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86화 (87/158)

Chapter 86 - 86. 과거에 두고 온 것 (1)

“저는 이번 재앙을 홀로 공략할 생각입니다.”

그때, 창고의 끝에서, 동료들이 일부러 듣지 못하게 마력까지 조금씩 섞어가면서 나는 교황에게 말했다. 당연히 내 말을 들은 교황의 표정은, 결코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용사님…, 그게 무슨 해괴한 말씀이십니까.”

“다섯 번째 재앙, 안개는 그 속에 들어있는 사람을 연료로 하여 살아 움직인다고 말씀드렸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교황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만, 그게 용사님께서 단독으로 토벌에 나선다는 것과는 무슨 관계입니까?”

“들어가는 사람의 마력이 강할수록, 안개의 생명력도 강해집니다. 그 사람이 안개의 마력 흡수 시도를 저지할 수 없다면 말이죠. 그리고, 그건 제가 어떻게 저지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사실상 안개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모두 안개와 일대일로 싸우는 겁니다.”

나는 그리 말하며 흘긋 파티원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파티원들은 자신이 고른 성유물을 들고 열심히 뜯어보고 있었다. 저게 성장에 모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저 녀석들은 강합니다. 하지만 재앙과 일대일로 대면해도 좋냐고 물어보면, 누구라도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그 짓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아르옌이랑 퀘노어 대공 둘뿐일 거다. 그중에 한 명만 안개에 집어넣으라고 하면 아르옌이겠지.

“그렇게 될 바에는, 저 혼자 안개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쪽이 훨씬 나을 겁니다.”

“대체 안개 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악몽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겁니까?”

교황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더 심하죠. 보여주는 게 아니라, 아예 실현될 겁니다. 실체를 갖추고서요.”

교황은 얼굴의 찡그림을 지우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교황의 표정은 냉철하기 그지없었다. 나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황은 그렇게 나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짤막하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부탁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대충 무엇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나올 부탁이 이것 말고 있을 리가.

“오늘 밤 제가 안개에 들어가고 나서, 아무도 안개에 들어올 수 없도록 통제해주세요. 특히, 제 동료들 말입니다. 함께 재앙을 공략하러 갈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시고, 그러니 기다리라는 말을 전해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무책임한 말. 나는 그리 말하고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교황에게 해준 말은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잃고 싶지 않다. 지키고 싶다. 손에 담은 것조차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말은 그만큼 무거웠다. 나는 그 욕심과 결심 사이에서 헤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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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은 놈.]”

새벽 두 시경. 모든 준비를 마치고 책상 위에 앉아있던 내 머릿속으로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검과는 물론 이번 계획을 공유했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재앙을 쓰러트리러 가는 것이니까.

“[네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난 일로이, 너를 욕할 수밖에 없겠구나. 저들을 두고 가면, 그 원망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는 거냐.]”

“안개는 달라. 단순히 내가 강하다고 해서 상대할 수 있는 재앙이 아니란 말이야. 거인 같은 건 서로의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는 재앙이지만, 안개는 그렇지 않잖아.”

성검은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작성하던 편지를 내려놓았다. 이건 게오르그에게 전하는 편지다. 돌아오지 못할 때를 대비한, 여러 가지 안배를 적어놓았다.

“[돌아오지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

“물론. 무조건 돌아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그리 말하며 문득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안개 속에서 영원히 길을 잃는다면 아마 아르옌이 성검을 회수해 사용하게 되겠지.

“[난 그런 놈에게 내 힘을 빌려줄 생각 없다. 다시는 날 누군가에게 넘긴다는 생각 하지 말거라, 일로이. 나는 네 검이다.]”

성검은 힘주어 말했다. 나는 검자루를 지그시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너를 지킬 거다. 알겠느냐.]”

성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너무나 단호하고, 굳은 목소리였다.

“[그러니 온 힘을 다해 안개와 맞서거라. 허튼 생각은 하지도 말고. 평소처럼 재앙을 쓰러트리고, 그 안에 갇혀버린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가거라.]”

“응. 알겠어.”

나는 성검에게 대답을 들려주고는 기감을 펼쳤다. 성국이 제공해준 숙소는 고요했다. 나는 다른 파티원의 기척을 확인했다. 게오르그는 일찌감치 잠든 것 같았고, 다프네는 새로 얻은 마도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리안느의 기척만이 뒤척거리고 있었다. 마리안느가 잠들 때를 기다렸다가 나가면 될 것 같았다.

“가자.”

마리안느가 잠들었다. 나는 미리 열어놓은 창문에 발을 걸치며 일어났다. 밤공기가 차다. 나는 창틀을 쥐고 숙소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꼭 좀도둑 같구나.]”

“세상에 어떤 좀도둑이 저기서 뛰어내리냐?”

나는 기척을 감추고 교황청으로 걸어갔다. 재앙의 존재감은 겨울의 한기보다 선명했다. 나는 교황청의 뒤편에서 성기사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교황을 마주했다.

“제가 교황 성하를 기다리게 해버렸군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용사께서 안개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통제를 시작해야 하니까요.”

밤의 안개는 더욱 두려웠다. 교황청의 뒤에서 세상을 가로막는 벽이 되어버린 안개. 마치 세상의 끝을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 뒤로 넘어가면 끝없이 추락하는 낭떠러지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안개는 제자리에서 꿈틀거리며 나를 환영했다.

“물론 말씀드렸다시피, 언제까지 막고 있을 수만은 없을 겁니다. 말씀하셨다시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밖에서 알 수가 없으니까요. 설령 용사님께서 이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불안감이 증가하면 구조 인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일주일은 기다려주시면 좋겠군요.”

최악의 경우는, 놈을 거의 쓰러트렸는데 사람이 투입되어 놈에게 추가적인 힘을 주는 것이겠군. 나는 그리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용사님께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나는 교황의 말을 뒤로하고 안개의 앞에 다가가 섰다. 차갑고, 추웠다. 나는 다시금 목적을 되뇌었다. 안개를 쓰러트리고, 안개 속에 억류된 사람들을 구해낸다.

“[안개 속으로 가게 되면, 내가 네게 말을 걸기 힘들어질 거다. 마력 작용이 이상한 곳이니까. 네 정신력으로 온전하게 버텨내는 방법밖에는 없어.]”

안개는 악몽을 구현해낸다. 가장 마주하기 싫은 과거가 될 수도 있고, 가장 그리운 기억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수도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걸 불러낼 수도 있고, 싫어하는 대상을 마주하게 할 수도 있다.

안개는 그렇게 누군가의 악몽을 구현해내는 데에 마력을 사용한다. 안개 속의 사람이 악몽에 굴복하면, 안개는 그때부터 굴복시킨 사람의 마력을 빨아먹기 시작한다.

“…악몽을 더 깊이 보여줄수록 안개 본신의 힘을 이용해야 하지. 그러니까,”

악몽과 계속 싸우고 싸우다 보면 언젠가는 안개의 핵심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일렁이는 안개의 표면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르옌은 그때, 자신의 과거와 마주했었지. 아르옌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람, 칼라의 이야기도 그때 나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르옌이 보았던 건 가정이었다. 그때 자신이 칼라를 구했더라면, 마을이 이상하다며 보고하러 가지 않고 칼라와 함께 남았더라면.

그리고 아르옌이 본 건 미래였다. 임무를 완수하고, 질릴 정도로 돈을 많이 벌어 용병 일을 그만두고 칼라와 함께 살아가는 미래.

아르옌이 안개를 부정하는 데는 안개 속의 시간으로 한 달. 안개 밖의 시간으로는 일주일이 걸렸다. 아르옌은 그리고 결국 칼라를 살해하면서 안개를 격파할 수 있었다.

“그런 기분 더러운 짓은 그리 당하고 싶지 않은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로이, 기억해라.]”

문득, 성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너다. 너를 잃지 마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지막으로 뒤로 돌아보았다. 안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안개는 내 손바닥에 닿았고, 손끝이 차가운 감각에 휘감겼다. 나는 안개가 손에서부터 천천히 날 먹어 치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수증기로 만들어진 옷감처럼, 안개는 내 몸을 감싸고 나는 안개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기분이군.”

나는 눈을 깜박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온 세상이 뿌연 연기 속에 있었다. 감각이 희미하지는 않았다 마력은 잘 돌아가고 있었고, 몸의 감각도 선명했다. 마치 이건 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아 더 기분이 나빴다.

“이런 감각에서 나쁜 기억을 마주하게 되면 짜증이 날 수밖에 없겠네.”

혹은 굴복하거나.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성검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검을 뽑아 들었다. 너울과 성검의 감각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머리 위로 자연스럽게 면류관의 훈륜이 떠오른다. 나는 만전의 상태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건 내가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나는 어느새 왕도 외곽의 숲에 와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왼손에 쥐고 있던 너울은 어느새 사라졌다. 겨울이 아닌, 여름의 후덥지근한 숲의 공기. 면류관을 발동했을 때의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오른손에 성검을 든 채로, 덩그러니 숲속에 떨어져 있었다.

“약하네.”

체내의 마력도 3분의 1 정도는 될 정도로 준 것 같았고, 근력도 약해진 것 같았다. 마력 한 번 빨아먹겠다고 참 지극정성이었다. 나는 성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나저나, 무슨 기억을 보여주려는 건지.”

그리고, 나는 머지않아 안개가 무엇을 보여주려는 지 알아차렸다.

“…대체 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냐?”

내 앞을 막아선 건, 무식하게 커다란 잿빛곰 한 마리였다. 평소에 숲에서 마주하던 것보다 더 커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곰은 흰자위만이 보이는 눈을 내게로 향하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성검을 가볍게 휙휙 돌리며 곰을 마주했다.

그래, 그랬지.

이 세상에 처음으로 떨어지고 나서, 마물을 마주했을 때의 공포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원초적인 피식자로서의 공포. 지금의 나는 그때와 같은 몸이었다. 성검도 개방하지 않고, 면류관도 없다. 가진 거라고는 오로지 일로이라는 사람의 몸에 밴 습관.

“…뭐, 지금은 조금 다르려나.”

그렇게까지 두렵지는 않았다. 곰은 그때 기억하는 것보다 흉포하고 강대했지만, 놈을 상대하는 나 또한 그때보다 강해졌으니까.

곰이 앞발을 내밀며 달려들었다. 나는 그것이 달려들게 내버려 두었다. 눈은 앞발을 포착하고 있었다. 몸은 저것에 맞으면 죽는다고, 피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피하지 않고 성검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피하지 않는다.

성검이 말했듯, 지금의 나로, 부딪치며 나아간다.

검끝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곰의 활짝 열린 어깨를 포착하고 그대로 성검을 끌어내렸고, 내가 만들어낸 검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깔끔한 현월의 궤적을 그리며 잿빛곰의 몸을 반으로 베어 갈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검 자체의 성능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곰의 시체 아래로는 피로 작은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찝찝하게도, 몸에 묻은 피까지 감각이 선명했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대체 무엇까지 보여주려는 거야?”

나는 투덜거리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안개가 보여주는 광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어둑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깊은 숲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반대편으로 걸어가봤자 왕도는 나오지 않고 같은 숲만이 계속 나올 뿐이겠지.

좋아.

나는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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