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7 - 77. 바라보기 (2)
오전 6시 30분. 일로이 기상.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보다 느렸다. 마리안느는 5시에 일어나 씻고서 침대에 앉아 일로이의 기척을 기다렸지만 일로이는 30분이나 지나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마리안느는 일로이가 부스럭거리며 방안을 돌아다니는 소리를 고개와 눈을 돌리며 쫓았다.
“…좀 늦었네.”
일로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로이가 지내는 방은 마리안느의 바로 윗방이었다. 마리안느는 일로이의 걸음 하나, 움직임 하나를 천천히 감지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오래 잠을 자지는 못했지만, 체내의 마력을 가동하며 피로를 씻어냈다.
“씻어야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문이 있는 곳으로 이어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 가볍게 닫히는 소리, 복도로 무어라 궁시렁거리며 나가는 소리. 마리안느는 자신도 슬슬 일어나야겠다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가 뜨는 시간이 확연히 늦어졌다. 한 달 전만 해도 지금쯤 해가 뜰 기미가 보였을 거다.
“….”
마리안느는 멍하게 창밖을 응시했다. 왕도의 창밖은 마리안느가 아는 창밖과는 다르다. 화려하지만 깨끗하지 않다. 시끄럽지만 소란스럽지는 않다. 성국의 정갈한 풍경도 아니고 바크틴스, 에버노드의 풍경과도 달랐다. 마리안느에게 풍경의 호오는 옅었다. 그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뿐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물론 풍경을 눈에 담는 일도 없었을 거다.
“추워지는구나.”
중얼거리는 일로이의 소리를 끝으로 일로이는 욕실로 사라졌다. 마리안느는 일어나 부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실내화가 나무 바닥과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일로이가 씻는 동안 아침 식사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치이익.
불이 올라왔다. 펜이 달궈지는 동안 마리안느는 식용유를 찾았다. 본부 부엌은 이제 거의 마리안느의 차지가 되다시피 했다. 찬장, 식기, 조리 도구 등. 마리안느는 얼추 손을 짚이는 대로 재료를 꺼내 쥔 후 익숙한 손길로 요리를 시작했다.
부엌을 쓰는 동안은 마음이 편안했다. 펜이 달궈지는 소음, 달걀을 깨트리는 소리, 질서정연하게 가다듬어진 자신의 움직임까지. 마리안느는 이곳의 부엌을 좋아했다. 5층짜리 건물 주제에 부엌 크기는 일반 가정집만 하다는 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마리안느는 식사 준비를 끝낸 후 테이블에 접시를 가져다 두었다.
“….”
마리안느는 그리고는 평소에 일로이가 앉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일로이는 틈만 나면 자기가 요리하겠다고 나서서 곤란했다. 요령이 없다고 해야 할까. 의욕은 넘치는데 저 사람, 재능이 없었다. 검은 그렇게 잘 쓰면서 어째서 요리는 못하는 건지.
“오,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발소리. 어깨 위로 수건을 걸친 일로이가 계단을 내려오며 나타났다.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을 따르고 의자에 앉았다. 일로이는 눈 아래를 문지르며 마리안느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딘가 피곤한 듯한 표정인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걸까.
“평소대로 준비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일로이는 그리 말하고는 수저를 집어 들었다. 마리안느가 만든 요리를 먹을 때는 제법 행복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안느는 제 아침을 먹다가도 고개를 이따금 들어 일로이의 반응을 확인하곤 했다. 마리안느는 그렇게 표정을 확인하면 속으로 작은 만족감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고 아침에 집중했다.
“오늘은 예정 있어?”
일로이의 물음에 마리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일로이는 그래? 라고 중얼거리며 빵을 집어 먹었다. 바삭거리며 구운 빵이 일로이의 입안에서 부서졌다.
“오늘 대장장이 길드 쪽으로 가서 내 검을 찾아올 생각인데, 같이 갈래?”
마리안느는 눈을 깜박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로이가 이렇게 먼저 제안해올 줄은.
“그럼 오늘 할 일만 빠르게 끝마치고 출발할 예정이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예. 알겠습니다.”
일로이는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마리안느는 괜히 일로이의 시선을 주춤주춤 피하다가 이내 먼저 일어나서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로이는 마리안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자신의 식기를 정리해 개수대에 빠트렸다. 마리안느는 먼저 돌아가라며 자신을 떠미는 일로이를 흘긋흘긋 바라보다가 돌아갔다.
오전 8시. 일로이 업무 시작.
용사 파티의 행정 업무는 당연히 용사인 일로이가 담당했다. 행정 업무라고 해봤자 간단하게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예산 집행 정도밖에는 없었지만. 오늘은 무슨 할 일이 있는 건지 일로이는 골똘하게 종이 한 장을 바라보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귀족들은 참 귀찮단 말이야. 애초에 여왕 폐하께서 사교회 같은 곳에 용사를 초대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딱 못 박아 놓으셨을 건데.”
일로이는 편지 봉투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며 불만스럽게 팔락거렸다. 느슨해진 봉투 사이로 수표가 한 장 팔락거리며 떨어졌다.
“이런 거나 넣어 보내고. 이럴 거면 그냥 돈만 보내라고. 후원금 명목도 아니라는 게 웃겨. 질리지도 않는 걸까.”
일로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수표를 서류 더미 위로 올려놓았다. 마리안느는 그런 일로이의 고지식한 면이 참 그답다고 생각했다. 답장을 써서 여지를 주지도 않고 그냥 수표만 넣어 돌려보낸다. 그럼에도 용사라는 메리트를 포기하지 못하는 귀족들이 끊임없이 일로이에게 편지를 보내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냐?”
마리안느는 일로이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로이는 마리안느를 가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편지를 휙휙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편지를 다 분류한 일로이는 펜을 집어 들고 무언가를 종이에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있는 마리안느가 신경이 쓰인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마리안느는 일로이의 눈에 굴하지 않고 계속 그를 보았다.
“…오늘은 무슨 날이냐.”
일로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1시 30분.
마리안느가 어딘가 이상했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저녁부터 나를 흘긋흘긋 바라보며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것 같더니 오늘 아침부터는 아예 나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솔직히 그러지 말라고 하기도 그렇고, 내버려두고 있었는데 뭘 하려는 걸까.
“[생각하는 게 있겠지.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그렇고, 혹시나 너 씻는데 훔쳐보지는 않는지 조심하거라.]”
성검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누구 범죄자 만들 일 있냐. 나는 눈살을 확 찌푸렸다.
“[얌전한 녀석일수록 무서운 법이다, 일로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턱이 없으니까 말이다.]”
마리안느 정도면 양반이라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생각을 알 수 없는 쪽은 안드레 주교같이 늘 싱글벙글 웃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
대장장이 길드에 도착하고, 오랜만에 오는 골목을 돌아 가게에 도착했다. 대장장이, 로빈은 반갑게 나와 마리안느를 맞이했다. 로빈은 씨익 웃으며 장갑을 벗고는 우리를 안으로 들였다.
“오, 자기. 오랜만에 보네. 내가 보낸 편지 봤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나를 쳐다보는 마리안느의 시선이 조금 더 날카로워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네. 검이 거의 완성됐으니 찾으러 오라고.”
로빈은 쾌활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이 감싸고 있는 검 한 자루를 가리켰다. 검신이 천으로 감싸져 있지만 끝으로 드러난 자루는 이미 심상치 않은 작품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검을 응시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검이 완성되었구나.]”
성검마저 이런 감탄사를 내뱉을 정도였으니까. 어떤 검이 완성되었는지 슬슬 기대되기 시작했다. 내가 검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챘던 것일까. 로빈은 천으로 싸인 검을 풀어내고 내게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너무 오랜만에 만들어보는 거라 그런지, 좀 욕심을 부렸나 봐. 시간이 오래 걸렸네.”
“다 완성된 건가요?”
로빈은 고개를 저으며 용광로 쪽으로 검을 가지고 갔다.
“담금질 몇 번 하고, 마지막으로 부식액에 담갔다가 꺼내야 해. 날도 한 번 갈아야 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 잠시 앉아서 기다려줄 수 있겠어?”
로빈은 검을 용광로에 담갔다가 꺼내고, 다시 검을 식혔다.
“그래도, 다시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검을 만들지는 않을 거 같아. 이 검이 전투 중에 못쓰게 되어서 용사님이 다시 검이 필요하다고 할 때까지 말이야.”
로빈은 검을 바라보며 쓰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붉게 달아오른 검신. 로빈은 긴 원형 통속으로 내 검을 담갔다. 아마 부식액이라고 부르는 용액인 듯했다. 로빈은 검을 꺼내 천에 닦았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용사님 전용 대장장이나 다름없네.”
대장장이의 말에, 마리안느의 시선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로빈, 마리안느를 조금씩 보고 있는 게 아무래도 제대로 놀릴 건수를 잡은 것 같았다.
“영광으로 생각하시죠. 세상에 다시 없을 간판이니 말입니다.”
“다른 사람 장비를 안 만들어주는데 어떻게 그런 간판을 내걸어?”
로빈은 태연하게 말하며 연마기에 검을 가져다 놓았다. 부식액에 들어갔다 나온 검의 검날은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로빈은 가늘게 뜬 눈으로 검날을 바라보다가 돌아가는 연마기에집어 넣었다. 불꽃이 튀며 칼날이 갈리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튼튼한 합금이라, 칼날이 갈리는 데도 힘을 좀 들여야 해. 솔직히 말해서, 이게 망가져서 용사님이 나한테 검을 만들어달라 부탁하는 상황이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란 말이야.”
로빈이 투덜거리며 검을 꺼내 다시 상태를 확인했다.
“다시 이런 검을 만들 수 있을지나 모르겠네. 검 이름이나 몇 개 생각해두고 있어.”
검 이름이라. 나는 눈을 깜박이며 불꽃을 튀기는 검을 바라보았다. 성검은 그냥 성검이었으니까. 검에는 어떤 이름이 붙는지 알 턱이 있나.
“[사람 따라 다르지. 정말 검에 사람과 같은 이름을 붙이고 애인처럼 대하던 기사들도 존재했으니 말이다.]”
…솔직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겠다. 나는 입가를 비틀었다. 기사란 존재는 대체 어떤 걸까.
“자, 끝났어.”
로빈은 담백하게 말하며 천 위에 검을 얹고서 테이블로 돌아왔다. 나를 계속 노려보고 있던 마리안느의 시선도 검의 광채에 이끌려 그쪽을 향해 쏠렸다. 검날은 거의 반투명했다. 미스릴이라는 금속이 섞이면 검날이 이렇게 변한다는 듯하다.
“이게, 용사님의 두 번째 검이야.”
파도와 같은 무늬가 검신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검지로 검날을 한 번 쓸어보았다. 섬짓한 한기가 손가락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깊숙이 꿰뚫어 보려는 듯했다. 검날의 길이나 폭은 성검과 비슷했다. 일부러 성검과 한 쌍으로 제작되었다는 것 같은 느낌. 검자루에 감긴 가죽은 성검의 그것과는 다른 갈색이었다.
“[이거, 벌써 검이 주인을 가리는구나. 북부대공이 사용하던 그 검조차도 네게는 몸을 허락했거늘. 너를 위해 제작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걸까.]”
성검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왼손으로 검을 쥐었다. 한기가 순간 손을 침투해 올라오다가, 갑자기 굳어버린 듯 팔에서 머물렀다.
“[이 버릇 없는 년은 내가 버릇을 고쳐놓으마, 일로이.]”
성검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팔을 타고 올라오던 한기가 사라졌다. 어쩐지 왼손에 들린 검이 움찔, 하고 움직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기분 탓이겠지.
“이름은 어떻게 할까.”
나는 마리안느에게 물었다. 마리안느는 자신이 그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다가, 내 왼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제가 지어도 괜찮겠습니까.”
“좋은 이름이 떠오르지가 않네.”
마리안느는 가만히 턱을 문지르다가 검날의 파도 문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너울’은 어떻습니까.”
“너울이라. 귀여운 이름인데.”
나는 그리 말하며 검자루를 매만졌다. 마리안느가 순간 이름을 잘못 지었나, 라는 표정을 짓길래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너울이 좋겠어.”
“좋은 이름인데. 원래 검의 이름은 간단할수록 좋아.”
로빈이 슬쩍 참견했다. 나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너울. 솔직히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다.
“그나저나 검의 이름을 지어주다니.”
로빈이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웃음 지었다. 마리안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로빈을 되돌아보았고, 나는 그 둘의 미묘한 구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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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일로이 귀가.
일로이는 새로 얻은 검과 익숙해지고 싶다며 마리안느에게 대련을 신청했다. 마리안느는 이 뜻밖의 제안을 바로 수락했다. 그간 자신이 일로이에게 무(武)의 요령을 몇 번 알려준 적은 있었지만, 직접 검과 창을 맞붙어가며 싸운 적은 없었으니까. 마리안느는 일로이가 없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럼, 먼저 지하에 내려가있을게.”
본부의 지하에는 수련장이 따로 구비되어 있었다. 일로이는 어딘가 들뜬 듯한 표정으로 새로 얻은 검을 든 채 종종걸음으로 지하로 내려갔다. 마리안느는 성창에 기대어 앉아 가만히 책상을 바라보았다. 일로이가 계속 끄적이면서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건 뭐였을까. 함부로 책상을 뒤질 수는 없을 텐데.
그때, 마리안느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이 들어왔다. 마리안느는 그 종이를 집어들어 보고 싶다는 호기심을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일로이가 멍해져 있던 이유도 아마 저 종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냥, 돌려놓는 것일 뿐.
마리안느는 그렇게 자신의 호기심을 정당화하며 조심스럽게 종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종이를 집어 들어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