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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82화 (83/158)

Chapter 82 - 82. 계획과 계획 (1)

철퍽.

이걸로 다섯 명째. 아르옌은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쳐다보며 혀를 쯧, 내찼다. 이번 놈들은 저항이 꽤 거세었다. 아르옌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저항하는 방식이 지독해도 너무 지독했다. 신도들로 앞을 막아서게 해서 고기 방패를 만들거나, 아예 그들에게 재앙의 파편을 이식해 괴물로 변하도록 했다.

“도망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하지만 그런 방법을 전부 동원해도 악신 숭배자들은 도망갈 수 없었다. 안드레 주교와 그의 직속 이단심문관들은 능숙하고 신속하게 그들을 잡아들였다. 괴물로 변할 기미가 보인다면 죽이고, 그렇지 않으면 팔다리를 자르고 구속했다.

“멍청한 새끼들….”

왼팔이 잘린 채 검은 피를 쏟아내는 악신 숭배자 하나가 끅끅거리며 피처럼 걸쭉한 웃음을 지었다. 두들겨 맞은 얼굴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안드레 주교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놈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머리를 젖혔다.

“이미 늦었다. 이미 늦었어…. 종말이 오는 데에도 다 순리가 있는 것이거늘. 그렇지 못한다면 억지로라도 일으키는 수밖에 없지.”

“뭐가 늦은 건지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참 좋을 거 같은데 말이죠.”

주교는 단검을 성법기로 달구었다. 따뜻하고 섬뜩한 기운이 단검을 감싸고, 주교는 망설이지 않고 단검을 팔의 절단면에 갖다 대었다.

“끄으아아아아아아악!!”

“소리만 지르지 말고요. 뭐라 말 좀 해보시죠. 말하는 게 늦어질수록 고통은 늘어납니다.”

악신 숭배자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 눈빛 속에서 무언가가 요동치고 있었다. 주교는 혀를 쯧, 하고 내차며 숭배자의 목을 그대로 베어버렸다. 목이 잘린 숭배자의 시체는 바닥에서 꿈틀거리더니, 곤충의 그것과 같은 팔다리를 빼내었다. 안드레 주교는 시체를 걷어차 건물의 구석으로 날려버렸다.

“수틀리면 변하는 건 정말 짜증이 나는군요.”

아르옌은 가만히 시체 더미를 바라보았다. 그때 어째서 안드레 주교의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그곳에 있다가는 자꾸 과거를 돌아보게 되어서 그런 것이었을까. 무엇을 위해, 나는 지금 이러고 있는 거지. 아르옌은 자꾸만 자신을 잡아먹는 혼란에서 벗어나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의뢰. 그저 임무일 뿐.

“그때처럼 편리한 놈은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애초에 인간인 것들이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중범죄자들의 소굴에서 뭘 바라나.”

안드레 주교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하자, 아르옌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이 최후의 수단으로 재앙의 파편을 이식한 상태였다. 잡혀 심문당할 것 같으면 괴물로 변해버리는 방식. 바크틴스의 악신 숭배자가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수사망을 좁혀 나가고는 있었지만, 추가로 들어오는 쓸모 있는 정보는 없었다.

“일단 잠시 쉬고 건물을 한 번 수색해보도록 합시다. 놈들이 무언가를 여기서 자행하려 했음은 분명하니까요.”

안드레 주교는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들었다. 입에 궐련을 문 안드레 주교는 문득 아르옌을 바라보더니 담뱃갑을 내밀었다. 아르옌은 거부하지 않고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주교는 단검을 달구어 불을 붙여주었다. 오랜만의 담배였다. 길게 담배를 빨아들이자, 목에서 연기가 걸리며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아르옌은 작게 기침을 한 번 내뱉으며 연기를 내보냈다.

“일은 좀 어떻습니까?”

“…일이 뭐 일이지. 다를 게 있나. 보수를 받고, 받은 만큼 일을 할 뿐이다.”

“아이시스의 곁을 떠나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아르옌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담배를 빨아들였다.

“아이시스에게 내가 붙어있어봤자. 부딪치게 될 뿐이었을 거다. 내가 아이시스의 말에 그냥 순종하면 끝날 일일 수도 있겠지만….”

아르옌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마음속에 피어난 혼란을 가라앉힐 수는 있어도, 답을 구할 수는 없다.

“뭐, 그렇군요.”

안드레 주교는 무성의하게 대답하며 담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재떨이를 꺼내 꽁초를 집어넣었다.

“그건 당신이 생각할 문제겠죠. 도움이 필요하다 하면 거절하지 않고 도와주겠지만, 괜히 오지랖을 부리지는 않겠습니다. 일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이라면 말이죠.”

“내 일은 내가 잘 알아.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려 애를 쓸 테니, 쓸데없는 걱정은 말지.”

아르옌이 한숨과 함께 꽁초를 땅바닥에 떨구자, 주교는 착실하게 그 꽁초를 수거하며 재떨이에 집어넣었다. 아르옌은 주교의 괴상한 습관에 코웃음을 쳤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썰어버리면서 담배꽁초는 재깍재깍 잘도 수거하는군.”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인다고 해서 아무 데나 담배꽁초를 버려도 된다는 건 아닙니다.”

안드레 주교는 언제나처럼 ‘옳은 궤변’을 지껄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르옌은 기가 막힌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지켜보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따라 일어섰다.

“주교님.”

그들에게로 이단심문관 하나가 다가왔다.

“저기, 지하실로 향하는 입구와 같은 문이 발견됐습니다. 벽난로 앞의 깔개를 걷어보니, 열쇠 구멍이 보였습니다. 새어 나오는 기운이 상당히 강해요.”

주교는 아르옌을 돌아보며 고갯짓했다.

“가보시죠. 어쩌면 괜찮은 단서를 찾아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단심문관들은 저마다 랜턴을 꺼내 불을 붙였다. 열쇠를 찾을 수 없자, 주교는 들어가는 입구를 아예 부숴버리고는 비수를 하나 꺼내 들었다.

“대놓고 사이한 기운이 풀풀 풍기는군요. 악취도 심하게 나고. 이 아래에 꽤 많이 죽어있겠군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이단심문관들이 무기를 꺼내 쥐고 돌입하기 시작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냄새는 심해졌다. 악신 숭배자들이 풍기던 특유의 기운 또한 강해져서 아예 검은 안개의 형태로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

“…무슨 지하실이 이렇게 깊은 거지.”

아르옌이 중얼거렸다. 서늘한 바람이 계단을 타고 올라올 정도로 넓은 공간이 있는 것 같았다. 랜턴의 빛에 계단과 벽이 비친다. 피로 보이는 얼룩이 번져있다. 한참을 내려가, 이단심문관들은 지하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랜턴의 불빛이 보여주는 광경을 확인하고는 모두가 동시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건지….”

회백색의 텅 비어버린 공간. 차라리 공동(空洞)이라 부르는 게 맞아 보일 정도로 컸다. 그리고 그 아래, 거대한 역오각성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만들어져 있었다.

“저건… 다 사람 아닌가요.”

사람, 나체의 시체들이 역오각성을 구성하고 있었다. 모종의 주술을 시행하던 중이었는지, 아니면 이미 주술이 끝나버린 건지. 안드레 주교는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시체 더미들에 다가가 보았다. 방금 쓰러트렸던 놈이 생각났다.

‘이미 늦었다… 이미 늦었어….’

대체 무엇이 늦었다는 말이었지. 설마 이걸 보고 말한 건가.

“의식과 같은 형태….”

안드레 주교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의식. 저들이 펼칠 의식이라고 하면, 숭배. 아니, 단순한 숭배 의식에서 이런 기운이 나올 수는 없다.

“…소환?”

설마. 주교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아르옌의 얼어붙은 눈과 안드레 주교의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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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아르옌은 그렇게 말했었다.

‘내 손에 담긴 것조차 불안한 상황에서 남의 세계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 손에 들고 있는 건 멀쩡하게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설령 그것이 용사라고 해도 말이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나도 내 손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내 손에 담기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 무엇도 손에 담은 적이 없다고 할 수가 있을까. 그를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기분 참 더럽구만.”

나는 일어나며 그리 중얼거렸다. 날씨는 한껏 추위를 머금고 다가오고 있었다. 날이 추워진다는 건 곧 재앙이 가까워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발로 이불을 퍽퍽 걷어냈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팍에서부터 다리, 발끝으로 번졌다. 당장 다시 이불을 덮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눈, 내렸네.”

나는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첫눈이 빨랐다. 12월의 초순, 함박눈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란 눈이 조금씩 내리며 지붕 위에 쌓이고 있었다.

“….”

나는 침대에 기대어놓은 성검을 흘긋 바라보고서 내 방의 책상에 앉았다. 최근 성검이 내 생각을 읽는 것이 힘들어졌다고는 해도, 무리하면 억지로 읽어낼 수 없는 것도 아닐 거다. 언젠가는 성검과 터놓고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어디 보자.”

나는 공책을 펼쳤다. 이 세상에 떨어지자마자 기록하기 시작한 공책에는 기록들이 있었다. 이 세상에 관한 기록. 원작의 주인공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어떻게 재앙과 맞서 싸웠는지.

“이건 그런데, 너무 내가 하기에 달린 거 아닌가.”

나는 다섯 번째 재앙, ‘안개’에 관한 기록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여태 모든 시련이 내가 하기에 따라 바뀌었고 진행되었지만, 이번 ‘안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나는 끙, 하고 입에서 침음성을 내뱉고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지금 생각해봤자 대책을 생각할 수는 없겠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장 좋은 대책은 물론 강해지는 거다. 혼자서 수련도 많이 하고, 마리안느와나 다프네, 게오르그와도 대련하고 있지만, 재앙을 상대하는 건 그런 표면적인 강함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었다.

“이겨야지.”

나는 중얼거리며 공책을 덮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나는 가만히 침대에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가 성검의 검자루를 쥐었다.

“[…일찍 일어났구나, 일로이.]”

요새는 성검, 그녀도 아예 숙면을 취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많이 추워졌더라. 밖에는 눈도 내려.”

“[눈이라. 올해는 빨리 내리는구나.]”

나는 성검의 옆에 기대어져 있던 너울을 집어 들었다. 잠깐 걸어야겠다. 마리안느는 아직 자는 것 같았다. 나는 코트를 꺼내 입고 목도리를 두른 후, 문을 열고 나섰다. 해가 아직 뜨지 않았다. 거리의 등에 내리는 눈이 비친다.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은 없다.

“[최근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구나.]”

“나한테 일이 들어오지 않는 게 좋은 거지, 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성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경비병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는 밖으로 나섰다. 숲속으로 가는 건 오랜만이었다. 눈이 내린 숲은 평소와 다르다. 눈은 기척을 감추고 세상의 눈을 가린다. 내 발아래에서 눈이 뽀드득거리며 뭉쳐 바스러졌다.

크워어어어어!!

잿빛곰. 오랜만에 들어보는 포효였다. 어딘가 그리운 느낌마저 나는 소리. 나는 내게로 단두대처럼 떨어지는 곰의 앞발을 보았다.

퉁.

주변의 눈이 싹 사라졌다. 이 정도였나? 나는 곰과 하이파이브를 하듯 손을 쳐들고 있었다. 곰은 당황한 듯 입에서 작은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툭, 뒤로 밀었고, 잿빛곰은 앞발을 내려놓고는 경계하듯 나를 보며 그르렁댔다.

크워어어어!

곰은 전법을 바꾸어, 앞으로 돌진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했다. 나는 돌진하는 잿빛곰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가장 단순한 걸음. 나는 앞으로 발을 내딛고는 주먹을 쳐올렸다.

쩌어억-!!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곰이 앞으로 쓰러졌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게, 즉사해버린 것 같았다. 나는 잿빛곰의 몸을 발로 툭툭 쳐서 밀어내고는 시체 앞의 나무에 앉았다. 강해진 건가? 정말? 나는 눈을 흐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김이 되어 흩어진다.

“[일취월장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건가?]”

“조금 사기를 친 거 같긴 하지만.”

나는 곰을 흘긋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렇게 강해졌다, 라고 자랑하고 싶은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성검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심심해서 잠시 들러본 거일 뿐이야.”

“[…내게까지 숨길 이유는 없지 않느냐.]”

성검은 불만인 듯 말했지만, 나는 쓴웃음으로 넘겼다. 나는 곰 한 마리만을 쓰러트린 후 다시 성벽 안으로 돌아왔다. 내리던 눈은 어느새 그친 채였다.

“…음?”

그리고 나는 집 앞에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산만하게 기웃거리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복장을 보아 하니 청교회 쪽의 사람인 것 같은데…, 새벽부터 무슨 일이지?

“우리 본부에 무슨 용무라도 있는 건지?”

“용사님.”

사제로 보이는 사람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성국으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성국이요? 무슨 일이….”

설마. 내가 말하다가 얼굴이 굳자, 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짐이 심상치 않습니다. 여왕 폐하께도 말씀드리겠지만, 현재 성국에 재앙의 전조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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