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87화 (88/158)

Chapter 87 - 87. 과거에 두고 온 것 (2)

열두 살.

마리안느가 이단심문관이 된 나이였다. 마리안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성법기를 개화했다. 이단심문관을 길러내는 과정은 꽤 혹독하다. 여느 군인, 기사를 길러내는 것보다도 훨씬. 그 모든 가혹한 훈련을, 마리안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견뎠다. 애초에, 그녀는 가혹하다는 말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독한 아이입니다.”

마리안느를 지켜보던 다른 이단심문관이 말했다. 이단심문관의 총괄자, 안드레 자빈은 몰살당한 이단들의 앞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마리안느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그들이 찾아낸 이단은 사실상 무장 독립단체였다. 사람을 죽이고, 지역을 무단 점거하며 새로운 신앙,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겠다며 떠들어대는 사이비에 가까운 집단.

“독한 건지, 그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드레 주교의 옆을 마리안느가 스치고 지나갔다. 소녀의 몸은 상처로 가득했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옷은 다 찢어진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어쩌다가 데려온 아이라고 했었죠? 마리안느 말입니다.”

“옛날에 그 일 기억나나? 성국의 고아원에서 애들 서른 명을 한꺼번에 어디론가 팔아넘기려고 하다가 덜미를 잡혔던 사건 말이야. 아마 네가 이단심문관이 되기 전의 일이었을 거야.”

주교는 그리 말하며 담배를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늘 그렇듯 불을 밝혀 담뱃불을 붙이고, 길게 빨아들이고 내뱉었다.

“예, 기억합니다. 그게 한 오 년 전의 일이었나요? 그때 구출된 아이입니까?”

“현장에 내가 있었지. 다른 아이들이 모두 공포에 질려 울거나 떨고 있었을 때, 마리안느, 저 아이 혼자 아무렇지도 않게 앉아있었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마리안느도 물론 알고 있었을 건데 말이야.”

안드레 주교의 눈에 띈 마리안느는 그날부로 성국의 특수한 교육기관에 맡겨지게 된다. 오직 성국만을 위해 일하고, 성국의 그림자에서 청교회를 지키기 위해 봉사하는 이들의 모임. 이단심문관을 길러내는 교육기관.

“…저 아이같은 경우로 들어오게 된 이단심문관들이 꽤 있죠?”

“연고 없는 아이들. 뒷골목에서 희망 없이 좀도둑질이나 하며 살아가는 아이들. 삶에 더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을 모아서 만들어진 집단이다.”

주교는 입에서 담배를 떼어내며 연기를 뿜어냈다.

“이상할 것도 없잖나.”

안드레 주교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다시 걸어오는 마리안느를 바라보았다. 가장 간단한 응급처치만을 받고, 옷을 갈아입은 후 돌아오는 모습이었다. 전혀, 열두 살짜리 소녀가 지을 표정도 아니었고 모습도 아니었다. 마리안느는 무감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 끝났습니다, 주교님.”

“그래, 수고가 많았다, 마리안느. 뒷정리는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이만 퇴근하지.”

안드레 주교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리안느는 바로 고개를 돌려 걸어갔다. 오늘 마리안느는 격렬하게 저항하는 무장한 이단 다섯을 죽였다. 다섯. 마리안느는 그 수를 헤아려보았다. 수에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사람을 죽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언젠가부터 그건 일이 되었고, 습관이 되었다.

“네가 저들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저들은 오늘 죽은 이들의 열 배가 넘는 사람들을 죽였을 거다. 그러면서 청교도에 감히 반기를 들고 대들었겠지.”

주교는 그렇게 말했었다. 위로였을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자신은 청교회에서 명령하는 대로 사람을 죽였을 거다. 마리안느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그녀의 뜻이라는 걸 가진 적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깊은 신앙심도, 이단에 대한 증오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자신의 목숨에 갖던 애착도 그리 크지 않았다. 마리안느는 그런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마리안느는 계속 속으로 자신을 죽여갔다.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칼끝이 그녀의 목을 찔러 죽일 날만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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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 밝았다. 마리안느는 어둑어둑한 침실에 홀로 앉아있었다. 푸르게 변한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안느는 묵주를 집으려다가, 이내 손을 내리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제 잠들기 전에 뒤집어놓은 나침반이 있었다. 마리안느는 망설임 가득한 손짓으로 나침반을 향해 손을 뻗었다.

“….”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집어 들고는 뒤집어보았다. 바늘은 째깍, 째깍 진자운동을 계속하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바늘의 끝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나침반은 자꾸 불안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감을 펼쳤다.

“…밖에 나가 있는 겁니까.”

일로이는 방에 없었다. 마리안느는 눈을 깜박거리며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자꾸 바늘이 움직이는 걸로 보아, 아침 운동이라도 하는 걸까. 마리안느는 한동안 바늘을 바라보다가, 이내 품에 나침반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큰 이상이 없지 않은 이상, 용사 파티는 일로이의 방에 아침마다 모였다. 마리안느는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일로이의 방문 앞에 섰다. 일로이의 기척은 여전히 방에 없었다. 머뭇거리는 마리안느의 뒤로, 다프네가 걸어왔다.

“무슨 일인가요, 마리안느? 일로이가 문을 아직 안 열어주고 있나요?”

마리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 방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리안느의 대답에, 다프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일로이가? 다프네는 조심스럽게 문고리에 손을 올려 돌렸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로이의 방에 들어갔다.

“뭐야, 다들 일찍 왔군.”

곧이어 문가에서 게오르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안느와 다프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게오르그 또한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일로이의 방을 들여다보았다.

“엥? 일로이 녀석은 어디 있는 거야?”

“우리도 잘 모르겠어요. 아침에 급하게 교황청에 가기라도 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언질 하나 없이 갑자기 자리를 비울 리가 없는데.”

다프네의 말에, 마리안느는 품속의 나침반을 꾹 쥐어보았다.

“일단 앉아서 기다려보든가 할까. 파티장이 회의에 늦은 건 제대로 추궁해보자고.”

게오르그가 농담과 함께 팔짱을 끼었다. 그들은 어딘가 불안함이 깃든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일로이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일로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중간중간 말을 꺼내던 다프네는 잠잠해졌고, 게오르그마저 어딘가 불안한 눈빛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늦군.”

게오르그의 표정이 무거웠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그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마리안느는 나침반을 꺼내 쥐었다. 바늘은 여전히 고정되지 않고 진자처럼 이리저리 방황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교황청 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할 수는 없을 거 같아.”

게오르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뒤를 따라 마리안느와 다프네가 일어났다.

성국의 거리는 평소와 같았다. 마리안느는 수런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억누르며 게오르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도착한 교황청의 앞에서, 그들은 예상치 못한 인물과 대면하게 되었다.

“교황 성하…?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어떻게….”

“용사께서는 현재 재앙…. 안개와 싸우고 계십니다.”

교황이 내뱉은 말에, 일행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건… 어째서….”

게오르그가 힘겹게 말을 뱉어내자, 교황이 한숨을 내쉬었다.

“용사님은 이번 재앙을 공략할 때 혼자 가는 편이 좋을 거라 판단했었죠. 여러분들이 함께 안개 안으로 들어간다면 공략할 때 오히려 더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게오르그가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 녀석이…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까.”

“제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용사님을 말릴 수도 없었고요. 용사님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재앙과는 대면한 적도 없는 제가 어떻게 말씀드릴 방법은 없었습니다.”

게오르그는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벅벅 긁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뒤에서, 다프네가 사색이 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도 들어가겠어요. 저대로 일로이가 홀로 재앙과 싸우게 둘 수는 없어요.”

“안 됩니다.”

교황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다프네가 이어 말을 꺼내기도 전, 교황이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

“용사님의 부탁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파티장의 명령이 되겠군요. 용사님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도 안개에 들이지 말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교황의 옆으로 성기사단이 정렬했다. 마치 이 뒤로는 갈 수 없다고 말하는 벽처럼.

“전 용사님의 부탁을 존중했습니다. 용사님께서도 저라는 사람을 믿고 이리 해 달라고 부탁한 것일 테니까요.”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 성실한 녀석이, 언질 하나 남기지 않고 이런 짓을 저지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게오르그가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사님꼐서는 자세한 사정까지 일일이 제게 말해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여러분과 함께 공략에 나설 수 없는 이유를 말씀하셨을 뿐이죠.”

부디 자신을 믿고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마리안느의 귓가에 교황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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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락. 바닥에 깔린 풀이 발에 밟히며 바스러지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성검의 끝을 매만지며 발걸음을 옮기다가,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참신한 새끼들일세, 이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생각이 들 정도로 깊숙하게 이어지던 숲은 어느덧 익숙한 지형으로 바뀌었다. 이 지형,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바라보았다. 이 숲, 드리운 그늘,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랜만이야.”

내 눈앞에 떡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어두운 동굴. 나는 동굴로 다가가지 않고 멍하니 그 입구를 바라보았다. 개미굴은 마치 들어오라며 나를 유혹하는 것 같다.

“…들어가야겠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앞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내 어깨 위로 누군가의 손이 얹혔다.

“형씨,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나는 뒤로 돌아보았다. 개미굴에 함께 들어갔었던 세 모험가. 나는 내게 다가오는 모험가 대장, 레아를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용사님 아닌가요? 이렇게 가까이서 뵈는 건 처음이에요!”

나는 내 손을 잡고는 열심히 악수하는 모험가들을 바라보았다. 감각이 생경했다. 꼭, 정말 그때로 돌아가 그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손을 쥐는 레아의 손, 마력의 흐름, 내 눈이 받아들이는 정보. 그 모든 것이 전부, 현실이었다.

어느덧, 나는 개미굴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자, 더 나아가 보죠. 짧은 시간이겠지만, 잘 부탁합니다, 용사님!”

모험가들이 앞장섰다. 나는 랜턴으로 밝혀지는 개미굴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생생하다. 기분이 다 나쁠 정도로. 나는 개미굴의 벽을 손으로 매만져보고, 그 축축하면서도 서늘한 공기를 느꼈다. 내가 펼치는 기감에는 개미굴을 돌아다니는 온갖 마물이 느껴졌다. 그떄처럼 모험가들은 나를 능숙하게 인도했다. 나는 그때 약속했던 것처럼 나타나는 마물들을 쓰러트렸고, 그때처럼 모험가들은 내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그게, 우리 리더가 사실 용사님의 팬이거든요. 용사님께서 이번 일에 한 번만 동행해주면 리더가 정말 좋아할 거 같아서….”

“야, 입 다물어. 그만해.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칵.”

모험가들의 만담도, 그때와 같다. 나는 모험가들의 대화를 들으며 잠시 그리운 감상에 젖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랬으면 안 됐는데.

“내가 산란기라서 말이야, 먹이가 좀 많이 필요하거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는 인간의 상반신을 단 거대한 거미가 서 있었다. 그리고 거미의 발아래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세 모험가가 있었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남자 모험가, 하비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어올리며 입을 벙긋거렸다.

“용사님… 어서 도망….”

콰직.

그리고 거미의 발이 하비의 머리를 찍어 터뜨려버렸다. 내 옷에 하비의 피가 튀었다.

“많이 다르지?”

거미, 아라그리드의 목소리가 비웃듯 그렇게 말했다. 나는 발아래의 모험가들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이건 환상이다. 안개가 내게 보여주는 비현실이다. 저 사람들은 멀쩡하게 아직 살아서 왕도의 모험가로 활동하고 있을 거다.

“내가 그때 배가 고팠더라면, 먹이가 필요했더라면, 너는 이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까?”

아라그리드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실이 아니다. 나는 그리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나는 무릎을 꿇고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용사님….”

레아가 고개를 들며 나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서 묻는 피의 감각도, 온기도 너무나 선명하다. 레아의 손을 잡는 내 손이 떨렸다. 아냐. 현실이 아니다. 그녀는 내가 그때 구할 수 있었다.

“네가 운이 좋았을 뿐이 아니었을까? 그때, 마침 나는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았으니까. 먹이가 많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그들을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던 것이었으니까.”

아라그리드가 키득거렸다.

“아니면 네가 나를 쓰러트리는 게 늦어서 그들이 새끼 거미에게 붙잡혀, 천천히 녹아버리게 두었을 수도 있지.”

현실이 아니다. 이건, 안개가 내 정신을 흐트러뜨리게 두는 환상일 뿐이다. 나는 그리 머릿속으로 되뇌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성검을 뽑아 들었다. 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정신을 조금 흐트러뜨리는 게 목적이었다면, 칭찬해주는 수밖에 없겠군. 넌 성공했다.

“과거에 가정을 자꾸 붙이는 걸 뭐라고 하는 줄 아냐, 안개?”

“뭔데?”

아라그리드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는 서늘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승리라고 한다. 다른 말로는,”

나는 신형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자위라고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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