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6 - 76. 바라보기 (1)
일단 물증이 확보되고, 주범까지 붙잡자 남은 일의 처리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왕궁에서는 재빨리 기사단을 파견해 악신 숭배자들을 구속했고, 그와 연관된 범죄자들, 후원자들을 줄줄이 엮어 왕국 가장 깊은 감옥으로 보내었다. 놈들의 우두머리 격인 숭배자는 이단심문관들의 손에 붙들려 성국으로 연행되었다.
“뭐, 나중에 성국을 들러서 쥐어짤 수 있는 대로 정보를 쥐어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드레 주교는 태연한 얼굴로 무슨 걸레의 물기를 쥐어짜야 한다는 듯 말했다. 주교가 사람에게서 정보를 쥐어짜는 방법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용사께서는 악신 숭배자들에 대한 걱정일랑 마시고, 본업에 충실하시면 됩니다.”
안드레 주교는 부담스러운 미소와 함께 일러주었다. 언제나처럼 인자한 종교인과 같은 미소가 아닌, 마치 새로운 무기를 얻은 무인과 같은 표정이라 할까.
“악신 숭배자들을 추적해서 말살하는 일은 우리에게 맡겨주시지요. 저들은 방심하고 있을 겁니다. 아직 청교회의 전력을 맛보지 못했을 테니 말입니다.”
안드레 주교는 그리 말하며 비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주교에게 갖고 있던 인상이 크게 변한 건 맞지만, 살벌한 인간인 것 같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바크틴스의 지방관도 다시 만났다.
“일이 잘 해결되고 있어 다행입니다.”
지방관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리 말했다. 세력을 확장하는 종말 숭배자들을 보고 있는 건 천천히 숨통을 조이는 것 같은 기분이었을 거다.
“용사께서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지방관은 사심 없이 인사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폐허가 된 이 지방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던 사람이다. 책임감 없고 무능한 사람일 리가 없다.
“주민들이 점점 이상해지는 걸 바라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지요. 언젠가부터는 제가 방문하는 것조차 점점 아니꼽게 바라보는 이들도 생기더군요.”
지방관은 그러며 고개를 내저었다.
“성국에서 도와줘서 다행입니다. 성녀님께서는 지금 바쁘실 테니, 부디 저 대신 감사의 인사를 전달해주시지요. 마을을 도와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는 지방관과 악수하고 다시 교회로 향했다. 공기가 달랐다. 그저께 밤부터는 다시 하늘에 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을 곳곳에서 다시 불을 지폈고, 밤은 잃어버린 온기를 되찾았다.
아이시스는 고작 삼 일 사이에 마을 주민들을 모두 치료했다. 재앙의 흔적을 이식받은 사람도, 아이시스는 어렵지 않게 치유 마법을 사용해 낫게 할 수 있었다. 신체 부위가 잘렸던 사람도, 혹은 상처가 곪아 죽음의 문턱에 있던 사람도. 아이시스의 마력은 치료해냈다.
“…감사합니다.”
아이시스에게 치유 받은 사람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치유된 몸을 내려다보았다. 기뻐 우는 사람도 있었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얼굴을 꼬집는 사람도 있었다.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듯 행동하는 사람 중에서도 어렵사리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생겼다.
“어쩔 수 없지요. 몸도 멀쩡해졌으니 저는 복구 작업이나 도우며 살아야겠습니다.”
“바다가 저기 한 군데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물론, 모든 이들이 수용하는 건 아니었다. 치료받지 않겠다며 불복하는 이들도 있었고, 아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있었다. 그들 앞에서 아이시스는 눈물을 흘렸다. 그런 아이시스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꾸는 사람들이 또 생겼다.
그렇게, 상처는 차츰 사라지기 시작한다. 상처는 아물어 흉터가 되기 시작하지만, 더 피를 흘리지는 않았다. 곪고 썩어들어가는 것보다는, 흉터로 남는 것이 낫다.
“그렇구나.”
그리고 나는, 정리 작업이 한창인 와중에 교회의 방과 뒤뜰만을 오갔다. 하릴없이 성검과 검술에 관한 대화를 나누거나, 머리를 텅 비우고 검을 휘두르거나.
“지금까지는 아주 순조로워요. 다행히도.”
지금은 아이시스와 침실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름이 끝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금방 날씨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테이블 앞에 놓인 컵에서 김이 피어올랐다.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아이시스를 바라보았다. 조금 지친 기색이 보였지만, 그 표정에서 나는 성장의 기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일이 끝나면 어떻게 할 거야?”
아이시스는 찻잔을 들어 홀짝거렸다.
“계속 피해자들을 수소문해서 찾아다니지 않을까 싶어요. 어쩌면 종말 숭배가 있는 곳의 흔적을 지우려 다닐 수도 있고요. 주교와 함께 의논해봐야 알 거 같네요.”
아이시스는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도, 꾸준히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할게요. 어쩌면 일로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올 수도 있을 테니까."
“…그래.”
다행이다. 나는 그리 생각하며 마찬가지로 차를 들어 조금씩 차를 마셨다.
“아르옌은 안드레 주교와 함께한다고 했던가.”
주민들이 차도를 보이고, 부락이 얼추 정리될 기색을 보이자, 아르옌은 몇몇 이단심문관들과 함께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네. 주교께서 솜씨가 마음에 든다고, 악신 숭배자들을 추적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도, 그 녀석 나름의 생각에 빠져 있을 테니까.
“일로이는 이제 어떡할 생각이죠?”
아이시스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성검의 검자루를 매만지며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안개. 무형(無形)의 공포. 크라켄이나 거인과 같은 파괴 행각은 없겠지만, 그 어떤 재앙보다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재앙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니까.
“돌아가서 대비해야지.”
“대비?”
나는 어깨를 모호하게 으쓱해 보였다. 이번 재앙은 그 어느때보다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다.
원작에서, 일로이를 포함한 용사 파티를 몰살한 재앙이 바로 다섯 번째 재앙, 안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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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로이가 어딘가 이상했다. 마리안느는 그리 생각했다.
최근 들어 멍하게 있는 일이 잦았다. 다프네나 게오르그가 부르면 듣지 못하고 어딘가 바라보다가 다가가서 툭툭 쳐야만 못 들었다는 듯이 눈썹을 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말 몇 마디를 나누고 나면 다시 돌아서서 앉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언제나 일로이를 바라보는 다프네가 그리 물으면, 일로이는 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 일로이와 보았을 때와 지금의 일로이는 표정이 제법 달랐다. 그때는 어딘가 부족하고 어리숙한 모습일 때도 있었는데, 저기, 지금 앉아있는 일로이의 표정은 깊었다. 깊게, 깊게 천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돌멩이처럼 깊게 가라앉고 있다.
“그냥. 내 검은 언제 제작될지 생각하고 있었어.”
게오르그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치켜뜨고는 일로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아직도 제작이 안 끝난 거냐?”
“공방에 가봐야 알겠지만, 특별히 연락이 안 오는 걸 보면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해. 나도 빨리 완성된 거 보고 싶다고.”
일로이는 짐짓 불만이 있는 척하며 풀썩 책상 위로 얼굴을 올려놓았다. 너절한 문서 따위가 일로이의 움직임에 팔락거렸다. 일로이의 눈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도장을 따라 굴러갔다.
“너도 이제 슬슬 좋은 장비에 욕심을 낼 때가 오겠군. 성검이 워낙 좋은 검이라 불만스럽다 느끼지 않고 있었겠지만, 사실 장비라는 건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면 좋을수록 좋은 것이니.”
게오르그는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검이 아니더라도, 다른 장비를 구경하러 같이 가야겠어. 나도 요새 갑옷을 좀 손보든가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거든.”
“…네가 그리 눈을 희번덕거리며 말하는 건 처음 본다, 야.”
일로이는 징그럽다는 듯 눈을 찡그리면서도 입은 웃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아직 일로이가 어째서 조금은 싫은 듯한 눈치를 보이면서도 입은 웃음을 감추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왕도로 돌아오고 나서는 휴가 떠나도 좋다고 말했는데 너네는 왜 아직 내 사무실에서 이렇게 죽치고 앉아있는 거야? 다프네, 너 키운다는 강아지는 어쩌고.”
“하숙집 아주머니가 예뻐해 주고 계세요. 오늘 종일 빌려 가겠다고 선언하셨는데요.”
일로이는 큭큭 웃음을 내뱉었고, 다프네는 웃는 일로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휴가 중에 강아지 보러 오세요. 동물 좋아한다면서요.”
“그러면 시간 내야지.”
그 대화를 바라보는 마리안느는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이내 다시 평형을 되찾고는 평소대로의 그녀로 돌아왔다. 일로이는 게오르그에게로 눈을 돌렸다.
“네 기사단은 어쩌고?”
“자주 찾아오지 말라고 혼났다. 꼰대 하나 늘어나면 젊은 기사들이 싫어한다나.”
“그래. 엉뚱한 기사들 괴롭힐 바에야 내 사무실에서 죽치고 앉아있어라.”
게오르그와 다프네는 일로이의 사무실에서 함께 더 미적거리고 있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로이는 책상에 얼굴을 묻은 상태로 손을 휙휙 흔들었고, 두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사무실을 나섰다.
“파티장의 위엄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일로이는 그리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결재해야 할 문서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일로이는 파티의 예산안을 꼼꼼히 훑어보고는 펜을 들어 무언가 끄적였다.
“마리안느, 너는 휴가 때 계획 없어?”
일로이가 묻자, 마리안느는 눈을 깜박거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아마…, 성국에는 가지 않을 거 같습니다.”
일로이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래? 안드레 주교가 뭐라고 하지 않아?”
“아뇨…. 괜찮습니다.”
마리안느는 바크틴스를 떠나기 전, 주교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마리안느.’
‘예, 주교님.’
안드레 주교는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주교의 미간이 좁아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주교는 팔짱을 끼고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짧게 모두 숨을 뱉어냈다.
‘용사 파티의 활동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이단심문관으로 복귀하지 마라.’
마리안느는 그녀답지 않게 놀라 눈을 홉떴다. 주교는 날카롭게 눈을 뜨고 그런 마리안느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이제 이단심문관으로 있을 수 없다. 너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을 터.’
‘그럼 저는 이제….’
‘모든 임무를 완수하기 전까지 성창은 회수하지 않으마. 유용하게 쓰고 있을 테니. 임무가 끝나고 나면 넌 사제, 혹은 성기사단의 기사로 남겠지.’
마리안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단심문관으로 남아있을 수 없다니. 혼란과 알 수 없는 느낌 속에서 마리안느는 가슴팍 위로 손을 올린 채 안드레 주교를 바라보았다.
‘용사께서는 참 다양한 일을 해내는군. 너도 머지않아 알게 될 거다.’
마리안느에게 일러주는 안드레 주교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마리안느를 남겨두고 안드레 주교는 자리를 떠났다. 마리안느는 교회의 의자에 앉아 신랑 끝 출구로 사라지는 주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주 미세한, 마음이 불편한 동시에 편해지는 느낌. 마리안느는 어째서 자신이 안도했는지, 그 이유를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마리안느는 사냥감을 놓쳐버린 은여우처럼 의자에 앉아 일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끄적끄적.
어느새 예산안을 다 점검한 일로이는 새 종이를 하나 꺼내 펼쳐놓고서는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흠, 하고 숨을 내쉬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고개를 내젓기도 하면서.
“…아, 마리안느.”
일로이는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마리안느를 보았다. 마리안느는 일로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주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것 말고는 해야 할 일도 없다.
“무슨 일이야?”
마리안느는 고개를 저어 아무 일도 아니라는 의사를 표했다. 일로이는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슬쩍 찌푸리더니 이내 다시 종이로 고개를 내리고는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일로이를 빤히 바라보며 마리안느는 결심했다.
자신은 차치하고, 우선은 일로이가 이상한 원인을 찾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일로이를 우선 하루종일 관찰해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