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84화 (85/158)

Chapter 84 - 84. 계획과 계획 (3)

“불안하지만, 우리는 떨지 않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어요.”

교황을 보러 가는 길까지 우리를 안내해주는 사제는 쉴 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나는 한 귀로는 그 말을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걸었다. 고위 성직자로 보이는 흰옷의 사제들이 내 옆으로 지나가며 가볍게 목례했다. 저들 중 몇몇은 원작에서 쓰레기 같은 놈들이었지.

“신께서 우리를 보살펴주시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요. 여태 세상을 덮쳐왔던 모든 재앙에서, 인류는 굳건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 않습니까.”

과연, 바크틴스의 사람들에게 그 말을 들려주면 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궁금하긴 한데. 나는 코웃음을 치고 싶은 마음을 숨기며 덤덤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마 저것도 자신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혼잣말에 가까울 거다.

“물론, 그 모든 건 세 번째 재앙과 네 번째 재앙을 훌륭하게 막아주신 용사님 덕분이긴 하겠지만요. 그게 바로 신의 보살핌이 함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네가 잘한 거지, 무슨 신 타령이냐. 기분 나빠해도 된다, 일로이.]”

성검이 내 머릿속에서 비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제는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튼, 이번에도 이렇게 발 벗고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용사님. 비단 성국뿐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한 움직임이니. 가끔은 마리안느님이 부러워질 때도 있습니다.”

마리안느는 흘긋 시선을 주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사제는 제 말이 무시당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를 안내했다.

“자, 이곳입니다. 교황 성하께서 안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접견실로 향하는 문은 성가셔보이는 갑옷을 착용한 두 성기사가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움직이지도, 말을 하지도 않았다.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조각상인가 싶었다.

“용사님, 부디 신의 은총이 함께하길.”

사제는 끝까지 그리 말하고는 물러갔다. 문지기들이 움직일 기색이 없자, 나는 문가에 다가갔다. 문은 언제 그렇게 닫혀있었냐는 듯 활짝 열렸고, 나는 문지기들을 지나쳐 새하얀 대리석으로 꾸며진 접견실로 들어갔다.

교황은 방의 끝에 앉아있었다. 온화한 성직자와는 거리가 먼 고약한 인상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다 희게 새버린 머리카락. 옅은 눈썹 아래에 도사리는 눈은 날카로웠고, 그 아래로 짙게 다크서클이 드리웠다. 다크서클 옆의 날카롭게 휜 매부리코가 표독스러웠다. 어지간히도 할 일이 많나 보다.

“반갑습니다, 용사님.”

교황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나는 예를 갖춰 인사하면서 교황을 바라보았다. 교황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지요. 우선 이곳에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교황은 파티 멤버들에게 모두 인사를 건네고 나서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와 앉았다. 일국의 군주라기에는 위엄이 넘치지는 않았으나, 교황이 풍기는 기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성국이 요새 꽤나 바빠서요, 이렇게 추레한 모습으로 마주하는 걸 용서해주시지요.”

“추레하다뇨,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교황은 방금까지 업무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뭇내 그것이 신경 쓰인다는 듯 눈을 흘긋거리던 교황은 이내 미련을 버리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성국의 본토에 재앙이 출현하고, 악신 숭배자 놈들은 무슨 짓을 꾸미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죠. 썩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용사께서도 굉장히 바쁠 때겠지요.”

뭐, 난 교황의 이 심드렁한 태도가 싫지는 않았다. 적어도 저기, 북쪽의 누구처럼 나를 시험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으니까.

“이전까지 안드레 주교가 귀찮게 굴지는 않던가요? 마리안느를 용사 파티에 넣자고 한 것도 그 또라이 새…, 아니, 주교가 독단적으로 시행하고 내게 보고한 거니까요. 혹시 그 이후로 용사께 폐를 끼치지는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뇨. 덕분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리안느도 그렇고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부디, 그 사람이 사고를 치면 제게 꼭 일러주십쇼. 지금은 또 눈 뒤집혀서 악신 숭배자들을 잡겠다고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고 있으니.”

음. 대충 안드레 주교가 성국에서 어떤 존재인지는 대강 알겠다. 교황의 저 다크서클 지분의 1할 정도는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뭐, 허례허식은 여기까지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말씀드리는 게 좋겠죠? 하루라도 빨리 대처해야 할 테니 말입니다.”

교황은 성격도, 의외로 빠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언제부터 그것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안개’는 지금 성국의 절반을 삼킨 채 가만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남은 사람들을 물려놓긴 했지만, 언제 어떻게 그것이 접근해올지 모르니, 감시 인원을 붙여두었습니다. 현재는 전진하지 않고 아예 잠잠한 상태인 것 같더군요.”

교황은 창문을 흘겨보았다.

“안개와 접촉은 엄금했습니다. 저 안개가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는 모르고, 얼마나 넓어질지도 모릅니다. 특징도,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우리는 모르지요. 안개에게 잡아먹힌 절반의 땅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교황은 그리 말하고는 찻잔을 들어 차를 홀짝였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어떻게 대비를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그저 갑자기 저 안개가 덮쳐오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마물이 없어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보다 더 좋은 대처를 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안개를 상대할 방법? 벽을 친다고 해서 안개가 넘어오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마법을 쏘아 보낸다고 해서 흐트러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번 재앙을 상대할 유일한 방법은 안개를 유지하는 마력을 소진하도록 유도하는 것. 안개는 힘을 다하면 스스로 흩어져 사라질 거다.

“용사님께서 생각해보신 방법은 있습니까?”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나는 말을 떼었다. 하지만 이것도 말이 마력을 소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지, 안개가 사람들과 접촉하면 그들의 마력을 앗아가며 연료로 사용할 거다. 그러니까, 안개 속의 사람들은 천천히 죽어가는 상태, 아직은 죽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방법을 말씀드리기 전에, 일단 상황을 보러 가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교황은 내 말이 달갑다는 듯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빛낸다기보다는, 부라린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걸까.

“함께 보러 가시지요. 아무래도 제가 직접 말씀드리는 게 더 나을 듯하니.”

교황은 앞서 접견실을 나섰다. 교황의 뒤로는 곧장 호위 기사가 하나 따라붙었다.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교황 성하?”

“안개의 상태를 확인하러 갑니다. 용사님께서도 보셔야 할 테니.”

방법이 있다는 말에 고양된 걸까, 아니면 단순히 격무에서 잠시나마 빠져나올 수 있어서 기쁜 걸까. 교황의 발걸음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빨랐다.

“교황청의 뒤편… 우리의 눈이 미처 닿지 않는 곳. 교회의 등이라고 불리는 곳이지요.”

교황이 말할 때마다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우리는 휑하니 하얀 보도블록만이 남겨진 곳에 다다랐다. 그 너머로, 너무나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끔찍할 정도로 불길하고, 강력한 마력. 나는 나도 모르게 성검의 검자루를 거머쥐었다.

“…저 너머로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주로 성직자들이 기거하는 골목이었죠. 성직자 외에도, 일반 신도들도 몇 살고 있었습니다. 작은 농경지나 목축지가 있는 땅이기도 했고요.”

교황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전부 죽었으리라 생각하기는 싫습니다. 안개가 얼마나 넓게 퍼져있는지도 짐작할 수가 없어요. 성국 너머의 왕국이나 공국은 전부 어떻게 되었을지.”

안개는 벽처럼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마치 한층 강화된 ‘한계선’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하얀, 앞을 내다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깊고 흐린 연기. 소용돌이처럼 안개는 제자리에서 계속 모양을 바꾸고 있었다.

우리는 안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게… 안개.”

다프네는 두려운 표정으로 안개를 바라보다가, 손을 안개에 슬쩍 내밀어보려 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기겁하며 온몸의 마나를 끌어올리며 신형을 날렸다.

“만지면 안 돼!!”

다프네가 내게 손목을 붙들린 채로 깜짝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안개와 접촉하기 전에 다프네를 구해낼 수 있었다. 나는 다프네를 안개로부터 뒤로 질질 끌고 나오며 말했다.

“접촉하는 순간, 넌 안개 속으로 사라질 거야. 안개가 너를 바로 인식해 잡아먹어 버릴 거라고. 그렇게 되면 너를 어떻게 찾을 방법이 없어.”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경고했다.

“절대 안개에 한 걸음 이상 가까워지지 마.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고.”

다프네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프네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너무 강하게 잡았던 걸까. 다프네는 손목을 티 나지 않게 문지르고 있었다.

“…미안해. 네가 거기 닿는 걸 막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

“괜찮아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일로이….”

교황은 놀랐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에 대해 꽤 자세히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용사님.”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교황께서도 저걸 보셨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얼추 짐작할 수 있을 텐데요.”

다프네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력의 흐름을 아예 읽을 수가 없었어요. 안개가 제 마력의 투과를 거부하고 있었거든요. 이 밖에서는,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예 알 수가 없어요. 안개 속은 밖과는 아예 별개의 세상인 거 같아요.”

교황은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입을 열었다.

“실에 사람을 묶어 들여보내는 건 안 되겠습니까? 긴급한 상황이라면 바로 실이나 줄을 당겨 빼낼 수 있도록.”

다프네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줄이랑 연결된 모든 게 함께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갈 거예요. 고립된 세상은 그런 꼼수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외부에서 저걸 어찌할 방법은 없어요.”

“…신이시여.”

교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개는 당장이라도 우리에게 다가올 것만 같았다.

“정말 저걸 어찌할 방법이 있는 겁니까.”

교황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에 찬 고갯짓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저걸 쓰러트릴 방법이 있는 건 맞으니까.

“예. 할 수 있을 겁니다.”

교황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면류관 사건 이후로 뭔가 말씀드리기 꺼려졌지만, 성유물 창고로 한 번 함께 가보도록 하지요. 어쩌면 용사께서 유용하게 사용하실 수도 있는 성유물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교황은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고, 내 주위의 파티원들도 이상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괜찮습니다.”

나는 뒤의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난 이미 성유물로 강해질 선을 넘어섰다. 성검도 있고, 면류관도 있고, 너울까지 있다. 몸은 거인의 주먹을 맞아도 버텨낼 수 있을 정도로 강건해졌다. 내게 도움이 될 성유물은 있어도 이번 안개 공략전에서 내게 큰 도움이 될 성유물은 아마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저 대신 동료들에게 성유물을 하나씩 대여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일로이.”

게오르그와 다프네가 놀랐다는 듯이 나를 불렀고,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너희들도 확실히 전력 강화가 필요할 때쯤이지.

“안개와의 싸움에서 대공처럼 우리를 확실하게 도와주리라 생각되는 전력은 없어. 우리가 강해져야만 해. 그렇지 않아?”

내 말에, 게오르그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강해져서 나쁠 건 없으니 말이야.”

나는 고개를 돌려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늘 그렇듯, 큰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도 고개를 끄덕여준 후 다시 교황을 보았다.

“괜찮겠습니까, 교황 성하.”

교황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제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물론,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세 개를 빌려드리나 네 개를 빌려드리나, 별 차이는 없을 테니 용사님께서도 사양하지 마시고 한 번 둘러보시죠.”

다시 눈을 뜨고 날 바라보는 교황의 눈은 나를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 시선을 마주했고, 교황은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절레절레 머리를 내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십시오. 바로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