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5 - 85. 계획과 계획 (4)
“…정말 이런 걸 제가 받아도 되는지는 모르겠네요.”
다프네는 창고에 즐비한 성유물들을 바라보며 감탄 아닌 감탄을 흘렸다. 창고라고 해야 할까. 교황청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비밀스러운 장소를 창고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한 물건이 많군. 비단 성유물만이 있는 게 아닌 거 같기도 한데.”
게오르그는 차마 손을 가져다 대지는 못하고 탐난다는 듯한 눈을 하고는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한 위대한 왕이 썼던 왕관, 어떤 성인의 묵주, 방랑 기사의 방패와 검. 황금색 보주. 청교회의 전승과 관련이 깊지 않은 물건이라도 보관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성국에는 군대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제정신이 박힌 군주라면 성국을 무력으로 침공하려고 생각하지는 않겠죠. 위험한 성유물들이 새어나가지 않게 보관할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저 가진 것만으로 위험한 물건들이 몇 보입니다만.”
게오르그가 교황의 변명 아닌 변명에 조심스럽게 반발했지만, 교황은 어깨를 으쓱이지도 않았다. 이미 수 차례나 항명을 받은 적이 있을 거다.
“위협이 될지는 몰라도, 저것들이 사람과 사람의 싸움에서 실제로 이용될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성유물들의 끝에 서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특별히 내가 쓸만한 성유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가지고 있다면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하나 정도는 빌리는 게 어떻겠느냐. 이곳의 성유물들은 면류관처럼 사용 조건이 까다롭지도 않을 거다.]”
나는 성검의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조금 더 찾아보고. 없어도 아쉽지는 않으니까.
마리안느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아마 이곳에 올 일은 없었을 테니, 당황스럽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묵주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는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있으니 천천히 둘러보시지요. 각자의 마음에 드는 성유물이 하나씩은 있을 겁니다.”
다프네는 물건보다는 고서에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교황은 마도서를 숙소 밖으로는 가지고 가지 말라는 조항을 걸고서 다프네에게 마도서 중 하나를 대여해도 괜찮다고 했다. 마도서의 내용이 유출될 시 모든 책임은 그녀에게 있다는 무서운 말과 함께.
“네, 감사합니다!”
다프네는, 뭐, 그런 사소한 사실 하나하나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원하는 걸 얻었다는 듯, 다프네의 보랏빛 눈은 오랜만에 강렬한 열의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다프네도 6서클에 다다랐던가. 다른 곳 같았으면 마탑에 모셔가겠다고 난리를 칠 텐데.
“난 이 투구로 하지.”
게오르그는 투구를 하나 집어 들었다. 낡고, 흠집이 잔뜩 난 투구였다. 교황은 별말 없이 그 사용을 허가했다. 행운의 투구. 전승에 따르면 몇 번이나 운 좋게 주인을 지켜주었다고 한다. 대체로 성유물들이 그 전승에 따라 힘을 부여받는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다. 게오르그는 투구를 한 번 착용해보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마리안느는 묵주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묵주 옆에 놓인 나침반 같은 것을 포착하고는 집어 들었다. 그를 지켜보던 교황이 마리안느에게 다가가 말했다.
“묵주는 네 성법기를 한층 강화할 거고, 바늘이 한쪽으로만 난 나침반은… 옛날, 한 해적이 쓰던 물건이다. 어쩌다가 성국에 흘러 들어오게 되었지.”
교황은 그리 말하며 나침반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그 바늘이 가리키는 곳이 네가 원하는 것이 있는 곳이다. 제법 유용하게 쓰일 물건이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전투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겠냐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겠지.”
마리안느는 묵주를 흘긋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 고민의 흔적이 얼굴에 스치고 지나가더니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손에 꾹 쥐고는 교황을 바라보았다.
“저는 나침반을 선택하겠습니다.”
“…그래. 마리안느, 네 선택이 그렇다면야.”
교황은 고개를 끄덕거려주고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여전히 성유물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용사께서는 아직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 나는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뭔가가 필요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해서 그런 걸까.
“원하신다면 한 번은 다시 개방해드리겠습니다. 당장이 아니어도 상관 없으니까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고의 안을 바라보았다. 게오르그는 투구를 들고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고,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프네는 당장 마도서를 들고 나가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아주 찬찬히 그들의 모습, 얼굴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뇨. 정말 괜찮습니다. 대신, 어려운 부탁 하나만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한에서는 얼마든지.”
교황이 눈썹을 치켜들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고, 교황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저는 그 말에 반대합니다만. 아예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합니다. 반드시.”
나는 내 말을 절대 굽히지 않겠다며 교황을 바라보았고, 교황은 내 표정을 바라보고는 코웃음을 치듯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실패한다면 어떡합니까. 뒤가 없습니다. 잘 생각해주세요, 용사님.”
“실패했을 때의 대안은 있습니다.”
물론, 그 대안을 교황에게 덥석 알려줄 수는 없었다. 아무리 교황이라고 한들, 그 지위나 명성과 내가 이 사람을 믿느냐는 별개의 일이었으니까.
“용사로서 실패한다는 말은 그다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요. 저는 성공해야만 합니다.”
“…하아.”
교황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제가 그 부탁을 들어드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그리 말하자, 교황은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교황은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용사님께서는 진심이시군요.”
“가장 좋은 방법이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입니다.”
“제 눈에는 위험한 방법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성공 가능성의 문제에서, 용사님은 정말로 이 방법이 가능성이 가장 높을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교황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나는 이 방법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예. 저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교황은 계속, 한동안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흔들리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이 대화에서 내가 감춰야 할 건 없었다.
“제가 부탁을 들어드리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계획은 그대로 진행합니다. 물론 그 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감당하셔야 할 테지만요.”
교황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조금은 강하게 나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교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묵주를 만지작거리다가, 창고를 보았다.
“용사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기는 하겠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용사님의 부탁이 지켜지리라는 약속을 하지는 못하겠군요.”
“그거면 됐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은 머리를 문지르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과 안드레 주교는 은근히 닮은 것 같습니다. 생각이 정상이 아니라는 점에서요.”
“제가 그분보다는 그래도 정상적이지 않을까요.”
나는 헛웃음을 내뱉고는 먼저 창고를 나서기 위해 계단에 발을 올리다가, 교황이 부르는 소리에 뒤로 돌아보았다.
“…부디 용사님의 선택에 후회가 없길 바랍니다.”
후회라.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더 후회하겠죠.”
나는 그리 말하고 창고를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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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는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는 장소? 마리안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처럼, 나침반의 바늘은 멈추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독특한 물건을 골랐네요.”
다프네는 마리안느의 나침반을 바라보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전 아직 성창의 능력조차 완전하게 개방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다른 무언가를 더 얻어가는 건 되려 퇴보하는 길이 되리라 생각해서….”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들어보며 대답했다.
“그게 성장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 텐데 말이야. 그걸 고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거 아니냐? 자기가 원하는 게 있는 곳이라. 너답지 않게 낭만적이군.”
게오르그는 옆구리에 투구를 끼고 오며 물었다. 자신이 얻어낸 성유물에 아주 만족하는 모양새였다. 마리안느는 반면, 게오르그의 질문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나침반이 도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바늘의 끝은 한 방향으로만 돌지 않고, 반시계방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시계방향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원하는 것이 있는 방향. 마리안느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침반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술에 취해 일로이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은 일로이의 소매 끝자락을 잡았다. 그녀가 원하던 건….
그때, 빙글빙글 돌던 나침반이 갑자기 멈춰 섰다. 나침반을 함께 바라보고 있던 게오르그와 다프네가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슬쩍 시선을 돌렸다. 방금까지 일로이가 서 있던, 창고의 출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바늘은 어딘가를 가리키며 째깍째깍 움찔거렸다.
“…어디를 가리키는 거지?”
게오르그가 그리 묻는 순간, 마리안느는 재빠르게 나침반을 감추었다. 다프네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 못한 듯, 어째서 나침반을 감추냐는 듯한 표정으로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그…뭐냐, 저것도 개인적인 일이니까, 너무 캐묻지는 않는 게 좋겠군.”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난지 눈치를 챈 게오르그가 수습에 나섰고, 다프네는 가늘게 뜬 눈으로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게오르그의 말이 괜히 일을 키운 것 같았다. 그러다가, 다프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도서를 툭툭 두드렸다.
“알겠어요. 나도 지금 얻어낸 이걸 조금이라도 많이 습득해야 하니까요.”
다프네는 그리고 재빨리 마도서를 들고 창고를 나섰다. 게오르그는 우물쭈물하는 마리안느를 보다가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나갔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바라보다가 겉옷의 주머니에 넣었다. 나침반의 바늘이 드르륵, 드르륵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드레에게서 이야기는 들었다.”
창고의 문가에 서 있던 교황이 마리안느를 보며 말했다.
“교황 성하.”
“이단심문관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라. 안드레 그놈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교황은 쯧, 하고 혀를 내찼다.
“뭐, 지금의 너를 본다면 누구라도 그런 소리를 하겠지만 말이다.”
교황은 그리 말하며 창고의 문을 열어주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는 것을 가만히 느끼며, 마리안느는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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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마리안느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녀의 베개 옆으로 놓인 해적의 나침반은 고정된 채 가만히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그곳이 일로이가 잠들어있는 침실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한동안 나침반의 바늘을 바라보다가, 성창을 집어 들었다.
“더.”
마리안느는 중얼거렸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훙.
성창이 방에서 휘둘러지며 바람을 갈랐다. 성법기와 오러는 성질이 달랐으니, 성창 위로 성법기를 덧씌울 수는 있었지만, 아직 성창을 개방하지는 못했다.
그를 따라잡으려면.
더 강해져야 했다. 일로이는 너무 빠르게, 너무 멀리 간 것 같았다.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용사니까. 그와 함께 있기 위해서는, 그를 따라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
마리안느는 성창을 내리고는 앉았다. 성창은 물론 대답이 없었다. 마리안느는 눈을 감으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이 이상으로 괜한 생각이 자신을 잡아먹게 둘 수는 없었다.
마리안느는 눈을 꾹 감고는 나침반을 뒤집었다. 저걸 보고 있다가는 괜히 잠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마리안느가 서서히 잠에 빠져들 때,
나침반의 바늘이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