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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78화 (79/158)

Chapter 78 - 78. 바라보기 (3)

“[너울은 이제 얌전할 거다, 일로이. 반항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오로지 너를 위해 만들어진, 네 검이니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해라.]”

내가 너울을 뽑아 들자, 성검이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과격한 방법이라도 사용해서 제압한 건가, 너울은 내가 뽑아 들 때도 고요했다.

“…나중에 너처럼 말하기 시작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

“[검에 역사가 더 쌓인다면 모르지. 잠재력은 충분하지만 아직은 그럴 단계는 아닌 것 같구나. 왜, 말하는 검은 싫으냐?]”

“…아니, 그렇다는 건 아니고.”

성검은 흥미롭다는 듯 그리 말했다. 나는 연습 삼아 너울을 몇 번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 손에 달라붙는 감촉이나 무게감. 성검보다는 조금 가벼웠다. 검날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는지. 날의 날카로움은 어떤지. 나는 천천히 너울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찌를 때의 가벼움. 휘두를 때의 저항감. 나는 숨을 내쉬며 너울을 검집에 넣었다.

“썩 괜찮은데.”

“[좋은 검이다. 나보다는 못하겠지만.]”

나는 피식 웃고는 수련장의 바닥에 앉았다. 마리안느가 내려오는 게 조금 늦어지고 있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수련장으로 내려오는 계단은 아직 고요하기만 했다.

“[늦는군. 그 아이답지는 않구나.]”

성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집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겠어. 준비하고 있겠지,”

아직 사무실에 있으려나. ‘읽어서는 안 될’ 것들은 내가 하나도 빠짐없이 모아 은밀한 장소에 보관해두었다. 걱정이 되지는 않는데, 혼자 무슨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다시 기초 검식이라도 혼자 펼쳐내 볼까 하던 찰나,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마리안느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의 수녀 복장은 아닌, 편안한 바지에 넉넉한 상의 차림이었다. 평소에 풀고 다니던 긴 머리는 한데 질끈 묶어 말 꼬랑지처럼 찰랑거리고 있었다. 이러니 영락없는 모험가 모습이었는데, 얼굴에서 나오는 묘한 귀티가 그 느낌을 상쇄했다.

“대련을 준비하고 계셨는지요.”

“응. 옷 갈아입느라 늦은 거야?”

내 말에 마리안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동자가 아주 살짝 흔들리는 것을 보아 뭔가 있긴 한데, 무엇인지 캐묻기는 힘들 것 같았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휙 휘둘러 내게 창끝을 향했다.

“저는 바로 시작해도 좋습니다.”

“몸 풀 시간은?”

“괜찮습니다.”

서두르는 듯한 기색. 나는 눈살을 슬쩍 찌푸리며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마리안느는 날카로운 눈으로 창을 휙휙 휘두르며 연무장의 중앙으로 걸어왔다. 나는 너울을 뽑아 들고 마리안느를 마주했다. 다른 생각은 버리고, 지금은 우선 그녀를 상대하는 데만 집중해야 한다.

“에버노드로 가기 전보다 얼마나 기량이 상승했는지 확인해보죠.”

“살살해, 살살.”

나는 너울을 뽑았다. 마리안느의 시선이 너울의 검날에 머무르다가 내 눈으로 돌아왔다. 마리안느는 머뭇거리며 내게 창을 내밀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용사님, 혹시.”

마리안느는 우물쭈물, 입을 어물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창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마리안느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련이 끝나고 묻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마리안느는 곧장 치고 들어왔다. 어디까지나 대련. 하지만 마리안느의 창끝은 아무리 봐도 내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너울의 검면을 앞으로 내밀고는 발을 옆으로 틀었다. 창끝이 검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습은 좀 그렇지 않아?”

“대비가 잘 되어있군요, 용사님.”

마리안느는 태연하게 대꾸하며 창을 바꿔 쥐었다. 창이 벌린 마리안느와 나 사이의 거리는 대략 두 걸음 정도. 칼을 아무리 뻗어봐도 위협적인 공격을 가하기는 불가능하다. 나는 눈으로 그 간격을 재며 들어오는 마리안느의 공격을 막아냈다.

쾅-! 쾅-!

마리안느가 창을 다루는 솜씨는 가히 괴물 같다고 말할 만했다. 자기 키보다도 훨씬 큰 창이 그녀의 의지에 따라 휘둘러지며 뱀의 머리처럼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자리에 서서 가만히 받아내는 것만으로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게 했다.

“막기만 해서는 언젠가 무너질 겁니다.”

마리안느는 그리 조언했다. 나는 미소와 함께 마리안느의 공격을 다시 받아냈다. 물론, 나도 계속 중거리에서 창을 상대해줄 생각은 없었다. 시험하는 건 너울이 얼마나 잘 견뎌줄 수 있는가. 물론 로빈이 만들어준 검은 내 기대에 충실하게 부응했다. 무려 성창과 맞부딪치는데도 견고함에서 밀리지 않고 맞서주고 있으니까.

“그래도 잘 버티고 있지?”

마리안느는 그건 부정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 적극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너울에게 적응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너울을 사용한 건 내 왼손. 왼손 하나만으로 마리안느를 이렇게까지 상대할 수 있었다는 건 큰 수확이다.

“최근 하나 깨달은 게 있어.”

마리안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힘을 주며 창대를 밀어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잘 싸운다는 건, 결국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는 것.”

“…옳은 말입니다.”

나는 갑작스럽게 너울에 주고 있던 힘을 빼었다. 그 반동에 마리안느의 균형이 앞으로 쏠리며 성창의 창대를 내주었다. 나는 남은 오른손으로 창대를 잡아채며 마리안느를 가까이 확 잡아당겼다. 마리안느는 잠깐 방심하고 있었는지,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내게 거리를 허용했다.

“잡았다.”

비틀비틀. 마리안느는 발을 동동 짚으며 그대로 너울의 간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너울을 휘두르는 척하다가 바닥으로 검끝을 떨구었다. 내게 창간을 붙들린 채 버둥거리는 마리안느. 나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마리안느를 내려다보았고, 마리안느는 버둥거리기를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황급하게 마리안느는 성창을 쥔 왼손을 놓고는 나를 살짝 밀어냈다. 뭐, 그 미약한 힘으로 내가 뒤로 밀려나는 일은 없었지만.

“져, 졌습니다.”

마리안느는 슬쩍 고개를 돌린 채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때야 성창의 창간을 놓아주었다. 마리안느는 고양이처럼 파바박 뒷걸음질을 치고는 나를 보았다.

“굉장히 침착해지셨군요. 가진 걸 활용하는 솜씨도 좋아지셨고.”

“너는 뭔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거 같던데.”

날카로운 창 솜씨는 변함이 없었지만, 마리안느는 대련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물어볼 게 있다는 거 때문인거야?”

“…그게.”

마리안느는 쭈뼛거리며 성창의 창대에 몸을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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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삼 등분으로 접힌 채 팔락거리고 있던 종이. 주로 귀족들이 사용하는, 빳빳하고 질이 좋은 종이였다. 아마 왕실에서 보낸 종이인 것 같기도 했다. 공식 서신을 마음대로 읽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리안느는 자신의 호기심에 처음으로 굴복한 채로 편지를 펴 보았다.

용사께.

수확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연말이 다가올수록 큰 행사는 많아지고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춰야 할 때도 많아져 다들 바쁠 때지요. 용사님께서 사적인 사교회 모임을 거절하는 건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용사 파티의 후원자 중 한 명으로서, 한 번은 용사님을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더군요.

마침 수확제 때는 왕궁 자체에서 개최하는 모임도 있답니다. 부디 참여를 고려해주신다면 아주 감사하겠습니다. 여왕 폐하께서도 아주 기뻐하실 겁니다. 더해, 우리 딸도 용사님을 아주 선망하고 있답니다…

그 대목에서, 마리안느의 눈이 커졌다. 마리안느는 고개를 휙 숙여 편지의 다음 문장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침 제 딸도 올해 성인식을 치렀기에, 좋은 만남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 이번 후원금과 함께 인사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내용은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마리안느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는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서는, 편지의 앞뒷면을 훑어보다가 이내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아마 후원자의 편지이니 답신을 썼겠지. 마리안느는 미련이 남은 시선으로 책상을 바라보았다.

일로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마리안느는 성창을 거머쥔 채 다른 생각에 잠겼다.

.

.

마리안느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수….”

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기억 한구석에 어렴풋이 떠오르는 편지를 생각해냈다. 그래, 요새 후원자들이 계속 하나같이 보내는 편지 내용이….

“수확제?”

마리안느는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너울을 다시 검집으로 집어넣었다. 아마 별 건 없을 거 같은데. 간다고 해서 특별히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고.

“음…. 참여할까 고민은 되는데. 아마 가게 되면 나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우리 파티를 전원 대동해서 가지 않을까 생각해. 너도 같이 가게 될 거고.”

그래. 이렇게 어마무시한 돈을 후원받는데 얼굴 한 번 비치지 않는 것도 실례다. 그래도 한 번 공식 행사에 나타나게 되면 앞으로도 계속 얼굴을 보여야 할 텐데. 무례를 무릅쓰고 그냥 나가지 않는 것도 방법이려나.

“….”

나는 마리안느를 내려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신경이 쓰인 걸까. 나는 마리안느가 되려 마음에 걸릴 지경이었다. 마리안느는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참여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응. 그러면 나야 기쁘지. 날짜는 혹시 알고 있어?”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수확제의 참여 여부는 결정된 것 같군.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먼저 연무장을 나가기로 했다. 등을 따라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분 좋은 땀이었다. 마리안느는 정리하고 올라가겠다며 남기를 자청했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등 뒤로 계속 마리안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너울은 좀 어땠느냐?]”

성검이 물었다.

“나쁘지 않았어. 왼손에 쥐고 사용하는 걸 배려해 일부러 조금 더 가벼운 재질로 만든 것 같아. 너와 쓰는 감각이 비슷해서 빨리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나는 왼손을 쥐었다 펴보았다. 앞으로는 왼손으로만 검을 쓰는 연습도 해야겠다.

“[너무 혼자서 싸매려 하지는 말거라.]”

“응?”

“[…아무것도 아니다.]”

성검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그대로 침묵했다. 나는 자리에 멈춰 서서 내 허리춤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내 방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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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제에 갈 거라고요?”

다프네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게오르그의 표정도 다를 바는 없었다. 일로이는 팔짱을 낀 채로 뭐 어때, 라며 종이를 들어 보였다. 마리안느가 보았던 종이가 아닌 다른 편지지가 일로이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었다.

“후원자들에게 인사도 할 겸. 돈은 안 주고 귀찮은 편지나 보내는 귀족들에게 확실히 뭐라 일러둘 필요도 있고 말이지.”

일로이는 용사라고 하기에는 질이 나빠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본 게오르그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청문회 때 한 번 본 적이 있는 미소였다. 아무래도 이번 수확제에 또 무언가 꾸미고 있는 것이 있는 듯했다.

“…일만 키우지 마라, 일로이.”

“전혀. 그런 생각 안 했는데?”

게오르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사교회에 참여할 건데 다들 공식 석상에 입고 나설 만한 의상은 있어?”

“난 당연히 있지.”

게오르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다프네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마리안느는 자신에게 관심이 쏠리기 전, 재빠르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다프네는 그런 마리안느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는 듯했다.

“옷, 보러 갈까요.”

마리안느는 그녀의 손을 잡아채는 다프네의 악력을 느끼고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녀의 보랏빛 눈은, 거절을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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