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0 - 90. 과거에 두고 온 것 (5)
예정되어 있던 분열. 혹은 이 세상 그 자체의 농간.
나는 나와 총사령관의 사이로 끼어든 아르옌을 바라보았다. 총사령관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르옌은 그런 총사령관을 싸늘하게 한 번 노려본 후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아르옌은 그 덥수룩하게 긴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아르옌의 뒤통수에 대고, 총사령관이 물었다. 아르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바다 위에 띄워놓았던 군함이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아르옌은 내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놈과 맞서 싸울 발판도 없는데, 어떻게 바다 위에서 크라켄과 싸우라는 말입니까. 그건 그냥 자살행위라고 봐야 하겠죠. 물고기 밥이 되겠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서 아르옌은 목소리를 낮추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너 무슨 생각이냐. 바다 위에서 크라켄과 맞서 싸우겠다고? 지금 주민들의 피난이 늦어졌으니, 목숨이라도 바쳐서 사과하라고 시위라도 하는 거야, 뭐야?”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건 주민들이 아니지. 애초에 말이다, 모든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어졌어. 그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건 우리잖아. 저 사람들이 아니라.”
나는 침착하게 아르옌에게 대꾸했다. 그래, 원작에서의 다툼도 이런 식으로 끝도 없이 이어졌지. 결국 둘 다 칼을 뽑아 들고, 자신의 소신을, 이상을 증명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로이는 아르옌보다 약했다. 그리고 아르옌은 기어코 크라켄을 잡아냄으로써 자신의 말을 증명해 보였다.
“다시 천천히 생각해봐라. 총사령관이 상황 판단을 그릇되게 한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 책임을 우리가 굳이 떠안을 필요는 없어. 그냥 한발 물러나 있으면 된다고. 최종 지시권은 우리에게 있는 것도 아니잖냐.”
아르옌이 목소리를 침착하게 바꾸었다. 아르옌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모든 일의 원인은 결국 주민들의 피난을 늦게 실시한 총사령관에게 있으니까.
“물 위에서 싸우면, 웬만한 함선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부서지고 가라앉을 거다. 우리의 입장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다. 결국 바다는 크라켄이 제힘을 발휘하기 가장 좋은 곳이야. 적의 전력을 약화할 생각은 안 하고, 정정당당하게 맞서겠다는 거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로는 좁고 사이사이에 돌출된 섬도 많아. 우리가 발판 삼아 싸울 공간은 충분하다. 총사령관도 크라켄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폭이라고 했잖아. 그럼 해로로 진입할 수 있는 마물의 수도 적을 거야. 우리의 전력을 오로지 재앙 하나만 바라보고 쏟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렇다고 해도, 육지에서 놈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힘들 거다. 재앙이 고작 작은 섬 하나 부수지 못할 것 같나?”
설전은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르옌을 잠시 제쳐두고 총사령관에게 말을 걸려 했으나, 사령관은 손을 앞으로 뻗으며 나를 멈춰 세웠다.
“그만. 파티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데, 용사 자네만의 독선으로 내게 권고할 수는 없네. 파티의 의견이 통합될 때까지 이 건은 미뤄두도록 하지. 의견을 조율한 후 내게 다시 오게.”
“하지만, 총사령관님, 시간이….”
“그쪽의 용병도 자네보다는 전장에서 많이 굴렀을 테니까. 잘 이야기해보게. 나도 다시 중구난방으로 자기 할 말만 하는 회의장을 만들기는 싫어.”
이 망할 총사령관아. 여태까지의 경험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는 게 재앙과의 전쟁이라고. 당신이 그 괴물을 직접 봤다면서 그걸 모르냐?
나는 이곳이 안개가 보여주는 환상이라는 사실도 잊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작의 일로이는 도대체 여기서 무슨 생각으로 있었던 걸까?
“물론 여태 자네들이 나눈 의견은 잘 듣고 있었네. 잘 수렴해서 작전을 설계해보도록 하지.”
총사령관은 우리를 밖으로 내보냈다. 우리는 막사 밖으로 나와 잠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시계(視界)가 나쁘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아마 모두가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우우우웅.
고래가 우는 소리 같았다. 나는 수평선 너머로 뚜렷하게 가까워지고 있는 존재감을 느꼈다. 나만이 그것을 느낀 건 아닐 테지. 나는 표정이 굳어가는 용사 파티의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가까워지고 있어.”
넬라가 침음성을 내뱉었다. 내게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안개속에서 이것이 뚜렷하게 구현된다는 게 놀랍기는 하지만. 아이시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게오르그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평소에 늘상 무표정이던 아르옌마저, 딱딱하게 그 표정이 굳은 채로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저래도 저걸 바다에서 상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아르옌은 그러며 날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바다에서 상대해야 한다는 거야.”
나는 아르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르옌은 내 멀쩡해 보이는 표정에 혼란스러운 듯한 모습이었다. 이 녀석이 정말 저게 뭔지 알고나 있을까? 라고 의문스러워하는 듯하기도 했고, 어째서 이렇게까지 멀쩡한 모습인지도 궁금한 듯했다.
“저게 육상에 상륙하면, 그날부로 바크틴스는 끝장이니까.”
“저거랑 일대일로 싸울 수 있는 건 세상에 없어. 해군은 한주먹거리도 안 될 거다.”
아르옌은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우리가 나가서 맞선다고 해도, 저걸 간신히 붙들어둘 수 있을까말까다. 더군다나 바다 위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지.”
나는 아르옌의 표정을 보았다. 냉정함을 가장한 얼굴 뒤로 보이는 미약한 두려움.
“우리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을 거다. 어쩌면 너까지 포함해서 전멸할 수도 있어.”
“…그렇게 두지 않을 거다. 가장 선두에는 나와 네가 설 거고, 게오르그가 언제나처럼 아이시스를 지킨다. 그리고 넬라가 보조해준다면….”
“해주면? 저걸 쓰러트릴 수 있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리고는 성검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이 그때 가서도 다시 말을 걸어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약하고, 동료들은 나를 믿지 못한다.
“쓰러트릴 수는 없겠지.”
나는 솔직하게 그리 말했다. 아르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도대체 왜….”
“그리고 육지에서 그러리라는 보장도 없고 말이야.”
바다에서, 맞서 싸워야만 한다. 사람들을 지키려면.
“네가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강하면 모르겠다. 그런데 넌 나보다도 약하면서, 내가 저 재앙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데도, 왜 계속 바다에서 싸우자며 죽음을 재촉하는 거냐.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무책임한 말을 하냐는 말이다.”
아르옌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며 내게로 다가왔다.
“그럼 네 의견이나 한번 들어보지.”
나는 낮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네 말대로 육지까지 크라켄을 유인해서 쓰러트린다고 하자. 그럼 일단 바크틴스의 주민들을 지키지 못하는 건 확정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지 멀쩡하게 크라켄을 쓰러트리라는 보장이 있는 건 아니지. 어쩌면 바다에서 싸우는 것과 결과가 별반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르고.”
“우리가 놈을 쓰러트릴 가능성이 커지고, 우리 희생을 줄일 가능성도 커지지.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마라. 죽을 거면 혼자 가서 죽어.”
나는, 그때 이곳이 안개인지도 까먹은 채 소리를 버럭 질렀다.
“지금 희생을 강요하는 게 어느 쪽인데!”
아르옌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나는 아르옌을 노려보았다. 안다. 저 녀석이 이런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하지만, 그렇다고 아르옌의 말대로 할 수는 없었다. 비록 안개 속의 환상일지라도, 안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할지라도.
“좋아.”
아르옌의 손이 검자루 위로 올라갔다. 나는 저 녀석이 먼저 검을 빼들기 전, 재빠르게 성검을 뽑아 들며 대응했다.
쾅-!!
아르옌과 맞부딪힌다. 검과 검이 허공에서 얽히고, 다시 풀린다. 나는 지난번 아르옌과의 대련을 떠올리며 검을 내질렀다. 그때 아르옌이 보여주었던 습관, 호흡, 움직임. 아르옌은 환상 속에서도 강했고, 나는 여전히 그와 비교해 부족했다.
“자만하는군. 겨우 이 정도면서.”
그러니 정확히 한순간만을 포착한다. 나는 버텼다. 아르옌이 밀고 들어올 때까지 버텼다. 여태 내가 싸워왔던 이들 중 나보다 약한 이는 없었다. 처음 잿빛곰을 상대했을 때도, 아라그리드를 상대했을 때도, 거인을 상대로 싸웠을 때도. 난 언제나 나보다 강한 놈들을 상대했고, 이젠 그놈들을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물러서지 않는다. 파고 들어간다.
아르옌이 가장 간결한 동작으로 찌르고 들어왔다. 옆구리가 베인다. 열상을 입은 듯 뜨거운 감각이 옆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르옌의 팔을 붙들고 앞으로 메쳤다. 아르옌은 당황하며 내가 보내는 힘에 저항하려 했다. 그리고, 나는 아르엔이 저항하는 힘을 지지대 삼아 몸을 돌려 다리를 걸었다.
“-!!”
쓰러진다. 그리고, 아르옌의 목 위로는 성검이 자리했다.
“넌 뭘 하려 했던 거냐?”
나는 아르옌에게 검을 들이대며 물었다. 아르옌은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내뱉을 뿐이었다.
“네게 가르쳐주려 했지. 어째서 네 말에 따라 싸우러 나가면 안 되는지를.”
나는 아르옌을 잡아 일으켰다. 아르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내 눈을 바라보았다.
“도망가지 마라. 넌 이번 재앙 공략전에서 꼭 필요한 존재니까.”
“…도망은 무슨. 의뢰비는 받아야지. 왕국에서는 선불로 3할만 줬다고.”
아르옌은 내 손을 밀어내며 쓰디쓴 목소리로 말했다. 아르옌, 그치고는 포기가 빨랐다. 나는 멀어지려 하다 나를 돌아보는 아르옌의 눈을 마주 보았다. 저 검은 눈동자는, 어딘가 의미심장한 빛을 띠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네 파멸이다, 일로이. 이번 선택을 넌 정말 후회하지 않는다고 다짐할 수 있을까?”
저게 아르옌이 할 법한 말이었나.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고, 어느덧 아르옌은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나서서 중재할 일은 없어서 다행이군.”
게오르그가 입을 열었다. 나는 게오르그를 돌아보았다.
“나는 네 의견에 군말 없이 따르겠다. 차라리 이렇게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
중립을 지키겠다고 다짐한 녀석 아니었나. 나는 게오르그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전투에서 아이시스를 잘 지켜줘, 부탁이다. 전열은 나와 아르옌, 저 녀석과 둘이서 어떻게든 맡을 테니까 말이야.”
“널 한 번 믿어보마. 어쨌든 이번 전투는 밑져야 본전인 것 같으니.”
게오르그는 내게 그렇게 피식 웃어주고는 멀어졌다. 진작에 일로이가 조금 더 유한 태도로 나왔더라면 게오르그는 일로이의 편이 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일로이가 아르옌과 싸워 이겼더라면…. 아니, 그랬더라면 애초에 원작,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가 성립될 수 없나.
“…비록 여기라도.”
달라질 수 있을까.
나는 그 이후를 볼 수 있을까.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일로이라는 용사가 원했던 것. 그가 바란 풍경. 여기서라도 대신 이룰 수 있는 걸까. 나는 새로이 결심하고 눈을 떴다. 성검은 나는 나라고 했다. 여기서도, 계속 나는 나대로. 안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돌파해주리라고.
나는 그리 결심하고 막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 총사령관에게 파티의 통일된 의견을 들려주고 전투에 나선다. 그리고, 크라켄을 쓰러트리고 안개가 보여줄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발걸음에 힘이 들어갔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로의 끝이 어디든, 따라가 주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나의 성대한 착각이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로.
다음날, 나는 총사령관에게 작전 개요를 보고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 회의가 열리던 막사를 찾아갔다. 조금은 희망에 부푼 채,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막사를 열어젖히고, 나는 총사령관을 마주했다.
그리고, 막사 안에 펼쳐진 풍경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여, 일로이. 늦었군.”
게오르그. 나에게 아주 친숙한 듯 인사를 건네오고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게오르그의 옆에는 아르옌이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대의 시선은 없었다. 나는 그것이 도리어 이상하다고 생각해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일로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용사님, 오셨습니까.”
어?
“이제 곧 재앙을 잡으러 출발하는 거 맞죠? 어제 일로이가 작전을 브리핑해준 대로 총사령관님께 전달했어요. 총사령관께서도 알겠다고 승인했고요.”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가 탑승할 배로 이동하면 될 겁니다.”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두 사람이 있었다.
“믿어주세요. 이번에는 꼭 잘 싸울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다프네의 해사한 미소를 마주했다.
“용사님의 옆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마리안느의 굳센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아르옌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르옌은 언제나 그렇듯, 지극히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잖아, 일로이.”
아르옌의 목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게 네 파멸이 될 거라고.”