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0 - 80. 연회의 그림자에서 (2)
“눈치도 빨라라.”
나는 나를 구해내 준 다프네와 마리안느를 사랑스럽기가 그지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다프네는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노을과 같은 진한 호박색 조명에 그녀의 보랏빛 눈이 빛났다. 수정을 두 개 박아넣은 것 같은 총기(聰氣). 나는 그 모습에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들은 용사 파티의 사람들 아닌가요?”
아까 내게 말을 걸었던 영애, 코렐라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물러가면 반이라도 갈 텐데, 슬쩍 눈치를 보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다프네는 사뭇 도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일로이에게 인사하셨으면 이제 죄송하지만 나와주시겠어요? 오늘 용사님은 영애들 얼굴을 보러 온 게 아니라서요.”
다프네의 말에 코렐라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다, 평정을 되찾았다. 썩어도 고위 귀족의 자제라는 건가, 표정 관리가 수준급이었다. 코렐라인은 목을 가다듬더니 내게 무어라 말하려는 듯 눈을 마주쳤다. 나는 피식, 웃음을 내뱉으며 다프네의 허리에 손을 얹고 끌어당겼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우리 파티의 후원자들께 인사를 드리는 게 우선이라서요. 인사만 드리고,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다프네는 저항 없이 내게 붙었다만, 얼굴이 확 붉어졌다. 나는 마리안느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내 근처에서 쭈뼛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코렐라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 다프네와 마리안느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물러갔다.
“좋아, 정말 좋은 때에 잘 와줬어, 다프네.”
나는 그리 말하며 다프네를 내려다보았다. 기세 좋게 나한테 와놓고서, 정작 지금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말도 하지 않고 있는 모습이 어이가 없긴 했지만. 이럴 때는 침착한 마리안느가 조금 더 의지가 되려나.
“….”
그렇게 생각하고 마리안느에게로 고개를 돌리니, 여전히 삐걱거리는 인형이 하나. 하긴, 그녀의 성격에 잘도 여기 참여했다 싶었다. 장식이 거의 없는 간소한 하늘빛 드레스, 눈에 띄는 장신구는 없었다. 그 긴 머리는 모두 뒤로 모아 묶여있었다.
“괜찮아, 마리안느?”
“….”
분위기에 적응하도록 내버려 둘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는 가주급 귀족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테이블로 망설이지 않고 걸어갔다. 영애들과 도련님들의 시선은 그대로였지만, 내가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자, 나를 건드리려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귀족들은 내가 다가오자 나를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런. 용사님이 아니십니까.”
“언제나 수고가 많으십니다, 용사님. 저는….”
술잔을 내려놓고 나를 버선발로 맞이하는 귀족들. 나는 그들의 악수를 일일이 받으며 이름과 얼굴을 확인했다. 바크틴스와 에버노드를 보면서 실질적인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변방의 귀족들은 의외로 아주 순수한 목적으로 나를 후원한 듯했다. 그들은 간단하게 나와 인사만을 나눈 후 각자 볼일을 보러 사라졌다. 다프네는 의외라는 듯 미간을 좁히며 멀어지는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진짜 우리 파티의 활동을 도와주고 싶어 저런 걸까요. 아무런 말도 안 하네요.”
“중앙으로 굳이 오지 않으려 하는 귀족들이라면 정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그래, 문제는 저들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간을 보듯 나를 바라보고 있는 오만한 시선들을 의식했다. 대부분이 궁정귀족 내지는 왕도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귀족들. 내가 먼저 가서 인사하기를 원하기라도 하는 건가. 엉덩이들이 무거웠다. 아마 청문회에 참석한 자들도 많겠지.
“[웃기는 자들이구나.]”
뭐, 내버려 둬도 되겠지. 급하면 저들이 먼저 와서 말 걸지 않을까. 저들이 내게 할 말이 없다면 나도 저들에게 해줄 말은 없다. 나는 그들을 한 번 흘겨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런, 인사가 늦었군요, 용사님.”
그리고, 엉덩이 무거운 귀족들이 내게 인사하기 위해 늑장을 부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가식적인 미소를 얼굴에 띠고 그들을 맞이했다.
“예. 괜찮습니다. 늦을 수도 있는 법이지요. 먼저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실례를 범했군요.”
“크흠! 아무튼, 이렇게라도 뵈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여태 사교 모임에 참석해달라 부탁을 많이 받으셨을 건데, 한 번도 참석하시지 않았다고요.”
귀족들은 먼저 인사를 걸었다는 사실이 걸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쓸데없는 자존심에 집착하는 게, 전형적인 귀족 같아서 도리어 안심되었다.
“네. 평소에는 다른 일들로 바쁘니까요. 아마 앞으로도 쭉 사교 모임은 참석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불러주시는 건 감사하지만요.”
뭐, 답장 한 번 하지 않았지만.
“너무 딱딱하게 굴지만은 마시지요. 사교 모임이라 하더라도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눌 뿐인 자리니까요. 혹시 모릅니까, 용사님께 귀중한 인연이 그 중 생길지.”
나는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무안해진 한 귀족이 술잔을 집어 들고는 들이켰다. 나도 슬쩍 테이블에서 술잔을 집어 들었다.
“아, 참. 이곳에 제 딸도 함께 왔는데 인사나 한 번 하시지요. 제 입으로 말하기에는 부끄럽지만, 제 어미를 닮아 아주 용모가 수려한 아이입니다.”
“하나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술을 한 번에 들이키고 눈을 빛냈다. 내 기세에 눌린 귀족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탁, 탁자 위로 빈 술잔이 놓였다.
“생각 없습니다.”
나는 그리 단언하고는 다프네와 마리안느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면 하긴, 나를 포섭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았겠지. 이 자리에 퀘노어 대공이 있었다면 테이블을 박살 내고 떠나버렸을 거다.
“[아이러니하구나. 종말을 걱정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걱정하고, 정작 종말을 신경 써야 할 사람들은 머릿속에 딴생각만 가득하니.]”
성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작게 내젓고는 연회장 어딘가에 있을 게오르그를 찾으려 고개를 돌렸다. 악단이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하나둘씩 손을 잡고 홀의 중앙으로 나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들 어디서 저런 걸 배운 걸까요.”
다프네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왕도에서 귀족으로 살아남기 위한 길은 험난해 보였다. 춤을 즐긴다고 하기보다는 어떠한 절차에 따른 의식 행위 같았다. 로맨틱한 분위기의 한 쌍은 없고 그저 서로를 탐색하며 배운 대로 발걸음을 밟는 사람 뿐.
“품위가 참 무섭네.”
“동감이다, 용사 일로이.”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라, 다프네와 마리안느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슬슬 익숙해지려는 목소리의 주인공, 여왕, 아그네스가 그곳에 있었다. 아그네스는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로 춤추는 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핵심 관리들에게 보고받느라 늦었어. 네가 귀족들을 상대하는 모습은 보았지.”
여왕은 나를 바라보다가, 다프네와 마리안느에게 고개를 돌렸다.
“양손에 꽃을 들고 있으니 다른 영애들이 눈에 찰 리가 있겠나. 나 같아도 무시하겠다.”
“…폐하.”
“농이니라, 농. 봐라, 반응들이 귀엽지 않느냐.”
여왕은 부끄러워하는 다프네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곤란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귀족들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구나. 다음 회의 때에는 조금 더 확실하게 일러놓도록 하마.”
여왕은 귀족들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송구합니다. 제가 사리에 밝지 못해 이런 일을 초래했습니다. 폐하께 심려를 끼친 것이 아닌지 우려됩니다.”
“무얼. 제 신하들 하나 통제하지 못하면 왕의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여왕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리 대답했다.
“이번에 네가 올린 정산 내역, 내가 직접 보았다. 네 새로 만든 검에 들어간 비용을 제한다면, 대부분을 바크틴스에 보냈더구나.”
나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다프네가 놀랐다는 듯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고요.”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일로이. 일국의 왕으로서 부끄러울 뿐이다.”
여왕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복구에 더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다. 더불어, 바크틴스의 종말 숭배 문제도 잘 해결해줘서 고맙구나.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폐하께서 그런 표정을 지으실 이유는 없습니다.”
나는 여왕의 침울한 눈을 보았다. 여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리 말해줘서 고맙다.”
여왕이 한 발짝,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얼어붙은 채 다가오는 여왕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빙의한 이래 정말 많은 사람을 상대해봤지만, 여왕만큼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없었다.
“그나저나, 계속 그렇게 귀찮은 사람들이 네게 매파를 보내거나 한다면, 아예 자리 없다고 못을 박아버리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예?”
나는 반사적으로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뒤편의 다프네도 있겠지만….”
여왕은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내 손을 슬쩍 잡았다.
“너만 괜찮다면 내가 그 상대가 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지.”
“[저 폭군이!!!]”
갑자기 성검이 내 머릿속에서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띵하게 울리는 머리에 손을 올렸다. 다프네는 경악한 눈빛으로, 무례인 것도 잊고 여왕을 뚫어지라 바라보았고, 마리안느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왕은 내 반응과 다프네, 마리안느의 반응을 즐기는 듯하다가 내 손을 놓고 돌아섰다.
“농이다, 농.”
그리고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좋은 시간 되거라, 일로이. 다프네, 마리안느. 자네들도 마찬가지고.”
여왕은 자신을 기다리는 신하들을 향해 유유자적 걸어갔다. 어쩐지, 저 사람과 잠시라도 대화를 나누면 진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술잔을 집어 들고 다시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진땀을 뻘뻘 흘리는 게오르그가 지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찾고 있었다, 일로이. 대체 어디 있었던 거냐.”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넌 날 버리고 대체 어디로 갔던 거야?”
“…약혼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예비 장인어른을 좀 뵙고 왔다. 널 그냥 버려두고 간 건 미안하게 되었군.”
“뒤져라, 인싸.”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술을 홀짝거렸다. 게오르그는 인싸가 뭐야? 라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그냥 그를 무시하고 남은 술을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취기는 올라오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취했으면, 하고 빈 술잔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내 손을 붙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취기로 얼굴이 벌개진 다프네였다. 얘는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왜 이렇게까지 마신 거야.
“춤.”
다프네는 일어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반쯤 그녀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사람들이 춤을 추는 홀에 나섰다.
“춰요.”
다프네는 춤을 출 때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 채 내 팔을 마구 더듬기 시작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양 팔을 붙잡아 똑바로 세웠다.
딸꾹.
다프네의 입에서 딸꾹질이 나왔다. 나는 다프네의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고 왼손을 내 팔과 어깨 사이에 올리도록 했다. 음악은 경쾌한 왈츠에서 아주 느린 왈츠로 바뀌었고, 나는 다프네와 함께 천천히 스텝을 밟으며 귀족들의 움직임을 어설프게나마 따라 했다.
“….”
그리고, 다프네의 어깨 너머로, 가만히 앉아있는 마리안느의 금색 시선이 날 꿰뚫듯이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냥 난 할 말을 잃었다, 일로이.]”
성검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리안느의 눈은 단순히 날 바라보는 시선은 아니었다. 무언가 묻고 싶다는 듯한 눈. 모종의 간절함마저 담긴 그 눈에, 나는 또 다른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