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3 - 83. 계획과 계획 (2)
“끄으으으으윽!”
성국, 이단심문관의 본부 지하.
안드레 주교는 그 어느 때보다 냉혹한 표정으로 악신 숭배자의 살을 떠내고 있었다. 얇게 저며진 숭배자의 피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지 않았다. 주교가 단검으로 잘라내는 동시에 성법기의 열로 지져 출혈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의식은 도대체 뭐지? 무엇을 소환하고자 하던 것이었지?”
한계까지 다다른 통증에 숭배자는 퀭해진 얼굴을 들어 올렸다. 방의 구석에는 아르옌이 팔짱을 낀 채로 악신 숭배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숭배자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쉬어버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환은…아니다. 그건, 강제로 그분들의 잔재와 맞닿는 의식. 재앙이 헐거워진 고삐를 풀고, 우리의 부름에 응하게 할 뿐.”
악신의 잔재. 재앙. 주교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번에 다섯 번째 재앙을 움직이게 하는 건 좀 어려운 일이었어. 가장 중요했던 네 번째 재앙의 효과가 영 신통치가 못했지. 그 용사라는 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이 재앙의 역할 따위 알 턱이 있겠나.”
악신 숭배자는 킥킥거리며 웃음을 토해냈다.
“봉인은 무너지고 있다. 종말은 막을 수 없어…. 크흐흐흐. 그리고 사람들이 그분의 존재를 더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두려워하면 두려워할수록, 그분들은 가까워질 거다. 그분들은 죽음과 혼돈의 주인…. 너희들이 무슨 수를 써도, 그걸 막을 수는 없을 거다.”
가만히 두어도 세상은 계속 혼란스러워질 뿐이니까. 숭배자는 그리 말하며 환희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재앙의 앞날에 은총 있으라.”
퍽-.
악신 숭배자의 머리가 폭탄처럼 터졌다. 안드레 주교는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에 핀 거무죽죽한 피를 닦았다. 자살. 온몸이 묶인 상태에서도 제 머리를 터뜨릴 방법이 있었나.
“어떻게 된 거지.”
“저게 모종의 주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정보를 다 캐내기도 전에 제 머리를 터뜨려 죽어버렸군요. 정보를 부는 척하며 헛소리만 나불거리다가 뒤지다니.”
다음부터는 그냥 정보를 불든 말든 포만 떠야겠군요. 안드레 주교는 투덜거리며 머리가 터진 시신을 등지고 지하실의 계단으로 나갔다. 아르옌은 시신이 있는 자리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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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왕국을 벗어나 성국까지 가는 길은 에버노드로 향하는 길처럼 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물들은 지형을 가리지 않고 나타나 돌아다녔다. 험한 지형이라 해서 마물이 적은 건 아니었고, 험난하지 않은 지형이라고 해서 마물이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었다. 뭐, 중요한 건, 마물은 어디서든 나타난다는 점이었지만.
“나타났어요. 꽤 강해 보이는데.”
야영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다프네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고개를 들었다.
“귀찮은 놈들.”
게오르그가 모닝스타를 들어 올리며 인상을 썼다. 마리안느는 성창을 쥐고 일어났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너울을 뽑아 들었다.
“내가 갔다 올게.”
뒤에서 게오르그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무시하며 뛰쳐나갔다. 이번에 나타난 건 거대한 전갈 두 마리. 독침을 내게 세우며 쉿쉿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게까지 급하게 나설 필요가 있었느냐?]”
“빨리 처리할수록 좋으니까.”
전갈이 달려든다. 나는 내게 쏘아지는 독침을 향해 그대로 너울을 휘둘렀다. 검날은 놈들의 단단한 외골격을 무시하고는 두부처럼 베어버렸다. 나는 몸을 얼마 움직이지도 않고 전갈 두 마리를 모두 처리했다. 잘려버린 놈들의 몸뚱아리에서 남은 다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돌아가자.”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내 뒤를 따라온 게오르그와 마리안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 옆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자, 게오르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모닝스타로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뭐가 그리 급해서 뛰쳐나간 거냐?”
“미안. 몸을 움직이지를 못해서 안달이 난 거 같아.”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게오르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차피 재앙과 전투하면 마음껏 움직일 수 있잖냐. 힘을 아껴둬라.”
“참고할게.”
게오르그는 토막이 나버린 전갈의 사체를 흘겨보고는, 내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마리안느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마리안느.”
나는 마리안느에게 손짓했고, 마리안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뒤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동지가 점차 가까워지고, 날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저물고 있었다.
새벽이 한참 지난 시간, 나는 문득 눈을 떴다. 옆자리에서는 게오르그가 코를 골며 자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텐트를 걷고 나와 모닥불가에 앉았다. 내가 알지 못한 싸움과 마주해서 그런 걸까, 최근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안개.”
나는 재앙의 이름을 중얼거려보았다. 모닥불 위로 이따금 솟아오르는 하얀 연기가 그 모습인가 싶었다.
원작의 일로이가 안개 속에서 무엇을 마주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르옌이 무엇을 마주했고, 어떻게 극복했는지만 알 뿐이다. 최근 그 불안감이 자꾸 겉으로 드러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 세수를 했다.
정신 차려, 뭐 하는 거야. 재앙을 상대할 때는 잡생각은 사치잖아.
손가락 사이로 타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그리고, 불길의 너머에 서 있는 누군가의 윤곽까지도.
“…마리안느?”
마리안느는 아무 말도 없이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녀가 어깨 위로 걸친 담요가 스치며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불의 온기보다, 옆에 앉은 마리안느의 체온이 더 가깝고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으신가요.”
마리안느는 평소 같은 목소리로 그리 물었다.
“아니, 그냥 자다가 깼어. 다시 잠들기는 좀 싫어서.”
나는 고개를 들어보았다. 하늘을 촘촘하게 별이 수놓고 있었다. 꽤 오랫동안 별빛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크틴스의 밤하늘에는 항상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유성이 뚝 떨어졌다.
“너는 그냥 잠이 안 왔던 거야?”
마리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자다가 방금 깨어났습니다. 인기척을 느껴서.”
이런, 나 때문에 잠에서 깬 건가. 어쩐지 어딘가 졸린 표정이더라. 마리안느는 눈 밑을 약하게 비비며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들어가서 자. 내일이면 도착하니까, 쉴 수 있을 때 쉬어둬야지.”
“…그건, 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리안느는 억지를 부리듯 말했다. 마나로 피로는 일시적으로 씻어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쌓이는 피로는 마나로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잠을 푹 자는 수밖에. 뭐, 나는 항시 성검의 신체 회복을 받고 있기에 숙면이 그렇게까지 절실하지는 않지만.
“난 별로 피곤하지는 않은데, 너는 좀 자야 할 거 같은데.”
마리안느는 그렇지 않다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억지로 자지 않고 버티려는 듯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시선을 모닥불로 돌렸다.
“그러고 보니, 에버노드에서도 이렇게 밤에 만났었지.”
“…예. 그때는 제가 가르치는 쪽이었지만.”
지금은 제가 더 배워야 할 거 같군요. 마리안느는 그리 말하고는 담요를 여미었다. 나는 문득 허리에 차고 있던 너울을 뽑아 날아오는 낙엽을 향해 휘둘렀다.
픽.
너울의 검끝은 정확히 낙엽의 잎맥을 짚어냈다. 낙엽은 잘리지도, 뚫리지도 않고 온전했다. 이 과정이, 몇 달 전만 해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었다.
“…용사님의 성장은 몇 번을 보아도 경이롭습니다.”
마리안느는 너울의 끝에 박힌 낙엽을 빼 손에 쥐었다.
“이렇게 용사가 되지 않으셨어도, 올바른 스승만 있었다면 굉장한 검사가 되었을 겁니다.”
뭐, 나 혼자만의 힘으로 된 건 아니고, 성검이라는 사기적인 스승이 하나 있긴 했지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너울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글쎄. 그렇다면 내가 절실하게 노력하지 않았을 거 같기도 하고.”
나는 그리 말하며 마리안느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녀는 모닥불의 온기를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내 내 어깨에 푹 고개를 기대었다. 미약한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나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그대로 자세를 고정하고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불꽃에서 난 거울처럼 내 모습을 찾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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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국가, 성국은 왕국의 동쪽에 붙어있다. 면적은 왕도의 두세 배 정도. 대륙의 중간에 떡하니 자리한 성국에는 산이 없고, 바다, 호수, 강도 없다. 인위적으로 꾸며놓은 거대한 숲과 같은 정원이 있을 뿐, 그 외의 자연경관은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안드레 주교께서는 지금 어디 계신가요?”
마차 안에서, 나는 사제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신을 이단심문관이라고 밝힌 사람치고는 대범하거나 냉철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악신 숭배자들의 흔적을 따라 추적을 계속하고 계십니다. 종말 숭배가 나타나는 땅을 모조리 훑고 계시는데…. 이번에 꺼림칙한 현장을 발견했죠. 저도 그곳에 있었고요,”
“꺼림칙한 현장이라고요?”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사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람의 시체로 만들어진 역오각성이었습니다. 그들의 피로 원과 문양을 그려 넣고, 그 문양에 따라 사람을 배열한, 끔찍하고도 잔학한 의식이었지요.”
사제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나는 얼굴을 굳히고는 사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그걸 소환 의식의 일종이리라 생각했었죠. 재앙이 과연 소환 의식을 한다고 해서 불러낼 수 있는 것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해서, 이번 다섯 번째 재앙을 불러내려 한다는 말씀인가요.”
“예. 도대체 무슨, 어떤 방법을 써서 무엇을 목적으로 그런 짓을 저지르려 하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지만…. 그 의식이 실제로 먹힐 것 같다는 게 문제죠.”
마차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새하얀 보도블록으로 도배된 거리를 마차가 지나갔다.
“악신 숭배자들이 진작 이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을까요?”
“겨우 의식 하나로 재앙을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었다면, 진작에 저들도 그렇게 했겠죠. 아마 악신 숭배자들에게 있어도 무시하지 못할 대가를 치렀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마차가 멈춰 섰다. 성국의 하늘은 아침인데도 어둑어둑했다. 꼭 거인이 눈앞에 당도했을 때의 에버노드처럼. 나는 그 특유의 불온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인상을 찡그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파티 멤버들 또한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느낌…. 꼭 그때 같네요. 마물이 출현하거나 할까요.”
다프네가 팔을 문지르며 물었다.
“아니. 안개는 좀 특별한 경우. 크라켄이나 거인 때처럼 마물이 몰려오지는 않겠지만….”
나는 원작에서 묘사되었던 안개의 특징을 떠올려보았다.
“안개 속에 들어서게 되면, 그 밖으로 다시는 나갈 수 없을 거야. 꿈과 환각의 세상에서, 영원히 헤매게 되겠지. 목숨을 다할 때까지 말이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일로이?”
문득 다프네가 부르는 소리에,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빨리 이번 재앙에 대비한 대책을 구상해야 했다.
“일단 교황 성하를 뵈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