 배운 건 어쩌면 삶이었다.

“이번에 죽은 사람은?”

“없어. 아르옌이 혼자 강한 놈들은 대부분 쓸어버리잖아.”

찰리는 코웃음을 치며 칼라의 물음에 대답했다. 칼라는 눈을 깜박이며 아르옌을 바라보았다. 아르옌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다들 약해빠졌으니까. 내가 하는 거지.”

아르옌의 앞으로 칼라가 다가왔다. 그녀는 이제 어느덧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아르옌의 머리를 향해 딱밤을 달렸다. 아르옌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문지르자 칼라는 사뭇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르옌을 올려다보았다.

“무리하지 마. 객기 부리지도 말고. 전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해.”

“…알겠어.”

칼에 베여도 아프다는 느낌은 잘 들지 않았다. 하지만 칼라의 딱밤만큼은 언제나처럼 아팠다. 칼라는 그런 아르옌에게 손짓을 휙휙했다. 아르옌이 고개를 슬쩍 숙여 칼라를 보자, 칼라는 뒤꿈치를 들며 아르옌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이러기에는 네 키가 너무 커져 버렸네.”

칼라는 그러며 웃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르옌과 처음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찰리, 맥, 히니와 같은 용병들의 얼굴에는 상처가 하나씩 늘고 주름도 생겼는데 칼라는 주름은커녕 얼굴에 상처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자, 그럼 슬슬 장소를 옮겨볼까.”

칼라는 그리 말하며 팔을 훌훌 털었다. 오늘의 전투는 끝났다. 칼라는 지휘관에게 손을 대충 흔들어 보였고, 지휘관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수고했네. 내일 있을 전투도 잘 부탁하지.”

“얼마든지.”

칼라는 가볍게 답하고서는 아르옌의 등을 밀며 지정된 숙소로 걸어갔다.

그날 밤, 아르옌은 숙소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인기척에 눈썹을 구부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은 새벽 한 시 삼십 분. 아르옌은 조금 짜증이 난 상태로 문가로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누구야, 이 시간에….”

“안녕?”

그리고, 문가에 선 칼라를 보고는 아르옌은 완전히 굳어졌다. 아르옌의 굳어버린 얼굴을 본 칼라가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는 방 안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들어가도 돼?”

아르옌은 몸을 살짝 틀어 비켜주었고, 칼라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아르옌의 방으로 들어왔다. 흔들리는 그녀의 머리는 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살짝 젖어있었다. 아르옌은 문가에서 몸을 돌려 칼라를 바라보았다. 칼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르옌의 침상을 보더니 푹 주저앉았다. 아르옌이 인상을 쓰자, 칼라는 다시 웃으며 손짓했다.

“옆에 앉아.”

아르옌은 문을 닫고는 칼라의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칼라는 아르옌이 옆에 앉자마자 몸을 돌려 아르옌을 바라보았다. 거의 속옷이나 다름없는 상의를 입고 있는 그 모습에, 아르옌이 얼굴을 붉혔다.

“내 방에는 왜 온 거야?”

어색한 분위기를 피하려 억지로 목소리를 낸 아르옌을 보며 칼라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상한 꿈을 꿨어.”

“이상한 꿈?”

칼라는 다시 히, 하고 웃었다. 아르옌은 그녀의 미소가 어쩐지 공허하다고 느꼈다.

“응. 그런데 말 안 할래. 말하면 또 기분이 안 좋아질 거 같거든.”

“안 좋은 꿈 한 번 꿨다고 남의 침실까지 쳐들어오다니.”

아르옌은 그리 말하며 궁시렁거렸다. 칼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너 어렸을 적에 내가 계속 데리고 잤던 거 알아? 하도 악몽을 꾸니까 말이야. 내가 데리고 잘 수밖에 없었잖아.”

아르옌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

“뭐야, 그 이야기는 갑자기 왜 꺼내.”

“그때는 좀 날카롭지만 귀여운 애였는데 말이지.”

칼라의 태도는 평소 같으면서도 평소 같지 않았다. 아르옌은 그 점을 굳이 짚어내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때 더 캐물었어야 했는데.

“안아줘.”

칼라는 그러면서 아르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르옌은 물러서지 못하고 다가오는 칼라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녀를 자신이 직접 안는 건 처음이었다. 품속의 칼라는, 아르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아르옌은 끼쳐오는 그녀의 체취를 맡았다. 냄새라기보다는 향기에 가까웠다.

“눕자.”

칼라의 말에 따라, 아르옌은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풀썩 넘어진 침내 위로 달빛이 드리웠다. 칼라의 눈은 회색이었다. 창백한 달빛과 색이 비슷했다. 칼라의 온기가 가까웠다. 아르옌은 그렇게 누워 칼라와 잠시 마주 보았다.

“응. 좋네.”

칼라는 달처럼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아르옌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몸을 조금씩 더 가까이 붙여 아르옌의 가슴팍에 머리를 파묻었다. 아르옌은 그대로 칼라의 머리를 감싸며 칼라를 강하게 안아주었다. 일말의 불안감이 그녀에게서 엿보였기에. 아르옌은 가슴팍에 와닿는 칼라의 한숨을 느낄 수 있었다.

내일이라는 불안감이 서서히 엄습해왔지만 괜찮았다. 아르옌은 시간을 막아서듯 창을 등지고 칼라를 안았다. 달빛에는 온기가 없었다. 느껴지는 건 오직 칼라의 살결과 자신의 살결이 맞닿으며 내는 따스함뿐이었다.

그 속에서, 아르옌은 칼라의 눈물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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