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81화 (82/158)

Chapter 81 - 81. 연회의 그림자에서 (3)

음악은 느지막했다. 마리안느는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는 들려오는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왠지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바라보기는 싫었다. 알록달록한 사람들의 옷이 흐릿하게 번지는 빛이 되어 마리안느의 눈에 들어왔다. 옷은 피어나는 꽃봉오리를 빠르게 보여주는 것처럼 활짝 피어났다가 시들었다. 그 모습은 불꽃놀이 같기도 했다.

“잘들 추는구만, 안 그러냐?”

마리안느의 옆에 서 있는 게오르그가 태평한 말투로 그리 말했다. 게오르그는 칵테일이 든 유리잔을 홀짝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약혼녀가 춤을 추자고 해도 힘들 거 같던데.”

“그렇습니까.”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오르그는 뭔가 상태가 이상한 마리안느를 슬쩍 내려다보고, 그녀의 시선이 자꾸만 흘긋거리는 곳으로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일로이가 다프네를 붙잡고 적당한 속도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이 천천히 돌 때마다 보이는 다프네의 얼굴은 실없는, 헤실헤실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일로이는 싫지만은 않다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하. 뭘 그렇게 보나 했더니.”

게오르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잔을 슬쩍 들어 일로이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 둘이 그렇게 신경 쓰였던 건가? 하긴. 멀리서 바라봐도 좋은 한 쌍이긴 해. 저기, 춤을 추는 귀족 영애들과 도련님들도 전부 흘끔거리고 있지 않나. 일로이 얼굴이야 말할 게 더 있겠냐만은, 다프네도 주변 영애들을 다 찍어누르고 있네.”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마리안느는 사뭇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눈을 똑바로 뜨고는 고개를 휙 돌렸다. 게오르그는 낄낄, 품위 없는 웃음을 지으며 남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뭘. 가끔은 솔직해져도 괜찮지 않나. 일로이도 싫어하지는 않을 거다. 기뻐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저렇게 보아도 꽤 너를 신뢰하고, 네게 의지하고 있을 테니까.”

“…그다지 춤을 추고 싶지도 않습니다.”

마리안느는 볼멘소리하며 주변에 있는 잔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잔을 입가에 가져가 화풀이하듯 쭈욱 마셨다. 게오르그는 기가 막힌 듯 그 광경을 바라보고는 일로이가 춤을 추고 있는 곳을 다시 보았다.

“…저 녀석은 참 죄가 많은 거 같군. 눈치가 없는 녀석은 아닌데 말이지.”

게오르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리안느는 빤히 바라보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일까. 자꾸만 다른 곳으로 시선을 고정하려 했다.

“조만간 고생을 좀 하겠어.”

마리안느는 이미 잔을 하나 다 비워버렸다. 게오르그는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술을 한 잔 더 가져왔다. 술이 올라오기 시작한 건지, 마리안느는 잔을 턱 내려놓더니 자리를 떠났다. 게오르그는 일로이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나중에 저 녀석이 따라가 줘야 할 텐데 말이지.”

느리게 연주되던 곡조가 끝났다. 사람들은 악단을 향해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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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부터 취기가 가시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내게 춤을 추자고 할 때만 술의 힘을 빌렸던 걸까. 다프네는 어느 순간부터 멀쩡하게 바뀐 모습으로 내 손을 붙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멀쩡하다고 하면 어폐가 있는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눈동자가 이제 술에 취해 탁하게 바뀌어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술 깼지.”

내 말에 다프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뭐, 혼내거나 따지는 건 아닌데.

“…네.”

나는 그 이상으로 묻지 않았다. 다프네는 내게 매달리듯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은 이걸로 만족하고 있는 걸까? 다프네에게도 묻고 싶은 건 몇 가지나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세상이 끝나지 않은 뒤에 해도 충분한 말이었다.

“저 안 돌려보내시나요?”

다프네는 자신감이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춤을 멈추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함께 밟았다. 그러자, 다프네도 표정을 바꾸고는 춤을 추었다.

“그러면 이번 곡까지만 춤춰요.”

다프네가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게 쏠리던 시선도 어느덧 옅어졌다. 나는 일부러 게오르그와 마리안느에게로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실례가 되는 행동이라 생각해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에게도, 다프네에게도.

“?”

나는 문득 다프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얼굴 위로 왜 그렇게 바라보냐는 듯이,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용사 파티의 일원으로 지내는 건 어때?”

다프네는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걸 지금 새삼스럽게 물어본다고요?”

“미안합니다, 내가 말주변이 없는 데다가 분위기도 딱히 신경을 안 쓰거든.”

다프네는 내 대답에 쿡쿡 웃었다. 그리고는 희미한 미소를 얼굴 위로 띠었다. 다프네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흐르는 음악에 맞춰 발걸음을 조금씩 옮기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세상을 지키는 것도 좋지만, 저는 그냥 이곳이 좋아요.”

다프네는 담담하게, 흐릿한 목소리로 말한다.

“일로이도, 게오르그도, 마리안느도. 제가 처음으로 소속된 곳인걸요. 여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저는 정말 모든 걸 걸고 싸울 수 있어요.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다프네의 말은 마지막으로 가서 진지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오가 무겁다. 그녀의 삶은 이곳에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흐트러뜨렸다.

“응.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다프네는 다른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녀는 내 대답이 싱겁다는 듯 입술을 앙다물었지만, 달리 뭐라 하지는 않았다.

곡이 끝났다. 사람들은 악단과 춤을 추던 이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다프네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나를 붙들고 있던 손에서 힘을 빼며 한 발짝 물러섰다.

“돌아가죠. 저기 게오르그가 안 그래도 언제 오냐는 것처럼 우리 보고 있는데요.”

내가 고개를 돌리자, 게오르그는 잔을 슬쩍 들어 보였다. 우리가 자리로 돌아오자, 게오르그는 잔을 비우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 제일 눈에 띄었다, 너네. 사람들이 다 너희만 쳐다보고 있었어.”

“…그렇게 볼 게 없었나 싶기도 한데 말이지.”

게오르그는 내게 손가락질하며 능글맞은 웃음을 내비쳤다.

“너희들이 가장 눈에 띈 걸 어떡하라는 말이냐. 눈에 띈 자신들을 탓해야지, 안 그러냐?”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래서, 얘는 지금 어디 갔는데?”

나는 눈을 흘긋 돌려 비어있는 자리를 바라보았다. 게오르그는 자기는 모르겠다는 듯 잔을 흔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모르겠다. 갑자기 술 한 잔 하더니 어디론가 가버리던데. 여태 돌아오지 않는 걸 보면 화장실 간 건 아닐 거고. 너희끼리 놀고 있어서 삐진 걸지도 모르지. 안 그러냐.”

나는 눈살을 확 찌푸렸고, 다프네는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리안느, 술은 마셨던가. 여태 가졌던 술자리에서 얘가 한 모금이라도 마시는 꼴을 못 봤는데. 나는 마리안느가 마신 것으로 추정되는 길쭉한 잔을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찾으러 잠시 갔다 올게. 여기서 잠시 기다려줄 수 있어?”

게오르그는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네가 가겠다는 말 안 했으면 한 대 쥐어박았을 거다, 일로이.”

“퍽이나, 자식아.”

나는 헛웃음을 짓고 다프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물을 것도 없었나. 다프네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시선이 마리안느의 자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빨리 갔다 와요.”

나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왕궁은 넓었다. 수확제가 벌어지는 회장을 벗어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마리안느에게는 뭔가 어디 튈지 모르는 구석이 있었다. 각양각색의 드레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저마다 내게 말을 걸기 위해 다가왔지만, 나는 그들의 인사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인파를 헤치며 나아갔다.

보이지 않았다. 마리안느의 은발은 어지간해서는 눈에 확 띌 건데.

“[테라스 쪽으로 한 번 가보거라.]”

성검이 툭 말을 내뱉었다. 썩 달갑지만은 않은 목소리였다.

“[이번만 도와주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파티 내부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고마워.”

나는 재빠르게 바깥, 테라스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달빛이 쏟아지는 테라스. 마리안느는 홀로 그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소음이 멀어졌다. 그녀는 꼭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달빛에 젖은 은빛 머리가 빛났다. 단정하게 묶여 있던 머리에서 조금씩 잔머리가 빠져나와 흐트러진다.

“마리안느.”

내가 부르는 소리에 마리안느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나처럼 무표정일 줄 알았는데, 지금의 마리안느는 얼굴이 완전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가웠던 평소의 금빛 눈은 무감정하지 않았고, 입매는 굳어있지 않았다.

“…용사니임.”

마리안느는 망설이는 목소리를 뱉어냈다. 말끝이 늘어지고 있었다. 마력을 돌려 취기를 몰아내지는 않으려는 것 같다. 나는 손을 올려 마리안느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어깨가 흠칫하기에, 무의식적으로 나는 손을 떼었다가, 이내 마리안느의 손에 다시 붙들렸다. 더 쓰다듬어달라는 듯, 마리안느는 그녀의 머리를 내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조금만 더… 이 감각을 느끼고 싶습니다.”

마리안느의 금빛 눈이 젖어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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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는 처음으로 응석을 부렸다. 취기는 의식을, 판단을 흐리게 했다. 혼란스러웠다. 마리안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예전, 일로이가 면류관의 시험을 통과했을 때부터 느껴보았던 감각이었다. 어디로 저 사람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그건 일로이가 받은 편지를 보았을 때도, 그리고 일로이와 다프네가 춤을 추는 장면을 바라보았을 때도 느껴보았던 것이었다.

연회장을 박차고 나간 건 충동이었다. 마리안느는 한 번도 충동에 진 적이 없었지만, 처음으로 마셔본 술은 그녀의 이성을 조금 앗아갔다.

“…조금만 더….”

그러니까, 마리안느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 사람이 여기 있다는 확신이. 어디론가 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이 감각을 느끼고 싶습니다.”

오늘 일로이가 입은 옷은 검은색이었다. 솔직히, 그 하얀 용사 제복보다 이 검은 정장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일로이가 다시 쓰다듬기를 계속하자, 마리안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감촉을 느꼈다. 머리를 감싸안는 온기를 느꼈다.

충족감과 동시에 불안감은 더 느껴진다. 마리안느는 아직 왜 일로이가 멍한 상태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이번 수확제 때문은 아니었을 거다. 그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수확제를 지나 보내고 있었으니까. 그 해소되지 못한 의문이 마리안느를 더 이상하게 만들고 있었다.

“용사니임.”

말이 조금씩 헛나오는 게 원망스러웠지만, 취기를 없앨 생각은 없었다. 분명히, 이 취기가 사라지고 나면 자신은 다시 무감정하고 냉정해질 테니까. 일로이에게 정직하게 어떤 일인지 묻지 않고, 그저 그의 말에 따를 뿐인 사람이 될 테니까.

“저는….”

마리안느가 일로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들었다. 회색 머리 아래로 연회장의 화려한 불빛을 등진 눈이 있었다. 청록색으로 어둡게 도사리는, 깊은 숲과 같은 눈이었다. 알 수 없었다. 마리안느 그녀 자신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일로이의 눈을 알 턱이 없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표정도 엉망이겠지, 지금은. 마리안느는 순간 그 사실이 신경이 쓰여 냅다 일로이의 가슴팍에 머리를 들이받았다. 어째서일까. 그 말만 하면 될 뿐인데, 말이 갑자기 막혀서 나오지 않았다. 마리안느는 이상한 속도로 뛰고 있는 가슴에 손을 올려보았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이유는, 취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괜찮아.”

일로이는 멈추지 않고 마리안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리안느는 그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지금 말을 하지 않으면 무언가 놓쳐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일로이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마리안느의 응석을 받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들어갈까?”

마리안느가 진정된 듯하니, 일로이가 말을 꺼냈다.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일로이가 피식, 하고 평소대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하지만.

일로이가 걷기 시작한다. 마리안느는 자신과 한 발짝 떨어진 용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리고는 충동적으로, 일로이의 소매를 살짝 붙들었다. 일로이는 그 작은 저항에도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봐 주었다.

“무슨 일이야?”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깊고 푸른 청록색 눈. 지금만큼은 흔들리고, 반짝이는 토파즈와 같은 금안. 마리안느는 대답을 갈구하듯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마리안느가 입을 열지 않는다면, 저 눈은 어떤 말도 돌려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응, 들어가자. 다들 걱정하고 있어.”

일로이는 그리 말하며 발걸음을 떼었다. 마리안느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한 이성이, 다시 많은 걸 억누르기 시작했다.

묻지 못했다.

마리안느의 머릿속에 어른어른 기억이 떠올랐다.

수확제에 초청하는 편지는,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듯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뒷면은 마치 이면지로 쓴 것처럼, 너절한 낙서나 문구가 흩뿌려져 있었다.

그 와중에 마리안느는 그 짧은 글을 보았다.

‘할 수 있을까.’

그 ‘할 수 있을까’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일로이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그것 때문에 그렇게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그 글을 적어나갈 때는 어떤 생각이었는지.

멀어지는 일로이의 뒷모습은, 마치 어디론가 떠나갈 사람 같았다. 마리안느는 그가 더 멀어지지 않도록, 잰걸음으로 일로이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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