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주인공을 추방한 용사가 되었다-89화 (90/158)

Chapter 89 - 89. 과거에 두고 온 것 (4)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출항을 앞둔 배들이 홋줄과 닻을 올렸다. 바크틴스라는 항구 도시는 이미 요새화 되어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카이로스 왕국 전력의 반. 사실상 국경, 변경 지대, 그리고 왕궁을 지키는 병력을 제외한 모든 군사를 쏟아부은 거다.

크라켄 하나를 막아내기 위해서.

작전 회의는 무겁다고는 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재앙을 직접 접해보지 않은 이들이다. 이렇게까지 많은 군사를 동원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애초에 그리 긴장하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있는 기사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 질투심, 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지휘봉을 잡은 제독을 노려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이 재앙이라는 놈을 상대할 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사실은, 놈들이 어디 있는지는 제깍제깍 알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작전의 지휘를 맡은 해군의 제독, 그러니까, 총사령관이 그리 말했다. 사령관은 해도를 펼쳐 우리에게 보여주며 지휘봉으로 해협의 지리를 짚어주었다.

“이 해로는 빙하에 침식된 지형이다. 바로 이 복잡하고 좁은 해로를 지나 본토로 들어오는 입구가 바크틴스가 시작되는 곳이지.”

수십 개의 작은 섬, 그리고 연안치고는 깊은 수심. 승부처가 될 수도 있고, 제 무덤을 파버리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 지형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싸워야 한다며 주장한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정찰 정보에 따르면, 크라켄은 아직 먼바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듯하다. 마물의 군세를 모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같다고 하는데… 어떻게 될지는 더 봐야 알 수 있겠지.”

총사령관은 지휘봉으로 해도를 탁탁 두드렸다.

“놈은 거대하다. 바다에 비치는 그림자는 작은 섬보다도 훨씬 크다고 하더군. 아마 아슬아슬하게 해로에 진입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다른 높은 사람들. 의구심이 깃든 눈초리로 바라보는 기사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분위기는 개판 일보 직전이었다. 게오르그는 어울리지 않는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고, 아르옌은 증오심이 깃든 눈으로 협조성이 떨어지는 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 이 괴물을 ‘어떻게’ 상대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다. 그와 관련해서 의견을 수렴해보고자 하는데, 발언할 사람은 손을 들고 말하도록.”

총사령관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나저나, 정말 이렇게까지 대규모의 작전을 준비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건가? 그래봤자 그냥 크기만 무식하게 큰 마물일 뿐이지 않나.”

총사령관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중늙은이 하나가 말했다. 아마 육군 사령관급 정도 되는 사람. 총기사단장 정도 되겠지. 대충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별것도 아닌 일 가지고, 괜히 규모를 크게 보이게 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하는 거겠지. 정치적으로 밀어주려는 속셈이 아니냐고.

“자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면 그냥 나가는 게 좋을 것 같군,”

총사령관은 기분이 나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아니면 저 ‘용사님’이 해결하게 두면 되지 않겠나? 저 이마에 피도 안 마른 것 같은 놈이, 우리와 동등한 발언 권한을 가지고 여기 떡하니 있다는 것도 웃기는 일인데.”

나는 가만히 팔짱을 끼고 중늙은이의 말을 무시했다. 저기 심력을 쏟아봤자 좋을 일은 없다. 아마 원작의 일로이는 대꾸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총사령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민들은 모두 대피했습니까?”

안개는 내게 어떤 좌절감을 안겨주려는 걸까. 내가 무력했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싶어서일까? 지금의 내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관련이 없는 걸까.

“최대한 늦게 피난을 시작하려고 생각한다. 주민들에게 괜한 불안감을 심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다른 곳으로 말이 퍼져나가게 할 수도 있고 말이지.”

총사령관의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안 됩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주민들을 내보낼 필요가 있어요. 최대한 이 도시에서 멀리.”

“허, 우리 용사님은 용사님답게 사람부터 챙기시는군.”

늙은이들이 비웃는 소리. 사람을 죽이는 싸움에 익숙해져, 사람을 지키는 싸움에 무감각해진 이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금 나를 비꼬며 바라보는 이들은 크라켄과의 전투에서 대부분 죽는다. 안타까워해야 할지.

“지금 피난을 시작해도 늦습니다. 크라켄이 만에 하나 바크틴스에 상륙하기라도 하면 막심한 피해를 감당해야 할 겁니다. 재앙이 어떤 존재인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잖아요.”

“그럼 용사님께서 크라켄이 육지로 오지 못하게 막아버리면 되는 일 아닌가.”

킬킬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라고 대답이라도 해보시게, 제독, 아니, 총사령관님. 용사는 저렇게 주장하는데?”

발언권도, 일로이에게는 사실상 허울 좋은 껍데기인 듯했다. 권한과 상징성만을 잔뜩 떠안은 채 떠밀려 내려온 외부인. 제독과 사령관들의 눈에는 내가 그리 비쳤을 거다. 총사령관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용사님의 의견을 수렴하겠습니다. 혹시나 하는 상황보다야 그게 나을 테니.”

“참, 웃기는군. 둘이 짝짜꿍이 아주 잘 맞아?”

총기사단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 불온한 분위기 속에서, 크라켄을 무찌르기 위한 회의는 계속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렇다할 대응책은 의논하지도 못하고, 번번이 의견 충돌로 이어지며 끝나버렸다.

정말 답도 없는 형국이었군.

원작의 용사 파티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거 같았다. 일로이가 왜 독선적이고 날카롭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알 것 같았고. 나는 개판이 되어버린 회의장을 바라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한숨이 대놓고 새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웃기네, 그 총기사단장이라는 늙다리.”

용사 파티에게 마련된 막사로 돌아가는 길, 넬라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녀 특유의 새빨간 머리가 바닷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하는 말마다 토 달고, 비웃고. 꼴 보기 싫은 놈이었어. 안 그래, 용사님?”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주민들의 피난이 성사된 것만으로 다행인 회의였으니까. 알맹이라고는 없이 뒷방 늙은이들의 토론만이 이어졌었다. 나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솟아오르는 울화를 억눌렀어야 했다.

“그 아저씨들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지. 아직 용사로서 보여준 건 아무것도 없으니.”

아르옌이 중얼거렸다. 넬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르옌을 흘겨보았다.

“회의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입 다물고 있었던 게. 뒤에서는 갑자기 말을 잘도 하네? 용사가 공격당할 때는 변호 한 번도 하지 않았으면서.”

넬라가 입술을 뒤틀었다. 아르옌은 코웃음을 치며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파티 대표가 있는데 내가 뭐라고 나서서 말하겠어? 파티원들까지 싸잡아서 욕 먹힐 일 있나. 네가 중간에 나서서 싸움판으로 만들어놓지만 않았어도 회의는 더 진행됐을 거다.”

아이시스까지 붙어 셋이 으르렁거리고, 게오르그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그만. 우리들끼리 싸워봤자 재앙 좋은 일만 시키는 거야.”

나는 입을 열었다. 아르옌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에야 와서 갑자기 좋은 파티 리더 행세라도 해 보이겠다는 말이냐?”

나는, 이 환상 속에서 대체 뭘 해야 하는 걸까. 안개는 대체 날 어떻게 굴복시키려는 걸까.

“정신 차려. 지금 재앙을 눈앞에 두고 뭐하자는 거야, 이게. 평소에야 서로 의견이 안 맞아서 싸울 수는 있겠지만, 우리끼리 다투다가 저 주민들. 저 사람들이 죽으면 누가 책임질 건데.”

조금 신경질이 난 걸까. 나는 공격적인 어투로 아르옌에게 따지고 들었다.

“적당히 좀 해. 애새끼처럼 굴지 말고.”

나는 내뱉듯이 그리 말하고서는 앞서 걸어갔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지난 거미 때만큼 쉽게 넘어갈 수는 없을 거 같다. 나는 아르옌의 눈을 노려보았고, 아르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러났다. 이 상태에서 크라켄을 물리칠 수 있기는 할까.

“…잘했다.”

막사로 돌아가는 길, 뒤에서 조용히 게오르그가 내게 말했다. 안개 속에서도 게오르그는 게오르그인 듯하다. 믿을 건 이 녀석 하나뿐인가. 나는 피식, 작은 웃음을 지으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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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회의장에 도착한 우리를 반겨준 건 의외의 소식이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회의장이 꽤 썰렁해진 것이다. 용사 파티를 바라보던 총사령관은 지휘봉으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총기사단장은 내 권한으로 이번 작전에서 뺐다. 오늘 아침에는 자기 기사단을 데리고 돌아갔더군. 왕궁에 소식이 전해진다면 그 자리를 유지하기도 힘들겠지.”

총사령관은 그 빈자리를 바라보다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이다. 진즉 알고 있었는데.”

총사령관은 팔짱을 끼며 우리들을 향해 돌아보았다.

“나는 알고 있다. 크라켄이 얼마나 끔찍한지. 정찰을 위해 나간 군함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그걸 직접 보지 못한 이들이나 저렇게 웃고 떠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대책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모양인 것 같군.”

총사령관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묻어나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주민들의 피난을 늦춘 이유가 뭡니까.”

“…내게는 의무가 있어. 비단 재앙을 막을 의무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왕국에 초래할 혼란을 최소화할 의무 말이야.”

그 두려움에 떠는 와중에도 자기 밥그릇은 챙기려 하는군. 내 일그러진 표정을 보던 총사령관은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세상만사가 다 그런 거다, 용사.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는 법이지.”

“…예. 알겠습니다. 회의나 시작하시죠.”

나는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려 하는 혐오감을 참아내며 말했다. 총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휘봉을 다시 해도 위로 올려놓았다.

“크라켄은 서서히 바크틴스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며칠 이내로 상륙할 것 같더군. 감시하는 함선은 현재 철수 중이고, 방어전에 총력을 쏟아붓기로 했다.”

총사령관이 지휘봉을 손바닥 위로 탁, 소리가 나게 올렸다.

“여기까지 질문은?”

“질문은 아니고, 건의 사항이 있습니다.”

나는 해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건의 사항?”

총사령관이 옆으로 슬쩍 물러섰고, 나는 해도를 짚어보며 말했다. 무슨 이유로 안개가 내게 이런 장면을 보여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방어전은 이곳에서 해야 합니다.”

환상 속에서라도, 사람을 지키는 것. 나는 바크틴스로 들어오는 좁다란 해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라면 크라켄이 상륙하는 걸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바다 위에서? 그 괴물을 말인가?”

“피난을 일찍 실시했더라면 그러지 않았어도 됐겠죠.”

나는 사납게 덧붙였다. 총사령관은 내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당신의 선택이었고, 대가를 치러야죠. 피난 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지켜야 하고, 크라켄이 육지에 상륙하게 내버려 두면 사람이 다 죽을 테니까요.”

총사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마물의 군세도 함께 몰려온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들이 더더욱 개활지로 올라오게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지 않습니까.”

나는 총사령관을 압박하려 얼굴을 들이밀었고, 총사령관은 내 눈을 바라보며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사이에서 줄다리기와 같은 눈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누군가의 말이 들려왔다.

“안 됩니다.”

나는 고개를 돌렸고, 나를 바라보는 아르옌과 눈을 마주쳤다.

“크라켄을 바다에서 상대하면 승산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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