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8 - 88. 과거에 두고 온 것 (3)
게오르그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아는 용사라면, 일로이라면, 결코 동료들을 두고 그런 독단적인 행동을 저지를 녀석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러면서 어느 정도는 교황의 말을 납득하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자신들이 함께 가겠다고 설득했으면, 일로이는 마지못해 그들의 말을 들어줬을 테지. 일로이가 원하는 바와는 정반대로.
“빌어먹을.”
게오르그가 혀를 찼다. 세 번째 재앙, 크라켄을 상대할 때 일로이는 자신이 생각해낸 최적의 방안을 동료들과 공유하러 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게오르그는 머리를 짚었다.
“어리석은 새끼.”
게오르그는 교황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일로이가 안개와 홀로 맞서려 들어갔을 때, 교황이 자신에게 냉정하게 들려주던 충고를.
‘그 녀석이, 우리를 믿지 못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죠. 아니, 여러분을 믿지 못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게오르그는 교황의 태연한 말에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동료입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믿고 등을 맡겨야 할 동료를 믿지 못하면, 누구를 믿는다는 말입니까. 일로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마치 자신은 처음부터 용사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는 듯 말하는군요.’
게오르그의 얼굴이 굳었다.
‘당신은 그가 처음으로 용사가 되었을 때, 얼마나 그를 신뢰하고 있었습니까?’
용사를 믿지 못했다. 그가 하는 말에 따라도 될지,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놈팽이가, 고작 검 하나를 뽑았다고 용사라니.
“…그건,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겠지. 일로이 그조차도.”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게오르그나 다른 파티원이 용사를 신뢰할 수 없었던 만큼, 용사도 동료들을 신뢰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겠지. 이건 그 업보였다. 용사, 일로이는 자신에게 쌓인 의문부호와 불신을 해결하는 모습들을 여러 번이나 보여줬지만, 과연 동료들은 일로이가 갖게 된 의문을 얼마나 해소해줬을까.
나는, 용사의 곁에 있으면서 그에게 얼마나 믿음을 주었나.
게오르그는 이를 악물고 일로이의 방으로 달려갔다. 문을 벌컥 열자, 다프네와 마리안느가 고개를 숙이고 방 안에 앉아있었다. 게오르그는 그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프네가 그때 고개를 계속 숙인 채로 책상을 가리켰다. 일로이의 책상 위에는 한 편지 봉투가 놓여있었다. 게오르그는 다가가 그 봉투의 겉면을 보았다.
게오르그에게.
그 말을 보고는 게오르그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어 보았다. 일로이의 정갈한 글씨체로, 편지는 오목조목 필요한 말만이 적혀있었다.
이 편지를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더라. 난 죽으러 가는 게 아니야. 너희와 함께 가지 않는 게 너희를 믿지 못해서도 아니고. 하지만 재앙과의 싸움은 언제나 불확실해. 결국 내가 돌아올 수 없게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 그에 대비한 몇 가지 계책을 말해주려고 한다.
“…너는 대체 어디까지 보고 있었던 거냐.”
게오르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계책을 알고 있어야 하니 안개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로 일로이는 편지를 끝맺었다. 게오르그는 한숨과 함께 편지를 접었다. 기다려야 한다. 자신이 일로이를 찾겠다고 무작정 안개로 들어간다면 그의 신뢰를 배반하는 꼴이 되어버린다.
“교활하기는.”
게오르그는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돌아오면 제대로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나는 일로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거다.”
게오르그의 말에, 다프네와 마리안느가 고개를 들었다. 게오르그는 편지를 품에 넣으며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설령 들어간다고 해도 말이야. 나는 그 녀석을 믿고 성공하기를 기다릴 거다.”
다프네는 차갑게 식어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일로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그 생각으로 여태 강해지고 있었던 건데, 정작 지금처럼 중요한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네요.”
다프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잘 모르겠어요, 저는. 지금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말이에요.”
마리안느는 조용했다. 손에 쥔 나침반이 돌아가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게오르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방을 나섰고, 다프네와 마리안느만이 일로이의 방에 남았다. 마리안느가 나침반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째깍. 째깍.
무엇을 해야 하나. 마리안느는 가만히 나침반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다프네가 옆에서 지쳐 잠에 들 때까지, 마리안느는 멍하니 나침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로이는 안개 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어떤 적과 싸우고 있을까. 마리안느는 나침반의 유리를 쓸었다.
“…용사님.”
아니, 일로이. 마리안느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일로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안개 안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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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새끼, 그러니까, 아라그리드는 내가 알고 있던 그 거미 마물보다 훨씬 강했다. 내 반응은 빨랐지만, 이따금 내 강화되지 않은 몸을 믿고 설치다가 봉변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콰과광-!!
저놈의 전력을 다한 돌진을 막아낸 지금처럼 말이다.
“진짜 어리석구나. 정말 그걸 지금 그 몸 상태에서 정면으로 받아낼 생각이었다니.”
나는 함몰된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돌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흙먼지가 바닥에서 피어올랐다. 찢어진 이마를 따라 피가 주륵 흘러내렸고, 들이마시는 공기가 거칠었다. 거미는 눈을 도르륵, 도르륵 굴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물렀다.
“어때, 아프지? 진짜 같지? 너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도 진짜고, 네가 겪는 고통도 진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아라그리드가 앞발 하나를 하비의 시체 위로 올려놓았다.
“여기서 이 녀석들이 느끼는 고통도, 진짜라는 말이야. 비록 네게는 거짓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곳에 있는, 이 모험가들은 아니라는 말이지.”
나는 눈을 들어 거미를 바라보았다. 숨을 내쉰다. 거미는 내 달라진 반응에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달각, 달각. 거미는 다리를 움직이며 나를 조롱하듯 움직였다.
“사람을 지키겠다는 용사가 되어서 말이지. 우습구나.”
나는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숨을 내쉬었다. 자꾸 내 눈에는 바닥에 쓰러져있는 레아가 들어왔지만, 나는 애써 그를 못 본 체했다. 사람의 기억에서 너무 동떨어진 일을 불러낸다면, 누구나 그 위화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안개는 머릿속에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 혹은 두려워했던 일을 끄집어낸다. 언젠가 그 사람이 무너질 때까지.
“너는 우습지 않니?”
나는 아라그리드의 말을 무시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거미는 얼굴에 섬뜩한 미소를 띤 채로 달려드는 나를 반겼다. 내가 점점 이성을 잃어간다고 생각하고 있기라도 한 걸까? 나는 거미가 날리는 공격을 피하면서 동굴의 벽을 차고 뛰어올랐다.
“성검이 각성해주지 않으니 이렇게 힘들게 나를 상대해야 하지?”
검을 그대로 떨어트린다. 아라그리드는 코웃음을 치며 몸을 돌려세웠다. 파고들 틈이 생겼다. 나는 땅을 박차고 아라그리드의 몸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아라그리드는 거미줄을 뽑아내며 내 움직임을 제한하려 하고, 앞발을 휘둘렀다.
“네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고작 몸뚱아리 하나 강화하는 게 끝인가 보군.”
나는 그리 말하며 아라그리드의 공격을 모조리 회피하고, 막아내고 흘려냈다. 반격은 시도하기도 전에 무산되었고, 억지로 힘으로 누르려 다가오면 물러섰다. 그리고, 아라그리드의 몸에도 상처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내 칼이 마침내 놈의 다리 하나를 잘라내자, 아라그리드는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제법이네, 용사.”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그리 느꼈다. 내가 입는 상처는 이제 없었고, 피는 아라그리드만이 흘리고 있었다. 뭐,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 영 찝찝하긴 했다. 아라그리드는 다시 다리를 딸각거리며 움직여 바닥에 쓰러진 세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자, 그러니까, 이런 건 어떠니?”
거미는 다리로 레아를 쿡 찌르더니 손으로 집어 들었다. 레아는 힘없이 축 처졌다. 거미는 딸각거리며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거미를 올려다보았다.
“불리해지니 추해지네. 적어도 거인은 묵직한 맛이라도 있었지. 말이 많으면 위엄이 없어.”
내가 헛웃음과 함께 말하자, 거미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래서, 나보고 뭐 어쩌라고?”
“내 손에 들린 이 여자를 베어라. 그럼 나도 군말 없이 널 보내주도록 하지.”
나는 성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오랜만에 두 손으로 잡아보는 성검이었다. 무너지지 않을 거다. 저 녀석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도 않을 거다. 나는 거미를 향해 검끝을 세우며 피식, 웃음을 뱉어냈다. 아라그리드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기도 전, 나는 그 팔다리와 몸통을 모조르 베어내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레아를, 나는 두 손으로 받아냈다.
“…용사님.”
레아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내게 손을 올렸고, 나는 그 손을 잡아주었다. 내게 온몸이 베인 아라그리드는 바닥에 널브러져 기괴한 웃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나는 거미를 바라보며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안개가 내게 바라는 건, 결국 그 말에 따라 레아를 베어버리는 것이었겠지.
“군말 없이 보내줄 거면, 그냥 지금 이 자리에서 뒤져서 사라지지 그래.”
“그래. 그렇군. 역시 네놈은, 뼛속까지 약았지만 무른 놈이야.”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러냐. 나는 웃었다. 방금까지 한순간만을 노리고 전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으면서.
“다른 동료들은….”
내 품의 레아는 그리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레아를 내려다보았다. 안개 속에서 구현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안개가 아니다. 내 기억 속의 인물을, 가장 실제와 가까운 모습으로 조형해놓은 것에 가깝다.
그러니, 실제가 아니다. 지금 저 죽어버린 모험가들도, 이 상처투성이의 레아도.
나는 레아를 내려놓았다. 레아는 이미 죽어버린 동료들을 향해 걸어가 무릎을 꿇고 울었다. 나는 그녀가 울음을 전부 토해낼 때까지 옆에 서서 기다렸다. 나는 레아와 함께 동굴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내 옆에서 걸어가고 있던 레아가 사라지고 없다. 나는 한동안 비어버린 내 옆자리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거미는 질렸다.”
빛이 동굴의 끝자락을 잠식했다.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거 내와라, 이제.”
다음으로는 대체 뭐가 나올까? 청문회? 아니면, 내 첫 출정식?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바람이 훅, 좁은 개미굴의 입구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바람은 소금기와 물비린내를 머금었다. 나는 눈을 뜨지 않아도 지금 안개가 나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빌어먹을.”
자신만만하게 다른 거 내오라 하지 말걸.
나는 동굴 밖으로 걸어 내려오며 바삐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마치 대규모 해상전이라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은 움직임들이었다. 병사들은 각자 무기나 물자를 짊어지고 바삐 움직였고, 폭약과 포탄이 수레에 실려 날라지고 있었다.
“야! 저거 거기 싣지 마!”
“밧줄 더 가져와! 배 안에 있는 거 다 묶어놔야 해!”
나는 저 대화를 모른다. 이건, 아마도 이 몸의 주인, 일로이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기억의 파편.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우중충했고, 날씨는 봄의 한중간이라 따뜻했다. 나는 그리고, 내 기억과는 전혀 다른 항구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며 숨을 들이켰다.
폐허가 아닌 바크틴스.
생선의 비린내가 가득하고, 거친 얼굴의 뱃사람들이 바삐 돌아다니는 곳. 나는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내가 나타난 이유는 아마 하나.
“어서 가요. 계속 멀뚱하게 서 있지 말고.”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내가 아는 얼굴들이 또 있었다.
냉랭한 얼굴의 성녀, 아이시스. 무표정한 용병, 아르옌,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마법사, 넬라, 그리고 커다란 방패를 등에 매고 있는 게오르그까지. 나는 일로이의 옛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시스가 다시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시가 급해요. 크라켄은 지금도 이곳, 바크틴스로 다가오고 있을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